나는 샤워를 마치고 라커룸에서 막 옷을 갈아입으려는 중이었다. 갑자기 샤워장에서 한 백인이 뛰어 나오면서 샤워장에서 한 노인이 쓰러졌으니, 빨리 카운터에 이야기해서 응급의료팀을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마침 가방 들고 들어온 한국분이 계셔서 벗은 몸으로 뛰어 나갈 수 없으니, 대신 카운터에 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옆에서 보니,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나는 “사람이 쓰러졌으니, 빨리 나가서 직원에게 알려주세요” 하며 옆에서 덩달아 부탁했다. 라커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전라 내지는 반라 상태에서 뛰어나갈 수 없기에 방금 들어온 한국 분이 바로 나가 알리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한국 분은 마치 ‘네가 뭔데 나보고 가라마라 하냐?’는 눈치를 주면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고, 내가 옷이라도 빨리 주워 입고 나가야겠다고 하는 순간에 다른 백인이 들어와서 바로 부탁을 했다. 그 미국 분은 부탁을 받자마자 지체 않고 바로 뛰어나가 신고하여 구급의료원(paramedics)을 부르게 되었다.

그 후로 그 한국 분은 나와 발리에서 부딪힐 때마다 눈길을 피한다. 아무리 영어가 짧다하지만, 긴급 상황에서 선뜻 따라주지 못한 것이 아마 미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오늘 내 옆에 있는 라티노 분에게 영어로 부탁을 하는 소리를 어깨너머로 듣게 되었다. 자물통 열쇠를 수영장에서 잃어버린 것 같은데, 나가서 직원에게 자물통을 끊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젖은 수영복만 입고 있으니 나갈 순 없고, 어쩔 수 없이 부탁을 하는 듯 했다. 잠시 후 직원이 사람만한 커터를 들고와 자물통을 잘라 내었다. 한국 분은 라커룸의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방금 전 밖에 나가 말을 전해준 라티노분에게 땡큐를 했다. 그 순간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난 이 전일이 생각에 스쳤다. 그리고 이내 눈길을 피해 버렸다. 아마, 그 분도 또 미안했을 것이다.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외면했다가 창피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느니라 (고후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