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갈 사람을 미리 정하셨다니, 그러고도 사랑의 하나님인가요? ‘예수 천국 불신 지옥’도 거북한데, 이건 더없이 차가운 교리군요. 차라리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게 더 낫겠습니다.”
예정론은 과거 종교개혁 때부터 매우 ‘논쟁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칼빈의 ‘이중예정’은 버려진 자, 즉 ‘유기’(遺棄)에 대한 매우 냉정한 판단으로 비신자들은 물론 일부 신자들에게까지도 반감을 사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칼빈은 신앙과 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지만, 이 예정론으로 인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칼빈의 이중예정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 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미리 정하셨다(Predestination)는 말로 압축된다. 곧 ‘선택과 유기’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동시에 결정됐다는 것이다.
예정에 관한 칼빈의 정의는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멸망에 내어줄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과연 선택과 유기의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쉽게, 선택된 자는 그만한 선행을 했을 것이고 유기된 자 역시 그럴 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정론과 관계된 거의 모든 논쟁이 이 질문 앞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매우 사변적이고 용어들 또한 생소한 것들이 많다.
예정은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
그럼에도 큰 틀은 존재한다. 선택과 유기를 가르는 원인이 인간인지, 아니면 하나님인지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다.
대부분의 칼빈학자들은 그 원인을 하나님으로부터 찾는다. 이들은 ‘선택과 유기’에 인간의 행위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 칼빈 역시 자신의 예정론을 설명함에 있어 하나님의 ‘작정’ 혹은 ‘계획’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인간의 행위를 배제했다. 그리고 이들은 선택의 대칭으로 칼빈이 비록 유기를 언급했지만, 방점은 선택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김종희 교수(백석대학교 역사신학)는 “하나님은 예정하실 때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조건을 보고 하신 게 아니다.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다”며 “따라서 칼빈에게 하나님의 뜻은 예정의 궁극적인 이유다. 그래서 칼빈은 공로에 관한 예지사상을 반대했다. 공로를 예지하신 것을 기초로 예정하신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공로가 우선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칼빈이 예정론을 통해 유기가 아닌 선택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에 대해선 “칼빈은 ‘교리문답서’에서 예정론을 다루는 항을 ‘선택과 유기’라는 대칭구조로 하지 않고 ‘선택과 예정’이라고 함으로써 그의 관심이 선택에 있었음을 나타냈다”며 “칼빈에게 예정론은 사색의 결과가 아닌 신앙의 산물이다. 자신을 돌아보니 신앙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평하신 하나님이 예정으로 어떤 사람들을 유기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하기보다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재용 박사(한신대 전 총장)는 보다 엄격했다. 그는 ‘이중예정’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칼빈이 이중예정을 말한 건 사실이지만 그 본래 의도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주권이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절대 권한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중예정을 말한 것이지 결코 그것이 중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중예정을 분석하거나 그것으로 논쟁하는 것은 핵심을 벗어난 행위”라고 말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함께 고려돼야
그러나 다른 견해의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예정이 전적인 하나님의 뜻일 뿐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인간의 자유의지도 고려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배본철 교수(성결대)는 “하나님의 선행적 뜻으로 선택과 유기가 결정됐다는 것은 성경이 본래 말하려는 예정의 사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인간과 달리 하나님께는 과거라는 시간의 개념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리, 선행 등 과거를 의미하는 단어들에 이미 오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초시간적이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예정론은 하나님의 결정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초시간적 인지가 근거돼야 한다”며 “만약 하나님의 절대 뜻만 존재한다면 여기에는 인간의 반응, 곧 자유의지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구원이 과거에 미리 결정되고 그것이 변함없는 것이라면 방임주의로 흐를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가 바로 구원파”라고 밝혔다.
예정과 관련된 논쟁은 칼빈의 생존 당시에도 있었다. 주로 ‘누가 유기된 자이냐’를 따지는 것이었는데, 칼빈의 이중예정이 유기를 언급함에 있어서 유독 냉정했기 때문이다. 유기도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이라는 칼빈의 주장에 반대한 이들 중에는 인간의 행위만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주장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소위 ‘절대적 유기’에 다소 수정을 가할 것을 요구했다.
박상봉 박사(대신총회신학연구원)는 “칼빈이 스스로 ‘비참한 작정’으로 표명한, 하나님의 비밀한 작정에 근거한 유기의 개념을 불링거는 수용하지 않았다”며 “유기가 하나님의 작정에 속할 경우 하나님을 죄의 원작자로 만들 수 있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오직 선택만을 하나님의 작정에 근원을 두었으며, 유기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자유의지적으로 행한 타락의 결과로 봤다”고 말했다.
예정론, 신앙의 산물이자 분명한 교리… 소모적 논쟁 삼가야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는 이른바 ‘절대적’ 예정론자들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강조하는 이들은 자주 대립각을 세운다. 그러나 소모적 교리논쟁은 삼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배본철 교수는 “웨슬리적 사고가 비록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것”이라며 “칼빈의 5대 강령 중 마지막이 바로 성도의 견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마지막 영화에 이르는 순간까지 이끄시고 인도하시는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은 끊임없이 천국을 향해 나아가며 은총에 반응할 수 있다는 교리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하나님의 견인이 대전제이므로, 하나님의 절대적 뜻을 강조하는 칼빈학자들의 신학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칼빈은 인간의 공로를 내세웠던 로마가톨릭에 대항해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적 예정을 강조해야 했다. 웨슬리 역시 명목상 구원만을 외치는 영국 성공회에 대한 저항으로 인간의 책임을 역설했다”며 “그러나 지금 우리는 칼빈과 웨슬리의 시대를 모두 경험하고 배웠다. 어느 한 쪽의 편에서 상대방을 비난하고 배제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진 정점들을 모두 활용해 보다 발전된 교리를 완성해 갈 수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해묵은 교리 논쟁에 빠져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희 교수도 “하나님은 왜 똑같이 선택하지 않고 버리셨느냐, 라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며 “대담하게 하나님의 비밀로 침투하면 미로에서 길을 잃고 심연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 계시한 것 이상으로 무언가 찾으려 해선 안 된다. 분명한 건 칼빈의 예정론은 어떤 불확실성과 혼돈의 원천이 아닌 분명한 믿음과 위로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라고 지나친 교리적 분석을 경계했다.
‘선택과 유기’, 예정론은 진정 차가운 교리인가
“하나님 주권” vs “인간의 반응” 오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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