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이 노학자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50년도 더 된 일을, 이름 하나, 말 한 마디까지도. 그러다 먼 곳을 보며 턱을 괴기도 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걸까. 침묵을 깨는 건, “허허” 하는 그의 웃음소리. 절망과 슬픔, 기쁨과 환희가 뒤섞인 기억의 우물에서 그는 절망도 기쁨도 아닌 추억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모든 것을 아련한 웃음으로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한 가지 고백만을 갖게 했다.
“다 하나님의 은혜네요. 내가 한 것이라, 운이 좋았다 했는데, 돌아보니 하나님이 하셨어요. 네, 정말 그랬습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송용필 목사다.
구두닦이
송 목사의 고향은 함경남도 장진군 상남면.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해 충청남도 공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공부는 곧잘 했다. 공주에서 알아주는 중학교에도 합격했다. 문제는 등록금이었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중학교라 해도 등록금이 만만찮았다.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났다.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이. 10대의 아이는 주먹을 쥐었고, 집을 뛰쳐나왔다.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그곳엔 희망이 있을 줄 알았다.
기차에서 내리고보니 서울이 아닌 수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더 갈 힘도, 더 쓸 돈도 없었다. 무작정 역전 파출소로 들어갔다. 허름한 옷에 초췌한 얼굴, 그야말로 ‘거지꼴’을 한 아이가 가여웠던지, 경찰관들은 옷가지와 신발을 내줬다. 그 때부터 아이는 파출소에 머물며 청소도 하고, 경찰관들 구두도 닦아줬다. “그러지 말고 저기 대합실에서 손님들 구두를 닦아라. 그럼 돈을 벌 수 있지.” 누군가의 말에 아이는 대합실로 향했다. 정말이었다. 구두를 닦으니 돈이 생겼다. 믿기지 않았다. 나도 돈을 벌 수 있구나. 오랜만에 아이는 웃는다.
철도부원
기쁨도 잠시, 돈은 금세 떨어졌다. 배가 고프면 수원역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살기 위해. 운이 좋으면 고깃덩어리를 건질 수 있다. 그럼 역 한 쪽 귀퉁이에서 홀로 배를 채운다.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소금을 쳐 먹으면, 정말 꿀맛이다.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단다. 그 어떤 고급 스테이크를 먹어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 사람 노릇은 해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쓰레기통만 뒤지고 있을 텐가.” 아이는 비로소 철도부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생활하던 수원역에서, 그의 눈에 가장 멋있어 보이던 철도부원. 아이는 정갈한 제복을 입고 번쩍이는 나팔을 부는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래, 철도부원이 돼야지!”
저 멀리 철도부원 아저씨가 보인다. 아이는 가까이 다가갔다. “아저씨 아저씨, 철도부원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느닷없는 질문에 한참을 웃던 철도부원 아저씨가 답한다. “중학교부터 나와야지. 그런 후 철도고등학교에 가면 철도부원이 될 수 있단다.” 중학교라…, 아이는 막막했다.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아이에게 철도부원 아저씨가 던져준 한 장의 광고지. 한 영수학원의 것이었는데, 여길 다니면 지금의 검정고시처럼 고등학교에 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아이는 열심히 공부했다. 마침내 좋은 성적을 받아 당당히 입학서류를 들고 찾아간 철도고등학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마음은 이미 고등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한 마디. “학생은 나이가 너무 많아. 안 되겠어.”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실망했던 날”이라고.
표장수
아이는 수원역으로 돌아왔다. 수원역은 그에게 벗어나야 할 굴레였으나 한편 안식처이기도 했다. 꿈을 잃은 소년은 다시 예전의 그 삶을, 그저 생존의 본능으로 살아내야만 했다.
과거 우리나라의 진풍경. 바로 통행금지다. 사이렌이 울리면 어김없이 고요해졌다 또 한 번의 사이렌에 적막이 깨어지는, 살벌했던 그 때 그 시절. 당시 사람들은 서울로 향하는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앞 다퉈 수원역 매표창구로 향했다. 매일 단 9명만이 표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누군가 “표를 대신 사 달라”며 소년에게 돈을 쥐어줬다. 수원역이 집이었던 소년은 누구보다 빨리 표를 살 수 있었다. 그랬더니 거금이 들어왔다. 수고비였다. 며칠을 구두 닦으며 번 돈보다 한 번 표를 대신 사주고 번 돈이 더 많았다. 이거다, 싶었다. 소년은 그 때부터 수원역 표장수로 불렸다.
종각
돈을 좀 벌었다. 수원에 있는 상업고등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잠자리는 여전히 수원역이었다. 어느 날 한 목사가 “너 역에서 잔다며? 교회 종각 옆에 작은 방을 내줄테니 매일 새벽종을 좀 쳐라”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교회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소년은 교회와 학교를 오가며 공부했고 결국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김장환 목사, 그리고 난초
대학 재학 중 군대를 갔다. 제대 후 복학하려니 등록금이 막막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신문에서 미군의 오산 비행장 노무자를 뽑는다는 광고를 봤다. 일을 하고 싶었지만 친구로부터 “오산 비행장 노무자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청년 송 목사는 당시 김장환 목사가 시무하는 수원의 한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알다시피 김 목사는 ‘미국통(通)’이다. 청년은 김 목사를 찾아가, 오산 비행장에 취직하고 싶은데 길이 없겠느냐 물었다.
김 목사의 도움으로 청년은 미군 오산기지의 한 대령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비행장과 청년이 다니던 대학이 너무 멀다는 이유였다. 돌아가려는데, 그 대령이 김 목사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 “한국에도 미국의 오르킷(orchid; 난초)이 있느냐”고. 오르킷, 당시만 해도 한국엔 이게 드물었다. 김 목사는 없다고 했다. 대령은 안타까워했다. 미국에 두고 온 그의 아내를 위해 대령은 그 난초의 꽃을 그려주고 싶었던 거다.
청년의 마음도 아팠다. 얼마나 아내가 그리울까. 낯선 땅을 지키려 집을 떠나온 그 대령을 위해 청년은 반드시 난초를 구해주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온 청년은 그대로 난초를 한 아름 안고 다시 오산으로 향했다. 청년을 만난 대령은 한 참이나 웃었다. 자신을 위해 난초를 구해온 정성에 감동해 웃었고, 전혀 다른 난초여서 웃었다. 이상하게 청년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가 농대 식물원까지 뒤졌다. 묻고 물어 끝내 대령이 말한 난초를 찾았고 그는 기뻤다. 하지만 이번엔 그 난초에 꽃이 없었다. 아직 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그만둘 텐가. 청년은 도감을 구했다. 어차피 그림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실제 꽃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도감을 들고 다시 대령을 찾았다. 도감에서 자신이 찾고 있던 난초의 꽃을 발견한 대령은 그 자리에서 아내를 위한 그림을 그렸고, 청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자넬 결코 잊을 수 없을 걸세.”
미국
세월이 흘렀다. 청년도 일상을 살았다. 어느 날 편지가 왔다. 미국의 어느 독지가가 부친 것인데, 청년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자금을 대겠다는 내용이었다. 웬일인가 했다. 알고 보니 그 독자가가 다니는 교회에서 오산 미군기지의 그 대령이 간증을 했는데, 청년을 말했다는 것이다. 이 간증에 너무 은혜를 받아 이렇게 편지를 부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청년은 실감할 수가 없었다.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이 도움으로 청년은 대학을 졸업했다. 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중 그 독지가로부터 다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아예 미국에 건너와 이곳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청년은 기뻤다. 그리고 결심했다. 미국에 가겠노라고. 그곳에서 꿈을 이루겠다 다짐했다.
목사가 되다
미국에 온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계사가 됐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와 결혼까지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아내와 함께 매일 성경을 읽었지만 그저 습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구약 열왕기하 7장. 광야를 떠돌던 문둥이 네 명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적, 아람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돕는다는 내용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자신의 처지가 마치 문둥이와 같았단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기회의 땅’ 미국까지 왔고, 기업들의 회계를 맡으며 배를 채웠지만, 그가 떠나온 고향, 곧 북한을 위해선 얼마나 애썼던가.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구두닦이 아이가, 표장수 소년이, 난초의 청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회계사가 비로소 송용필 목사로 거듭나던 순간이다.
다시 한국에
목사가 된 그는 미국에서 김장환 목사를 다시 만난다. 김 목사는 한 교회 집회에서 ‘전파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공감한 송 목사는 김 목사에게 함께 사역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렇게 송 목사는 1978년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김장환 목사와 함께 사역하며 많은 일들을 했다. 지금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며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다.
“참 기가 막힌 인생이죠. 삶의 굴곡을 얘기하라면 아마 저만한 사람이 없을 걸요. 구두닦이가 신학교 부총장까지 됐으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의문도 듭니다. 매 순간마다 절 도와줬던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 때마다 절묘한 행운이 따랐으니까 말이죠. 하나님께서 하신 거라고 할 밖에는 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래요. 다 하나님이 하셨다, 배고프면 먹을 것 주셨고 추우면 입을 것 주셨고,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제 발걸음을 이끄셨다……. 제 인생의 고백입니다.”
꿈
“꿈이요? 허허. 고맙네요. 늙은이에게 꿈을 물어봐주니. 그래요. 꿈이 있어요.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암에 걸려(송 목사는 최근 임파선 암에 걸렸지만 지금은 회복단계에 있다.-편집자 주) 이렇게 머리숱은 줄었지만 그래도 할 게 남았죠.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데 남은 인생, 부지런히 빚을 갚으며 살겁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은 하나님께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을 졌다고 했는데 살아보니 그렇대요. 하나님께 빚을 많이 졌어요. 그 빚 다 갚으려면 암도 이겨내야 하고…, 주변 사람들도 도와야죠. 여전히 꿈 많은 구두닦이들이 많을 테니까.”
송용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와 미국 밥존스대학교(B.S.)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회계사(CPA)로 생활하다 회심, Grand Rapid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M.Div.)학위를 취득하고 Western Baptist College & Seminary 등 미국의 세 개 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얻었다.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개신교 지도목사(Chaplain)로 활동했다. 서울 올림픽 당시 칼 루이스 등 금메달리스트들의 간증집회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극동방송 이사를 역임했고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Centennial Christian School)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현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으로 있다.
“다 하나님의 은혜네요. 내가 한 것이라, 운이 좋았다 했는데, 돌아보니 하나님이 하셨어요. 네, 정말 그랬습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송용필 목사다.
구두닦이
송 목사의 고향은 함경남도 장진군 상남면.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해 충청남도 공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공부는 곧잘 했다. 공주에서 알아주는 중학교에도 합격했다. 문제는 등록금이었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중학교라 해도 등록금이 만만찮았다.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났다.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이. 10대의 아이는 주먹을 쥐었고, 집을 뛰쳐나왔다.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그곳엔 희망이 있을 줄 알았다.
기차에서 내리고보니 서울이 아닌 수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더 갈 힘도, 더 쓸 돈도 없었다. 무작정 역전 파출소로 들어갔다. 허름한 옷에 초췌한 얼굴, 그야말로 ‘거지꼴’을 한 아이가 가여웠던지, 경찰관들은 옷가지와 신발을 내줬다. 그 때부터 아이는 파출소에 머물며 청소도 하고, 경찰관들 구두도 닦아줬다. “그러지 말고 저기 대합실에서 손님들 구두를 닦아라. 그럼 돈을 벌 수 있지.” 누군가의 말에 아이는 대합실로 향했다. 정말이었다. 구두를 닦으니 돈이 생겼다. 믿기지 않았다. 나도 돈을 벌 수 있구나. 오랜만에 아이는 웃는다.
철도부원
▲송용필 목사. ⓒ김진영 기자 |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 사람 노릇은 해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쓰레기통만 뒤지고 있을 텐가.” 아이는 비로소 철도부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생활하던 수원역에서, 그의 눈에 가장 멋있어 보이던 철도부원. 아이는 정갈한 제복을 입고 번쩍이는 나팔을 부는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래, 철도부원이 돼야지!”
저 멀리 철도부원 아저씨가 보인다. 아이는 가까이 다가갔다. “아저씨 아저씨, 철도부원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느닷없는 질문에 한참을 웃던 철도부원 아저씨가 답한다. “중학교부터 나와야지. 그런 후 철도고등학교에 가면 철도부원이 될 수 있단다.” 중학교라…, 아이는 막막했다.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아이에게 철도부원 아저씨가 던져준 한 장의 광고지. 한 영수학원의 것이었는데, 여길 다니면 지금의 검정고시처럼 고등학교에 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아이는 열심히 공부했다. 마침내 좋은 성적을 받아 당당히 입학서류를 들고 찾아간 철도고등학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마음은 이미 고등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한 마디. “학생은 나이가 너무 많아. 안 되겠어.”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실망했던 날”이라고.
표장수
아이는 수원역으로 돌아왔다. 수원역은 그에게 벗어나야 할 굴레였으나 한편 안식처이기도 했다. 꿈을 잃은 소년은 다시 예전의 그 삶을, 그저 생존의 본능으로 살아내야만 했다.
과거 우리나라의 진풍경. 바로 통행금지다. 사이렌이 울리면 어김없이 고요해졌다 또 한 번의 사이렌에 적막이 깨어지는, 살벌했던 그 때 그 시절. 당시 사람들은 서울로 향하는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앞 다퉈 수원역 매표창구로 향했다. 매일 단 9명만이 표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누군가 “표를 대신 사 달라”며 소년에게 돈을 쥐어줬다. 수원역이 집이었던 소년은 누구보다 빨리 표를 살 수 있었다. 그랬더니 거금이 들어왔다. 수고비였다. 며칠을 구두 닦으며 번 돈보다 한 번 표를 대신 사주고 번 돈이 더 많았다. 이거다, 싶었다. 소년은 그 때부터 수원역 표장수로 불렸다.
종각
돈을 좀 벌었다. 수원에 있는 상업고등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잠자리는 여전히 수원역이었다. 어느 날 한 목사가 “너 역에서 잔다며? 교회 종각 옆에 작은 방을 내줄테니 매일 새벽종을 좀 쳐라”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교회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소년은 교회와 학교를 오가며 공부했고 결국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김장환 목사, 그리고 난초
대학 재학 중 군대를 갔다. 제대 후 복학하려니 등록금이 막막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신문에서 미군의 오산 비행장 노무자를 뽑는다는 광고를 봤다. 일을 하고 싶었지만 친구로부터 “오산 비행장 노무자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청년 송 목사는 당시 김장환 목사가 시무하는 수원의 한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알다시피 김 목사는 ‘미국통(通)’이다. 청년은 김 목사를 찾아가, 오산 비행장에 취직하고 싶은데 길이 없겠느냐 물었다.
김 목사의 도움으로 청년은 미군 오산기지의 한 대령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비행장과 청년이 다니던 대학이 너무 멀다는 이유였다. 돌아가려는데, 그 대령이 김 목사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 “한국에도 미국의 오르킷(orchid; 난초)이 있느냐”고. 오르킷, 당시만 해도 한국엔 이게 드물었다. 김 목사는 없다고 했다. 대령은 안타까워했다. 미국에 두고 온 그의 아내를 위해 대령은 그 난초의 꽃을 그려주고 싶었던 거다.
청년의 마음도 아팠다. 얼마나 아내가 그리울까. 낯선 땅을 지키려 집을 떠나온 그 대령을 위해 청년은 반드시 난초를 구해주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온 청년은 그대로 난초를 한 아름 안고 다시 오산으로 향했다. 청년을 만난 대령은 한 참이나 웃었다. 자신을 위해 난초를 구해온 정성에 감동해 웃었고, 전혀 다른 난초여서 웃었다. 이상하게 청년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가 농대 식물원까지 뒤졌다. 묻고 물어 끝내 대령이 말한 난초를 찾았고 그는 기뻤다. 하지만 이번엔 그 난초에 꽃이 없었다. 아직 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그만둘 텐가. 청년은 도감을 구했다. 어차피 그림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실제 꽃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도감을 들고 다시 대령을 찾았다. 도감에서 자신이 찾고 있던 난초의 꽃을 발견한 대령은 그 자리에서 아내를 위한 그림을 그렸고, 청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자넬 결코 잊을 수 없을 걸세.”
미국
▲송용필 목사. ⓒ김진영 기자 |
이 도움으로 청년은 대학을 졸업했다. 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중 그 독지가로부터 다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아예 미국에 건너와 이곳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청년은 기뻤다. 그리고 결심했다. 미국에 가겠노라고. 그곳에서 꿈을 이루겠다 다짐했다.
목사가 되다
미국에 온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계사가 됐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와 결혼까지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아내와 함께 매일 성경을 읽었지만 그저 습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구약 열왕기하 7장. 광야를 떠돌던 문둥이 네 명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적, 아람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돕는다는 내용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자신의 처지가 마치 문둥이와 같았단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기회의 땅’ 미국까지 왔고, 기업들의 회계를 맡으며 배를 채웠지만, 그가 떠나온 고향, 곧 북한을 위해선 얼마나 애썼던가.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구두닦이 아이가, 표장수 소년이, 난초의 청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회계사가 비로소 송용필 목사로 거듭나던 순간이다.
다시 한국에
목사가 된 그는 미국에서 김장환 목사를 다시 만난다. 김 목사는 한 교회 집회에서 ‘전파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공감한 송 목사는 김 목사에게 함께 사역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렇게 송 목사는 1978년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김장환 목사와 함께 사역하며 많은 일들을 했다. 지금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며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다.
“참 기가 막힌 인생이죠. 삶의 굴곡을 얘기하라면 아마 저만한 사람이 없을 걸요. 구두닦이가 신학교 부총장까지 됐으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의문도 듭니다. 매 순간마다 절 도와줬던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 때마다 절묘한 행운이 따랐으니까 말이죠. 하나님께서 하신 거라고 할 밖에는 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래요. 다 하나님이 하셨다, 배고프면 먹을 것 주셨고 추우면 입을 것 주셨고,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제 발걸음을 이끄셨다……. 제 인생의 고백입니다.”
꿈
“꿈이요? 허허. 고맙네요. 늙은이에게 꿈을 물어봐주니. 그래요. 꿈이 있어요.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암에 걸려(송 목사는 최근 임파선 암에 걸렸지만 지금은 회복단계에 있다.-편집자 주) 이렇게 머리숱은 줄었지만 그래도 할 게 남았죠.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데 남은 인생, 부지런히 빚을 갚으며 살겁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은 하나님께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을 졌다고 했는데 살아보니 그렇대요. 하나님께 빚을 많이 졌어요. 그 빚 다 갚으려면 암도 이겨내야 하고…, 주변 사람들도 도와야죠. 여전히 꿈 많은 구두닦이들이 많을 테니까.”
송용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와 미국 밥존스대학교(B.S.)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회계사(CPA)로 생활하다 회심, Grand Rapid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M.Div.)학위를 취득하고 Western Baptist College & Seminary 등 미국의 세 개 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얻었다.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개신교 지도목사(Chaplain)로 활동했다. 서울 올림픽 당시 칼 루이스 등 금메달리스트들의 간증집회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극동방송 이사를 역임했고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Centennial Christian School)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현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으로 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