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는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욕망이나 욕구임을 중점으로 다루려 한다. 이는 비단 인터넷중독 뿐만 아니라 모든 중독이 이런 욕구결핍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착안한다. 이는 인터넷중독자를 보다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시도다. 인간이 욕구에 결핍됐을 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가 인터넷중독이라는 가설이 가능한 이유다. 상담치료는 이런 인간의 깊은 이해에 기초해 치료한다. 여기서는 인간의 심리적 측면, 특히 상담치료에 기대 다음 몇 가지를 구분하려 한다.
1. 인터넷중독을 유발하는 원인으로서의 욕망
인간은 욕망의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인터넷중독자도 욕망의 결핍을 채우려다 인터넷에 빠져든 현상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낙담해 인터넷을 가까이 하고, 멀리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욕구인지 의문이 생기겠지만, 이들의 욕구결핍은 한 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고 결과적으로 인터넷 때문에 자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포로가 된 것이다. 원인을 밝히기 앞서 먼저는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행동 기저에는 욕망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일어나 무언가를 찾고 움직이는 행동은 욕망을 위한 것이다. 학생은 지식을 찾아 학교로 가고, 직장인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터로 나선다. 저마다 무언가를 바라고 이루기 위해 아침부터 움직인다. 이를 우리는 욕구나 욕망 때문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런 욕망은 인간에게 본능적인 것으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원리에서 이해된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무의식이란 대개 역동성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이 지나치면, 다시 말해 욕망에 심각한 결핍이 생기면 병리적 차원으로 이행돼 삶이 짓눌릴 뿐 아니라 거기에 압도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병리 현상이고, 지나치면 중독으로 이행된다. 이것이 옳다면 인터넷중독자들의 증상은 그런 역동성 안에서 병리적 차원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들의 병리적 차원이란 충족을 원하는 욕망을 추구하다 병리적 증상까지 이행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중독은 심리학적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현상에서 출발했다. 그들이 인터넷을 지나치게 사용함은 욕망과 관련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인터넷 사용은 욕망의 빈 곳을 채우려는 동경에서 실패해 인터넷으로 달래는 행동 양상이다. 욕망의 빈 곳이란 일종의 심리적 결핍, 애정 결핍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러한 욕망의 결핍을 없애고, 심리적·정신적 안정을 가져다주리라 기대되는 대상을 정복하는 힘으로 인터넷을 사용한다.
이런 경우 그들에게 인터넷은 부족함을 채우려는 수단이 되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인터넷중독자들이 심각한 애정 결핍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상담치료에서 중독자는 유달리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기대한다. 이들에게 결여된 인정과 사랑이 생각만큼 충족되지 않으면 더 인터넷을 찾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와 달리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그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경우 인터넷 사용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들의 인정과 사랑이 인터넷 사용 시간을 줄이는 힘이라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정과 사랑이고 그것의 결핍이 더 중독으로 빠지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인정과 사랑의 욕망은 간단하게 충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단순한 하나의 독립적인 힘 자체가 목표지향적 행동으로 그들을 채워주는 물질적 재화를 향한 힘만은 아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충족을 원하는 욕망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면이 다시 그들에게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해 생활을 흐트러뜨리고 삶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들이 알아야 하고, 알려 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심리적 세력은 그들이 다른 것들과 함께 쾌락의 기억들, 과거 속에서 망각돼 무엇인지 모를 기억들, 과거에서 겪었던 절망이나 좌절 때문에 욕망이 저절로 생기지만 때로는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변환되거나 변질돼 혼합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생각하면 욕망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욕망의 원리를 누가 쉽게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욕망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점에서 매우 잔인한 법칙이라는 점이 그들로 하여금 욕망에 더욱 이끌리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의 무의식에서 약동하는 욕망을 잘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상담치료에서 존재의 분석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에 압도돼 욕망에 조절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치료자는 그들의 내면에서 약동하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세력으로서 욕망을 잘 분석하여 이해시키고 거기에 순응하거나 수용하는 법칙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면서도 남 탓만 하는 그들의 투사적 행동이나 태도가 바로 그런 무의식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점을 인식하면 그들의 행동이 점차 누그러지거나 순화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2. 욕망과 결핍의 상관관계
인터넷중독자를 욕망 결핍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욕망을 알 수 있도록 분석하는 작업이나 시도는 그들을 가장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문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바탕이다. 그들이 심리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욕망이란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설명되거나 해석될 수 있지만, 일단 원초적 욕망을 생각해야 한다. 어린 시절 마땅히 충족됐어야 할 특성에 초점을 둬야 한다.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충족을 원하는 특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을 욕구로 설명해도 무방하다. 욕구란 특성상 충족을 원하지만, 결핍을 전제로 하는 점에서다. 여기서 중독성이란 일정한 조건에서 결핍을 원하는 결과로 일어난 증상이다. 다만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자신도 원하지 않는 증상에 빠진 것이 중독으로 이행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욕망과 결핍이 상관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욕망이 결핍을 부르고 결핍이 다시 욕망을 부추기는 점에서다. 이 현상에서 일차로 중요한 것은 욕망이란 몸에 대한 감각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고 계속 반복해서 느끼는 욕망의 결핍은 배고픔과 갈증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보다 몸에서 먼저 느끼기 때문인데, 이런 시각에서 중독자와 어머니의 관계를 간과할 수 없다. 어머니의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받으면 중독 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점에서다.
그러면 그들이 성장하던 어린 시절을 관련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그들에게는 아주 어린 시기에 어머니의 가슴과 그 대체물이 그들을 안심시키고 쾌락을 가져다 준 최초의 대상이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적어도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충족을 원하는 심리적 특성이 충족으로 지향하게 만든 점에서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런 충족의 원초적 경험과 결핍 경험은 정신 안에 욕망과 힘의 원천을 새겨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은 행복에 대한 꿈, 성적 환상,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중독을 향한 갈망이 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결핍의 특성은 때로 그들에게 신비한 욕망을 표상하는 경우 상징적인 언어의 자궁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현상에 대해 정신분석학은 욕망의 원초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에 구순성(口脣性)이라 이름붙이고 있다. 그러면 그들에게 감각적인 빨기를 특징으로 하는 구순성이 얼마나 충족됐는가 문제는 다시 구순성을 특징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어린 시기라 단정했을 것이다. 이는 다분히 정신분석학적 관점이지만, 어린 시절과 관련해 무의식적으로 충족과 결핍을 발견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다. 이는 어린 시기가 인간의 욕망이 나타나는 최초 형태로 이런 현상이 성인에게 나타나면 유아기로 퇴행한 것으로 판단할 이유다.
그러나 어린 시기와 관련한 정신분석학 이론은 명쾌하지 않은 점이 문제다. 어린 시기란 입술 주위에 자리잡은 욕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정신분석학은 어린 시기의 결핍이 성인이 돼 키스나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린 시기의 욕망 결핍은 신체 기관과의 관계와 결핍에 의하거나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특성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하지 않은데, 신체적인 것이 정신적으로 이어지는 측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신분석학 외에도 일반심리학조차 성장하는 아동기의 신체접촉 결핍이 정신적인 결핍으로 이어진다고 인정된다. 성장기에 어머니와 살의 접촉이라는 스킨십이 결여된 경우 정서적 안정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에게는 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행동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사랑할 때 유달리 키스를 즐기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때로 키스를 다른 행위보다 더 자극적이고 쾌감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이를 특정 학파의 견해로 한정할 수도 있지만, 정신적인 특성과도 매우 연결됨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입을 벌리거나 음식물을 받아들이면서 행하는 동작들은 정신 안에 하나의 실존적 도식을 새겨넣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은 일상 생활에서도 보편적으로 입증돼야 한다는 전제를 갖는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원리를 실제 생활에서 실현해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이를 따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고 그 자신을 드러내며, 스스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인 것은 유치한 것으로만 볼 수 없는데, 눈은 어둠과 색깔을 통해 무엇을 보거나 조망하면서 이 세상이나 실존을 구성하고, 이 세상이란 각자 눈에 보이는 조직 안에서 형성되는 점에서다. 이는 욕망을 말할 때 색깔을 말하거나 빛을 노래하게 만드는 이유가 돼, 치료에서 어린 시절,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3. 어린 시기의 욕망과 심리적 결핍
인터넷중독자들의 심리적 결핍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그들의 어린 시기로 돌아가자. 어린 시기의 욕망이 결핍된 데는 오늘의 인터넷중독자들이 관련돼 있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 대로 어린 시기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은데, 성인이 돼 정신 결핍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일단 어린 시기의 욕망에는 가능성과 위험이 동시에 내포돼 있다고 본다.
어린 시기 생긴 결핍은 성인이 돼도 드러나는 점이 중요하다. 심리 결핍을 채우려는 충동은 적극 충족하려는 행동을 유발하지만, 내면에 수동적으로 머무르면서 다른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만약 그들에게 어린 시기의 욕망이 없다면, 자제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거나 조직화하려는 본능을 가지면서 소유하려는 충동을 더 많이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 경우 그들은 가장 좋은 실현의 무대로 놀이를 즐기는 능력을 배가시켰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고태적 기억과 언어의 부름이 사랑을 유토피아적 행복으로 바라게 할지라도 어쩌면 그들에게는 사랑도 불가능해졌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상담치료에서 욕망 결핍을 경험한 신앙인들을 면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남편이 외도하는 경우 성도는 유달리 심리적 갈등과 고통에 시달린다.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달라지는 점에 중점을 두고 상담하지만 때로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들은 자신보다 남편이 더 달라지기 원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들은 남편의 그런 행동에 오래 시달려서 지칠대로 지쳐,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런 말을 듣노라면 치료자로서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대개 어머니·아버지와의 관계가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들은 대개 부모와의 관계가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면, 그들에게는 정신적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긍정적이지 못한 점이 오늘날 남편에 대한 대응이나 적응을 원만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치료에서 그들의 무의식에 부정적 특성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의식의 부정적 특성을 신앙인들과 관련해보기로 하자. 이미 주님을 의지하는 막강한 신앙을 가졌는데, 왜 신앙인들에게 그런 어려움이 따르는가 말이다. 이를 두고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그들의 기도가 약한 것만을 탓할 수는 없다. 이미 신앙을 문제로 삼기 전 그들의 존재 형성이 문제를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대개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놀랄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신앙인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점이다. 이는 어린 시절 인격 형성에서 문제를 보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점에서 어린 시기 욕망 결핍은 신앙에서도 적용된다. 이들의 어린 시기에 결핍된 문제가 신앙으로 결합된다 해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나 이뤄지지만, 욕망이 너무 빈약하면 합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병리적 측면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중요시하면 신앙이나 비신앙 구분할 것 없이 어린 시기의 욕망 결핍은 성장 후 다르게 나타날 위험이 있고, 급기야 특별한 병리를 유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욕망이나 갈망이라는 단어는 욕망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평가절하시키고 내면으로부터 모든 기쁨을 앗아가는 불안정성을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태의 원인은 한 가지로만 돌릴 수 없기에 더 정확한 원인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병리 현상을 정신치료 기법에 기대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욕망을 알려면 정신분석에 기대 무의식을 알아야 한다. 무의식은 정신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이해하는 길이지만, 이는 특별한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때 무의식을 논하려면 일단 환상이나 꿈을 알아야 한다. 환상이나 꿈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의 표상은 그 환상적인 기억들로 개인의 정신을 사로잡으면서 떠나지 않는 만족감을 강박적이고 반복적으로 찾게 만드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이 경우 누군가를 통해 그 충족을 시도하지만, 어떤 만남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므로 이들이 신앙적으로 집중해 열심을 낸다면 하나님은 이런 구순 욕망에서 일어나는 갈증을 해갈해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절망적인 중독자들에게는 자신이 그렇게도 추구하는 대체 가능한 대상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4. 애착의 결핍으로서의 어린 시기의 욕망
치료자는 인터넷중독자들의 어린 시기 욕망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들에게 어린 시기의 욕망은 대개 어머니로 나타나는 최초의 대상에 고착돼 있다. 이 최초의 관계 속에서 그들은 모든 관계 속에서 바라는 관계의 전형적 특성을 그들 내면에서 체험하고, 그런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지 모를 일이다. 그들은 어머니가 그에게 주던 형태의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면서 그의 내면에 애착 능력을 발달시키고, 그들은 애착 속에서 예전에 받았던 생명과 기쁨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 확실히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주는 애착의 확신은 정신에 안정감을 부여하는가? 답은 일단 긍정적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공한 애착이란 대개 안전함, 따뜻한 사랑의 열기, 다른 사람이 그를 맞아줄 때 느끼는 자기애에서 나오는 확증,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맹세로부터 비롯된 살려는 욕망, 다른 사람을 붙잡을 줄 앎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안정감이다. 이 특성들은 일종의 욕망으로 가는 향도(嚮導)로, 애착은 사람들에게 관계를 맺는 능력과 그 관계가 앞으로 만족과 바라던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긍정적 기대를 발달시킨다.
그러나 그런 애착이 그들이 바라던 모성적 가치와 반대되는 현실을 경험했을 때, 어린 시절 그들은 더 참지 못하게 됐을 수 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애착으로 욕망은 항상 안전한 것과 피난처를 찾으면서 갈등 관계를 무시하고 도피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애착이 결핍된 인터넷중독자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미래를 정복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쓰라린 대가를 치뤄 가면서 사랑의 상실을 위협할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이 현상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기에 그들에게 집착이라는 단어는 모성적 가치를 다시 취하고 연장시키려는 욕망에서 나온 방어적 후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인터넷중독자들에게 치료에서 신앙 차원의 권면이 필요한 이유다. 임상경험에 의하면 신앙적 관점의 증가는 그들에게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신앙이란 본래 ‘관계를 맺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에서 하나님은 다른 많은 의미도 있지만, 죄의식을 가진 신경증 환자가 생각하듯 박해자처럼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면 애착을 갖고 바라는 가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실제로 신앙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 애착의 연장이라는 방식으로 발달했고, 하나님은 어머니를 연상시키며 어머니가 약속한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애착의 심리학자들이 신앙적 소명을 향해 나가는 사람들이란 그의 연령대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애착의 요소를 더 많이 나타내고, 하나님에게 모성적 특성을 더 많이 부여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이 관점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신앙인들과 대비시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존에 기반을 둔 인간 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통해 그들의 욕망을 달래려 애쓰는 측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아버지의 기능에 본질적으로 주어진 특성과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에게 부여한 속성이 애착 관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심판자, 규범. 율법 또는 여성이라는 요청 등이 해당한다. 이런 경우 하나님에게 있는 아버지의 기능이 특별히 사람들에게 자기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자극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갈등을 야기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유난히 하나님에게 있는 그 차원을 지우고, 안심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의미를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또다른 관점을 가능하게 만든다. 죄의식에 대해 반발하는 태도는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기표를 없애버리려는 이유로 설명된다. 실로 어린 시기의 욕망 결핍이 신앙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나타나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인터넷중독자들의 애착 결핍은 오늘의 문제를 유발시켰고 반드시 충족돼야 할 특성임이 분명하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그들에게 진정한 치료자로 다가가거나 치료로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인터넷중독자를 깊이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5. 중독 증상과 모성적 결핍
중독 증상은 어떤 것이든 대개 모성적 결핍을 점검해야 한다. 그들에게 모성 결핍이 없다면 인터넷중독자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C. G. Jung)은 술을 많이 마시는 현상은 모성애의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다. 모성애의 그리움이란 이미 모성 결핍이라는 점에서 중독자들에게 첫번째 요인일 수 있다. 인터넷중독도 모성 결핍 원리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상담치료에서 인터넷중독자들은 모두 배우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특징이 있음을 들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무도 자신을 인정하거나 알아주지 않는 점이 문제이지만, 특히 가까운 배우자나 자녀들이 그러면 답답하니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들이 모성 결핍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장기에 충분한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고 보는 것이다. 결혼으로 욕구를 충족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해 인터넷중독으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애착 실패를 들어야 한다. 어린 시기 애착 과정이란 대개 애착 양태에 따라 욕망 안에 위험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점은 정신병리적 맥락에서 어떻게 내포되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애착 실패는 성인이 돼 사람들 간 관계를 소홀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사람이 신앙에 정진하는 경우 사람들 사이를 화합시키고 적대적인 것들을 화해시키려는 욕망에 더 사로잡힐 수 있다. 신앙에 남다르게 심취하는 경우 이런 애착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들에게 신앙이란 적어도 세상에서 살지만 천상의 예루살렘을 바라는 향수를 고취시킨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갈등의 역동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신앙으로 향할 위험성도 있다. 하나님만을 향한 채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형태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상당히 경험된다. 신앙을 위주로 살기 때문에 형식주의의 대명사인 바리새인적, 이른바 신간미(神間美)를 발휘하지만 인간미(人間美)를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다르게 말하면 바리새적 비판이나 정죄는 미움이 바탕이라면, 진정한 인간미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때로 용서하는 등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바리새적인 사람들에게 모든 공격성을 정죄하는 성향이 고조된 점이 문제일 수 있다.
모성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경우 자비롭고 희생적인 사람을 찬양하는 수많은 신앙적 담론이 허용되기에 어렵다. 그들에게는 이익과 근본 선택 사이 대립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투쟁의 격렬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성애 결핍이 일상생활 뿐 아니라 종교생활에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인터넷 중독자들의 모성애 결핍은 애착에 대한 욕망과 결부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애착에 대한 욕망은 삶의 필요성과 이어지는 좌절을 만나면서 쉽사리 불신으로 가득한 요구와 우울의 태도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심리상태를 가진 사람이 신앙을 가진다면 신앙을 너무 인간 욕망을 달래려는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기독교 메시지의 또다른 본질적인 부분, 이를테면 하나님의 부성 측면인 예언자의 영감을 소홀히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진리와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건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 가치감이나 우위를 점유하려는 인간적 특성이 맹위를 떨치게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보다는 자신의 자아실현이 중심이 되는 신앙인들이 있음을 상정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애착 실패로 인한 모성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모성 결핍 문제는 중독 뿐 아니라 신앙에서도 상당한 연관을 갖고 나타난다. 애착에서 비롯된 욕망이 변화되지 않으면 인간 현실과 신앙 메시지 사이 갈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실제 우리는 애착 관점에서 신앙적인 요구를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애착 실패, 모성 결핍이 있을수록 신앙이 더 피부에 와 닿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감각적인 면을 더 요구하는 형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심지어 신앙까지도 감각적 특성을 요구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신앙을 통해 왜소해지는 사람은 아직 지나친 병리현상이 아니지만, 그 속에서 우울한 상태로 미끄러지거나 편집증적 상태로 나아가려는 싹은 자라고 있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지만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람, 즉 신앙에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시각에서 모성적 가치를 우선하는 태도는 개인적 애착과 신앙적 애착을 더 많이 가지는 요인이다. 그런 애착은 사랑의 에너지인 리비도의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애착으로부터 모든 것을 바라는 욕구인 신앙적 욕망이 생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적 욕구는 신적 현실의 표지 아래 통합되고, 평화를 누리는 인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신비에 대한 욕망,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은 한편으로 신앙적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나 무엇인가를 깨우쳐주려고 할 때 다시 활성화되고, 다른 한편 어린 시기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모성과의 분리로 인한 고통이나 갑작스러운 결핍으로 인한 고난 때문에 다시 활성화되곤 한다. 이는 잘못된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인터넷으로 고통당하는 중독자들에게도 그대로 통하는 점에서 치료자들이 그들을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6. 욕망의 결핍과 존재의 형성
인터넷 중독자들에게 욕망 결핍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치료의 중요한 점이다. 치료자가 그들을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태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깊은 이해는 치료를 원만하게 만드는 점에서 치료자는 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욕망이 특성상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개방하고 애착이라는 기초 위에 관계를 형성하는 요인이므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언어 속에서 형성되고 전개되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지배 속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지각되는 세계를 뛰어넘는 훨씬 넓은 세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또 개인은 언어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현존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주체가 되는 것은 그가 1인칭으로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근본 사실로 경험되는 것으로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고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치료자는 인터넷중독자들의 언어에 민감해야 한다. 그들의 언어는 심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실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생각을 만들고 삶을 만들어 온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면 치료자들은 그들에게서 욕망의 결핍을 의미하는 언어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는 현재에도 관련되지만, 더 깊이는 과거에 관련된 욕망과의 결핍이다. 이 점은 신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신앙적 담화와 언어의 본질적 특성 사이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앙인들이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실 때문에 언어는 사람들이 참여하려는 영적 보편성(universal spirituality)의 자리가 되는 이유다.
언어는 그 자체에 의해 정신이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점에서 말한다는 것은 원리상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의미를 갖고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즉시 의사소통과 관계의 잠재능력이 어떻게 언어의 주체 안으로 스며들어가는지를 알고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린 시기 애착이라는 근본적인 체험이 사람들이 언어세계에 들어가면서 얻는 개방과 약속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욕망을 가진 존재가 되지 못한다.
언어를 사용해 넓혀지고 변화된 어린 시기 애착은 존재의 모든 것을 관념의 망(網) 속에 집어넣고, 사물의 내밀한 본질을 포착하려는 욕망을 낳게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최초 대상에 의한 결핍을 채우려 애쓴다. 이런 시각에서 다른 사람을 지적으로 지배하려는 열정은 신앙적 애착을 대체하는데, 그 열정은 때때로 독특한 존재와 개인적으로 융합되려는 데까지 나간다. 지적 지배에 대한 열망은 종교 안에 자리 잡는데, 그때 그것은 종교에서 일상적인 것을 모두 제외시키고 불행을 아무 것도 아니도록 환원시키면서 종교를 철학적 신앙으로 변화시킨다. 그때 초래된 위험은 때로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신앙과는 달리 성적인 충동이 생기고 그것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도 사람들의 신앙적 욕망의 내용과 형태가 결정되는 데 영향을 준다. 그것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 욕망과 사랑의 능력이 가정에서 발달하는 동안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욕망과 사랑은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욕망, 자녀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욕망, 그들과 자녀가 하나되게 하려는 욕망을 표현하면서 그들의 내면에 심어놓는다. 이런 욕망이 성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상상으로 나타나고, 아이들의 신체 기능과 그들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 주위에서 생기는 쾌락과 성적으로 비슷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 흐르는 애정과 욕망에 대한 증언으로, 그들이 거기에 포함돼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동일시된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의 갈등관계인 오이디푸스적 애착이라는 복합 과정에 의해 욕망의 존재로 변화됐다고 본다. 이는 여러 오해가 있음에도 인간의 성욕이 형태와 목적이 하나의 시나리오로써 생물학적으로 미리 만들어진 본능에 불과하다면, 신앙적 욕망과의 관계에 의해 생각하려는 것이 모순이다. 여기서는 결핍이 중독으로 빠지게 만드는 점에서 신앙으로 깊이 빠져든 신앙중독도 생각할 수 있다. 좋은 것이라도 중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욕망 결핍이 존재를 형성하는 점에서 오늘날 인터넷중독자와 신앙중독자 사이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7. 중독 특성과 애정 결핍
중독의 특성은 결핍이라 했다. 결핍은 물론 매우 심리적이다. 인터넷중독자도 현상적으로는 인터넷에 빠졌지만, 실제로는 애정 결핍, 즉 사랑의 결핍이라 봐야 한다. 애정 결핍이라는 점에서는 사랑의 에너지인 성욕 발휘를 생각해야 한다. 분명히 인간의 성욕은 리비도적이라 보는 점에서다. 다른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신체 기능을 원활히 하고 요구하며 응답하는 관계 속에서 발달하는 쾌락을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는 주체의 상호 관계상 전조가 들어있는 것이다.
사랑의 원초적 형태는 남녀 사이의 욕망과 부모와 자녀 사이의 욕망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성적 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나님을 성부(聖父)라는 남자로 생각하는 점에서 남자보다는 여성에게 좋겠고, 남자에게는 성모(聖母)여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면 더 좋을지 모르겠다. 실제 성적 특성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무튼 하나님이 성적 특성이라는 점에서 성적 사랑을 주체로 하고, 또는 대상으로 받았든 다른 사람들이 성적 사랑을 하는 것을 듣고 봤기 때문에 가능하다. 욕망과 사랑이 승화라는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는 것도 성적 욕망을 갖고 사랑할 수 있는 최초의 능력 위에서라 보고 싶다.
욕망적 사랑의 에너지인 리비도가 승화되면 성욕의 본질적 특성을 지니지만, 성적 기능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여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가 되면서 쾌락을 느낀다. 사랑은 승화라는 형태를 따라 ‘희생적 사랑’이라는 거저 주는 선물로 나타날 수 있는 데도 사람들은 흔히 욕망과 사랑 사이의 대립이 잘못된 영성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들이 죄의식 때문에 욕망을 알아보지 못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이 아니고, 서로 선물을 교환하면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확장시키고 강화시키려는 욕망이 아니면서 동시에 사랑인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에로스와 아가페를 나누고, 욕망으로의 사랑과 희생적 사랑을 나누는 이원론적 대립이 무의미할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신앙과 리비도적 이해가 필요하다.
신앙은 리비도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래적 모습인 욕망하고 사랑할 줄 아는 인간 능력에 말을 걸면서, 사람들을 파괴시키지 않고 변화시키기 위해 리비도가 흘러드는 표상들을 불러모은다. 그러므로 리비도의 원천이고, 주체가 동일시하는 모든 형상은 언제나 신앙적 욕망을 나타내는 상징의 후원자로 남을 것이다. 그것들은 신앙적 욕망의 양태에 대해서 알려 주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욕망의 표상을 결정한다. 그리스도의 인간 형상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심적 사실이라면, 그 욕망이 리비도를 형성하고 변화시킨 인간적 형성에 더 물들어있어야 한다. 신앙적 욕망과 사랑 및 인간의 욕망과 사랑 사이에는 아주 단순한 유비관계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이 신과의 관계 안에 전이(轉移)되고 확충된 것밖에 없는 것이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했듯, 이 세상에는 하나의 사랑밖에 없기에 신앙적 욕망을 에로틱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욕망 자체에 본래 내장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발달시켜야 하는 것이 단 하나의 사랑이라면, 욕망의 에로티시즘화라는 말은 병리의 시점을 판정하려 할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모하는 모호한 말이 된다. 그러면 애정 결핍이 인터넷중독을 초래한 점이 핵심이지만, 이는 신앙까지 연결된 점을 기술했다. 자칫 상당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중독의 특성이 진정 애정 결핍임을 알게 된다. 실로 충족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중독을 부르는 점에서다. 욕망 결핍, 애정 결핍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결론: 모든 중독은 결핍에서, 인터넷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인터넷 중독자의 욕망의 문제를 다뤘다. 상담치료에서 인터넷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해 욕망의 문제를 이해해하는 점을 기술한 것이다. 그런 욕망은 대개 어린 시절의 모성적 애착 실패로 채워지지 않은 것이 불만감으로 작용한 것이 중점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어린 시절로 국한되지 않고, 현재는 성욕 에너지인 리비도와도 상당 부분 관련됐다.
나아가 그런 욕망은 다시 모성 결핍, 그리고 현재 애정 결핍에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기술하면서 신앙과 비교했는데, 욕망 결핍이 있을 때 잘못된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욕망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부족하다 생각이다. 이는 치료자가 인간 본능이나 욕망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춰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고, 그 욕망은 오늘의 인터넷중독을 초래하고 말았다는 근본 문제를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상담에서 치료자가 그들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면 치료는 요원할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특성이 있다. 어린 시기 욕망은 성인이 돼서도 계속된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인 이상, 그 욕망은 인간의 존재 가치감을 충족하는 열쇠가 된다. 그러면 욕망을 충족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중독에 빠질 위험이 있다. 욕망은 특성상 충족을 원하고, 그것이 정상적이지 못할 때 일정 형태의 중독을 부르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커서 충족하려는 욕망이 작용한다. 이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남자는 결혼한 아내에게서 그 충족을 기대한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불만이 생겨나 활력을 잃어버리지만, 충족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와 스킨십이 결여된 남자는 아내와의 스킨십을 추구하고, 어머니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 남자는 아내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 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마땅히 채워야 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잔(盞)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잔을 ‘욕망의 잔’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욕망의 잔을 우리는 본능이라 부른다. 저자는 임상을 거듭할수록 이를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은 욕망이라는 본능에 결핍이 일어나면 심각한 병리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아니면 신체적인 것이 심리적으로 이행됐든, 심리적인 것이 신체로 전이된 것인지만 다를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이해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랑의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랑은 잃어버린 젖가슴을 다시 찾는 행위라고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이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남자들이 유달리 여성의 젖가슴에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이런 시각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이유로 남자들은 유방을 여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유방이 큰 여자를 선호한다. 이는 쾌락에서 여성적 특성을 제외시킬 수 없는 이유다. 여성적인 특성이 제외되면 쾌락의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술과 여자가 항상 함께하는 점에서도 이해된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컬어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터넷중독자를 사랑의 결핍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칼 융(C. G. Jung)이 말한 대로 인터넷중독자들이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는 행동은 모성애의 결핍으로 보거나, 프로이트가 어머니 가슴에 안긴 갓난아기로 돌아가려는 유아적 행위로 보려는 것이다. 사랑의 상징인 어머니를 동경하는 점에서 일치된다고 본다. 전자는 정신적 측면을, 후자는 신체적 측면의 강조로 볼 수 있다. 물론 그 현상과는 달리, 정신과 신체의 구분은 모호하다. 아무튼 이러한 상징적 모습은 개인의 기억 창고에 새겨져 있어 결핍을 느끼는 존재는 마치 속이 텅 비어있거나 움푹 파인 상태임을 말한다.
상담치료는 이런 결핍의 문제를 눈여겨 봐야 한다.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심리적 결핍이 내면에 작용해 그들을 중독에 끌리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에서 인터넷중독자를 돌보는 경우라면 이런 욕망 문제를 착안해 치료하기 바란다. 그러면 많은 점에서 풀리지 않고 신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시원하게 뚫릴 것이다. 저자도 상담치료에서 그들을 잘 치료할 수 있었던 계기가 이런 욕망에 착안하고부터다. 그런 이유로 상담치료에서도 인터넷중독자를 오로지 신앙 만능만을 주장하는 자세로 대하기보다, 인간을 욕망이 결핍된 존재로 이해할 때 좋은 결과를 경험하리라 확신한다. 교회에서 오로지 믿음의 문제로만 보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인간적인 이해를 가지고 보려는 태도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인터넷중독을 유발하는 원인으로서의 욕망
인간은 욕망의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인터넷중독자도 욕망의 결핍을 채우려다 인터넷에 빠져든 현상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낙담해 인터넷을 가까이 하고, 멀리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욕구인지 의문이 생기겠지만, 이들의 욕구결핍은 한 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고 결과적으로 인터넷 때문에 자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포로가 된 것이다. 원인을 밝히기 앞서 먼저는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행동 기저에는 욕망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일어나 무언가를 찾고 움직이는 행동은 욕망을 위한 것이다. 학생은 지식을 찾아 학교로 가고, 직장인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터로 나선다. 저마다 무언가를 바라고 이루기 위해 아침부터 움직인다. 이를 우리는 욕구나 욕망 때문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런 욕망은 인간에게 본능적인 것으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원리에서 이해된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무의식이란 대개 역동성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이 지나치면, 다시 말해 욕망에 심각한 결핍이 생기면 병리적 차원으로 이행돼 삶이 짓눌릴 뿐 아니라 거기에 압도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병리 현상이고, 지나치면 중독으로 이행된다. 이것이 옳다면 인터넷중독자들의 증상은 그런 역동성 안에서 병리적 차원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들의 병리적 차원이란 충족을 원하는 욕망을 추구하다 병리적 증상까지 이행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중독은 심리학적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현상에서 출발했다. 그들이 인터넷을 지나치게 사용함은 욕망과 관련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인터넷 사용은 욕망의 빈 곳을 채우려는 동경에서 실패해 인터넷으로 달래는 행동 양상이다. 욕망의 빈 곳이란 일종의 심리적 결핍, 애정 결핍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러한 욕망의 결핍을 없애고, 심리적·정신적 안정을 가져다주리라 기대되는 대상을 정복하는 힘으로 인터넷을 사용한다.
이런 경우 그들에게 인터넷은 부족함을 채우려는 수단이 되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인터넷중독자들이 심각한 애정 결핍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상담치료에서 중독자는 유달리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기대한다. 이들에게 결여된 인정과 사랑이 생각만큼 충족되지 않으면 더 인터넷을 찾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와 달리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그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경우 인터넷 사용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들의 인정과 사랑이 인터넷 사용 시간을 줄이는 힘이라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정과 사랑이고 그것의 결핍이 더 중독으로 빠지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인정과 사랑의 욕망은 간단하게 충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단순한 하나의 독립적인 힘 자체가 목표지향적 행동으로 그들을 채워주는 물질적 재화를 향한 힘만은 아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충족을 원하는 욕망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면이 다시 그들에게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해 생활을 흐트러뜨리고 삶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들이 알아야 하고, 알려 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심리적 세력은 그들이 다른 것들과 함께 쾌락의 기억들, 과거 속에서 망각돼 무엇인지 모를 기억들, 과거에서 겪었던 절망이나 좌절 때문에 욕망이 저절로 생기지만 때로는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변환되거나 변질돼 혼합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생각하면 욕망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욕망의 원리를 누가 쉽게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욕망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점에서 매우 잔인한 법칙이라는 점이 그들로 하여금 욕망에 더욱 이끌리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의 무의식에서 약동하는 욕망을 잘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상담치료에서 존재의 분석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에 압도돼 욕망에 조절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치료자는 그들의 내면에서 약동하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세력으로서 욕망을 잘 분석하여 이해시키고 거기에 순응하거나 수용하는 법칙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면서도 남 탓만 하는 그들의 투사적 행동이나 태도가 바로 그런 무의식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점을 인식하면 그들의 행동이 점차 누그러지거나 순화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2. 욕망과 결핍의 상관관계
인터넷중독자를 욕망 결핍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욕망을 알 수 있도록 분석하는 작업이나 시도는 그들을 가장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문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바탕이다. 그들이 심리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욕망이란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설명되거나 해석될 수 있지만, 일단 원초적 욕망을 생각해야 한다. 어린 시절 마땅히 충족됐어야 할 특성에 초점을 둬야 한다.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충족을 원하는 특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을 욕구로 설명해도 무방하다. 욕구란 특성상 충족을 원하지만, 결핍을 전제로 하는 점에서다. 여기서 중독성이란 일정한 조건에서 결핍을 원하는 결과로 일어난 증상이다. 다만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자신도 원하지 않는 증상에 빠진 것이 중독으로 이행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욕망과 결핍이 상관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욕망이 결핍을 부르고 결핍이 다시 욕망을 부추기는 점에서다. 이 현상에서 일차로 중요한 것은 욕망이란 몸에 대한 감각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고 계속 반복해서 느끼는 욕망의 결핍은 배고픔과 갈증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보다 몸에서 먼저 느끼기 때문인데, 이런 시각에서 중독자와 어머니의 관계를 간과할 수 없다. 어머니의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받으면 중독 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점에서다.
그러면 그들이 성장하던 어린 시절을 관련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그들에게는 아주 어린 시기에 어머니의 가슴과 그 대체물이 그들을 안심시키고 쾌락을 가져다 준 최초의 대상이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적어도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충족을 원하는 심리적 특성이 충족으로 지향하게 만든 점에서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런 충족의 원초적 경험과 결핍 경험은 정신 안에 욕망과 힘의 원천을 새겨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은 행복에 대한 꿈, 성적 환상,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중독을 향한 갈망이 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결핍의 특성은 때로 그들에게 신비한 욕망을 표상하는 경우 상징적인 언어의 자궁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현상에 대해 정신분석학은 욕망의 원초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에 구순성(口脣性)이라 이름붙이고 있다. 그러면 그들에게 감각적인 빨기를 특징으로 하는 구순성이 얼마나 충족됐는가 문제는 다시 구순성을 특징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어린 시기라 단정했을 것이다. 이는 다분히 정신분석학적 관점이지만, 어린 시절과 관련해 무의식적으로 충족과 결핍을 발견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다. 이는 어린 시기가 인간의 욕망이 나타나는 최초 형태로 이런 현상이 성인에게 나타나면 유아기로 퇴행한 것으로 판단할 이유다.
그러나 어린 시기와 관련한 정신분석학 이론은 명쾌하지 않은 점이 문제다. 어린 시기란 입술 주위에 자리잡은 욕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정신분석학은 어린 시기의 결핍이 성인이 돼 키스나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린 시기의 욕망 결핍은 신체 기관과의 관계와 결핍에 의하거나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특성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하지 않은데, 신체적인 것이 정신적으로 이어지는 측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신분석학 외에도 일반심리학조차 성장하는 아동기의 신체접촉 결핍이 정신적인 결핍으로 이어진다고 인정된다. 성장기에 어머니와 살의 접촉이라는 스킨십이 결여된 경우 정서적 안정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에게는 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행동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사랑할 때 유달리 키스를 즐기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때로 키스를 다른 행위보다 더 자극적이고 쾌감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이를 특정 학파의 견해로 한정할 수도 있지만, 정신적인 특성과도 매우 연결됨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입을 벌리거나 음식물을 받아들이면서 행하는 동작들은 정신 안에 하나의 실존적 도식을 새겨넣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은 일상 생활에서도 보편적으로 입증돼야 한다는 전제를 갖는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원리를 실제 생활에서 실현해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이를 따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고 그 자신을 드러내며, 스스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인 것은 유치한 것으로만 볼 수 없는데, 눈은 어둠과 색깔을 통해 무엇을 보거나 조망하면서 이 세상이나 실존을 구성하고, 이 세상이란 각자 눈에 보이는 조직 안에서 형성되는 점에서다. 이는 욕망을 말할 때 색깔을 말하거나 빛을 노래하게 만드는 이유가 돼, 치료에서 어린 시절,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3. 어린 시기의 욕망과 심리적 결핍
인터넷중독자들의 심리적 결핍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그들의 어린 시기로 돌아가자. 어린 시기의 욕망이 결핍된 데는 오늘의 인터넷중독자들이 관련돼 있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 대로 어린 시기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은데, 성인이 돼 정신 결핍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일단 어린 시기의 욕망에는 가능성과 위험이 동시에 내포돼 있다고 본다.
어린 시기 생긴 결핍은 성인이 돼도 드러나는 점이 중요하다. 심리 결핍을 채우려는 충동은 적극 충족하려는 행동을 유발하지만, 내면에 수동적으로 머무르면서 다른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만약 그들에게 어린 시기의 욕망이 없다면, 자제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거나 조직화하려는 본능을 가지면서 소유하려는 충동을 더 많이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 경우 그들은 가장 좋은 실현의 무대로 놀이를 즐기는 능력을 배가시켰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고태적 기억과 언어의 부름이 사랑을 유토피아적 행복으로 바라게 할지라도 어쩌면 그들에게는 사랑도 불가능해졌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상담치료에서 욕망 결핍을 경험한 신앙인들을 면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남편이 외도하는 경우 성도는 유달리 심리적 갈등과 고통에 시달린다.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달라지는 점에 중점을 두고 상담하지만 때로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들은 자신보다 남편이 더 달라지기 원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들은 남편의 그런 행동에 오래 시달려서 지칠대로 지쳐,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런 말을 듣노라면 치료자로서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대개 어머니·아버지와의 관계가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들은 대개 부모와의 관계가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면, 그들에게는 정신적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긍정적이지 못한 점이 오늘날 남편에 대한 대응이나 적응을 원만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치료에서 그들의 무의식에 부정적 특성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의식의 부정적 특성을 신앙인들과 관련해보기로 하자. 이미 주님을 의지하는 막강한 신앙을 가졌는데, 왜 신앙인들에게 그런 어려움이 따르는가 말이다. 이를 두고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그들의 기도가 약한 것만을 탓할 수는 없다. 이미 신앙을 문제로 삼기 전 그들의 존재 형성이 문제를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대개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놀랄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신앙인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점이다. 이는 어린 시절 인격 형성에서 문제를 보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점에서 어린 시기 욕망 결핍은 신앙에서도 적용된다. 이들의 어린 시기에 결핍된 문제가 신앙으로 결합된다 해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나 이뤄지지만, 욕망이 너무 빈약하면 합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병리적 측면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중요시하면 신앙이나 비신앙 구분할 것 없이 어린 시기의 욕망 결핍은 성장 후 다르게 나타날 위험이 있고, 급기야 특별한 병리를 유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욕망이나 갈망이라는 단어는 욕망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평가절하시키고 내면으로부터 모든 기쁨을 앗아가는 불안정성을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태의 원인은 한 가지로만 돌릴 수 없기에 더 정확한 원인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병리 현상을 정신치료 기법에 기대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욕망을 알려면 정신분석에 기대 무의식을 알아야 한다. 무의식은 정신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이해하는 길이지만, 이는 특별한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때 무의식을 논하려면 일단 환상이나 꿈을 알아야 한다. 환상이나 꿈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의 표상은 그 환상적인 기억들로 개인의 정신을 사로잡으면서 떠나지 않는 만족감을 강박적이고 반복적으로 찾게 만드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이 경우 누군가를 통해 그 충족을 시도하지만, 어떤 만남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므로 이들이 신앙적으로 집중해 열심을 낸다면 하나님은 이런 구순 욕망에서 일어나는 갈증을 해갈해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절망적인 중독자들에게는 자신이 그렇게도 추구하는 대체 가능한 대상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4. 애착의 결핍으로서의 어린 시기의 욕망
치료자는 인터넷중독자들의 어린 시기 욕망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들에게 어린 시기의 욕망은 대개 어머니로 나타나는 최초의 대상에 고착돼 있다. 이 최초의 관계 속에서 그들은 모든 관계 속에서 바라는 관계의 전형적 특성을 그들 내면에서 체험하고, 그런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지 모를 일이다. 그들은 어머니가 그에게 주던 형태의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면서 그의 내면에 애착 능력을 발달시키고, 그들은 애착 속에서 예전에 받았던 생명과 기쁨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 확실히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주는 애착의 확신은 정신에 안정감을 부여하는가? 답은 일단 긍정적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공한 애착이란 대개 안전함, 따뜻한 사랑의 열기, 다른 사람이 그를 맞아줄 때 느끼는 자기애에서 나오는 확증,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맹세로부터 비롯된 살려는 욕망, 다른 사람을 붙잡을 줄 앎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안정감이다. 이 특성들은 일종의 욕망으로 가는 향도(嚮導)로, 애착은 사람들에게 관계를 맺는 능력과 그 관계가 앞으로 만족과 바라던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긍정적 기대를 발달시킨다.
그러나 그런 애착이 그들이 바라던 모성적 가치와 반대되는 현실을 경험했을 때, 어린 시절 그들은 더 참지 못하게 됐을 수 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애착으로 욕망은 항상 안전한 것과 피난처를 찾으면서 갈등 관계를 무시하고 도피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애착이 결핍된 인터넷중독자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미래를 정복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쓰라린 대가를 치뤄 가면서 사랑의 상실을 위협할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이 현상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기에 그들에게 집착이라는 단어는 모성적 가치를 다시 취하고 연장시키려는 욕망에서 나온 방어적 후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인터넷중독자들에게 치료에서 신앙 차원의 권면이 필요한 이유다. 임상경험에 의하면 신앙적 관점의 증가는 그들에게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신앙이란 본래 ‘관계를 맺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에서 하나님은 다른 많은 의미도 있지만, 죄의식을 가진 신경증 환자가 생각하듯 박해자처럼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면 애착을 갖고 바라는 가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실제로 신앙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 애착의 연장이라는 방식으로 발달했고, 하나님은 어머니를 연상시키며 어머니가 약속한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애착의 심리학자들이 신앙적 소명을 향해 나가는 사람들이란 그의 연령대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애착의 요소를 더 많이 나타내고, 하나님에게 모성적 특성을 더 많이 부여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이 관점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신앙인들과 대비시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존에 기반을 둔 인간 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통해 그들의 욕망을 달래려 애쓰는 측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아버지의 기능에 본질적으로 주어진 특성과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에게 부여한 속성이 애착 관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심판자, 규범. 율법 또는 여성이라는 요청 등이 해당한다. 이런 경우 하나님에게 있는 아버지의 기능이 특별히 사람들에게 자기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자극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갈등을 야기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유난히 하나님에게 있는 그 차원을 지우고, 안심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의미를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또다른 관점을 가능하게 만든다. 죄의식에 대해 반발하는 태도는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기표를 없애버리려는 이유로 설명된다. 실로 어린 시기의 욕망 결핍이 신앙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나타나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인터넷중독자들의 애착 결핍은 오늘의 문제를 유발시켰고 반드시 충족돼야 할 특성임이 분명하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그들에게 진정한 치료자로 다가가거나 치료로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인터넷중독자를 깊이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5. 중독 증상과 모성적 결핍
중독 증상은 어떤 것이든 대개 모성적 결핍을 점검해야 한다. 그들에게 모성 결핍이 없다면 인터넷중독자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C. G. Jung)은 술을 많이 마시는 현상은 모성애의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다. 모성애의 그리움이란 이미 모성 결핍이라는 점에서 중독자들에게 첫번째 요인일 수 있다. 인터넷중독도 모성 결핍 원리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상담치료에서 인터넷중독자들은 모두 배우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특징이 있음을 들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무도 자신을 인정하거나 알아주지 않는 점이 문제이지만, 특히 가까운 배우자나 자녀들이 그러면 답답하니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들이 모성 결핍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장기에 충분한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고 보는 것이다. 결혼으로 욕구를 충족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해 인터넷중독으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애착 실패를 들어야 한다. 어린 시기 애착 과정이란 대개 애착 양태에 따라 욕망 안에 위험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점은 정신병리적 맥락에서 어떻게 내포되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애착 실패는 성인이 돼 사람들 간 관계를 소홀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사람이 신앙에 정진하는 경우 사람들 사이를 화합시키고 적대적인 것들을 화해시키려는 욕망에 더 사로잡힐 수 있다. 신앙에 남다르게 심취하는 경우 이런 애착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들에게 신앙이란 적어도 세상에서 살지만 천상의 예루살렘을 바라는 향수를 고취시킨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갈등의 역동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신앙으로 향할 위험성도 있다. 하나님만을 향한 채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형태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상당히 경험된다. 신앙을 위주로 살기 때문에 형식주의의 대명사인 바리새인적, 이른바 신간미(神間美)를 발휘하지만 인간미(人間美)를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다르게 말하면 바리새적 비판이나 정죄는 미움이 바탕이라면, 진정한 인간미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때로 용서하는 등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바리새적인 사람들에게 모든 공격성을 정죄하는 성향이 고조된 점이 문제일 수 있다.
모성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경우 자비롭고 희생적인 사람을 찬양하는 수많은 신앙적 담론이 허용되기에 어렵다. 그들에게는 이익과 근본 선택 사이 대립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투쟁의 격렬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성애 결핍이 일상생활 뿐 아니라 종교생활에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인터넷 중독자들의 모성애 결핍은 애착에 대한 욕망과 결부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애착에 대한 욕망은 삶의 필요성과 이어지는 좌절을 만나면서 쉽사리 불신으로 가득한 요구와 우울의 태도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심리상태를 가진 사람이 신앙을 가진다면 신앙을 너무 인간 욕망을 달래려는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기독교 메시지의 또다른 본질적인 부분, 이를테면 하나님의 부성 측면인 예언자의 영감을 소홀히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진리와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건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 가치감이나 우위를 점유하려는 인간적 특성이 맹위를 떨치게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보다는 자신의 자아실현이 중심이 되는 신앙인들이 있음을 상정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애착 실패로 인한 모성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모성 결핍 문제는 중독 뿐 아니라 신앙에서도 상당한 연관을 갖고 나타난다. 애착에서 비롯된 욕망이 변화되지 않으면 인간 현실과 신앙 메시지 사이 갈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실제 우리는 애착 관점에서 신앙적인 요구를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애착 실패, 모성 결핍이 있을수록 신앙이 더 피부에 와 닿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감각적인 면을 더 요구하는 형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심지어 신앙까지도 감각적 특성을 요구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신앙을 통해 왜소해지는 사람은 아직 지나친 병리현상이 아니지만, 그 속에서 우울한 상태로 미끄러지거나 편집증적 상태로 나아가려는 싹은 자라고 있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지만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람, 즉 신앙에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시각에서 모성적 가치를 우선하는 태도는 개인적 애착과 신앙적 애착을 더 많이 가지는 요인이다. 그런 애착은 사랑의 에너지인 리비도의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애착으로부터 모든 것을 바라는 욕구인 신앙적 욕망이 생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적 욕구는 신적 현실의 표지 아래 통합되고, 평화를 누리는 인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신비에 대한 욕망,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은 한편으로 신앙적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나 무엇인가를 깨우쳐주려고 할 때 다시 활성화되고, 다른 한편 어린 시기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모성과의 분리로 인한 고통이나 갑작스러운 결핍으로 인한 고난 때문에 다시 활성화되곤 한다. 이는 잘못된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인터넷으로 고통당하는 중독자들에게도 그대로 통하는 점에서 치료자들이 그들을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6. 욕망의 결핍과 존재의 형성
인터넷 중독자들에게 욕망 결핍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치료의 중요한 점이다. 치료자가 그들을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태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깊은 이해는 치료를 원만하게 만드는 점에서 치료자는 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욕망이 특성상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개방하고 애착이라는 기초 위에 관계를 형성하는 요인이므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언어 속에서 형성되고 전개되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지배 속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지각되는 세계를 뛰어넘는 훨씬 넓은 세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또 개인은 언어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현존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주체가 되는 것은 그가 1인칭으로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근본 사실로 경험되는 것으로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고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치료자는 인터넷중독자들의 언어에 민감해야 한다. 그들의 언어는 심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실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생각을 만들고 삶을 만들어 온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면 치료자들은 그들에게서 욕망의 결핍을 의미하는 언어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는 현재에도 관련되지만, 더 깊이는 과거에 관련된 욕망과의 결핍이다. 이 점은 신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신앙적 담화와 언어의 본질적 특성 사이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앙인들이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실 때문에 언어는 사람들이 참여하려는 영적 보편성(universal spirituality)의 자리가 되는 이유다.
언어는 그 자체에 의해 정신이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점에서 말한다는 것은 원리상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의미를 갖고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즉시 의사소통과 관계의 잠재능력이 어떻게 언어의 주체 안으로 스며들어가는지를 알고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린 시기 애착이라는 근본적인 체험이 사람들이 언어세계에 들어가면서 얻는 개방과 약속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욕망을 가진 존재가 되지 못한다.
언어를 사용해 넓혀지고 변화된 어린 시기 애착은 존재의 모든 것을 관념의 망(網) 속에 집어넣고, 사물의 내밀한 본질을 포착하려는 욕망을 낳게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최초 대상에 의한 결핍을 채우려 애쓴다. 이런 시각에서 다른 사람을 지적으로 지배하려는 열정은 신앙적 애착을 대체하는데, 그 열정은 때때로 독특한 존재와 개인적으로 융합되려는 데까지 나간다. 지적 지배에 대한 열망은 종교 안에 자리 잡는데, 그때 그것은 종교에서 일상적인 것을 모두 제외시키고 불행을 아무 것도 아니도록 환원시키면서 종교를 철학적 신앙으로 변화시킨다. 그때 초래된 위험은 때로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신앙과는 달리 성적인 충동이 생기고 그것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도 사람들의 신앙적 욕망의 내용과 형태가 결정되는 데 영향을 준다. 그것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 욕망과 사랑의 능력이 가정에서 발달하는 동안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욕망과 사랑은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욕망, 자녀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욕망, 그들과 자녀가 하나되게 하려는 욕망을 표현하면서 그들의 내면에 심어놓는다. 이런 욕망이 성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상상으로 나타나고, 아이들의 신체 기능과 그들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 주위에서 생기는 쾌락과 성적으로 비슷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 흐르는 애정과 욕망에 대한 증언으로, 그들이 거기에 포함돼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동일시된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의 갈등관계인 오이디푸스적 애착이라는 복합 과정에 의해 욕망의 존재로 변화됐다고 본다. 이는 여러 오해가 있음에도 인간의 성욕이 형태와 목적이 하나의 시나리오로써 생물학적으로 미리 만들어진 본능에 불과하다면, 신앙적 욕망과의 관계에 의해 생각하려는 것이 모순이다. 여기서는 결핍이 중독으로 빠지게 만드는 점에서 신앙으로 깊이 빠져든 신앙중독도 생각할 수 있다. 좋은 것이라도 중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욕망 결핍이 존재를 형성하는 점에서 오늘날 인터넷중독자와 신앙중독자 사이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7. 중독 특성과 애정 결핍
중독의 특성은 결핍이라 했다. 결핍은 물론 매우 심리적이다. 인터넷중독자도 현상적으로는 인터넷에 빠졌지만, 실제로는 애정 결핍, 즉 사랑의 결핍이라 봐야 한다. 애정 결핍이라는 점에서는 사랑의 에너지인 성욕 발휘를 생각해야 한다. 분명히 인간의 성욕은 리비도적이라 보는 점에서다. 다른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신체 기능을 원활히 하고 요구하며 응답하는 관계 속에서 발달하는 쾌락을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는 주체의 상호 관계상 전조가 들어있는 것이다.
사랑의 원초적 형태는 남녀 사이의 욕망과 부모와 자녀 사이의 욕망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성적 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나님을 성부(聖父)라는 남자로 생각하는 점에서 남자보다는 여성에게 좋겠고, 남자에게는 성모(聖母)여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면 더 좋을지 모르겠다. 실제 성적 특성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무튼 하나님이 성적 특성이라는 점에서 성적 사랑을 주체로 하고, 또는 대상으로 받았든 다른 사람들이 성적 사랑을 하는 것을 듣고 봤기 때문에 가능하다. 욕망과 사랑이 승화라는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는 것도 성적 욕망을 갖고 사랑할 수 있는 최초의 능력 위에서라 보고 싶다.
욕망적 사랑의 에너지인 리비도가 승화되면 성욕의 본질적 특성을 지니지만, 성적 기능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여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가 되면서 쾌락을 느낀다. 사랑은 승화라는 형태를 따라 ‘희생적 사랑’이라는 거저 주는 선물로 나타날 수 있는 데도 사람들은 흔히 욕망과 사랑 사이의 대립이 잘못된 영성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들이 죄의식 때문에 욕망을 알아보지 못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이 아니고, 서로 선물을 교환하면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확장시키고 강화시키려는 욕망이 아니면서 동시에 사랑인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에로스와 아가페를 나누고, 욕망으로의 사랑과 희생적 사랑을 나누는 이원론적 대립이 무의미할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신앙과 리비도적 이해가 필요하다.
신앙은 리비도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래적 모습인 욕망하고 사랑할 줄 아는 인간 능력에 말을 걸면서, 사람들을 파괴시키지 않고 변화시키기 위해 리비도가 흘러드는 표상들을 불러모은다. 그러므로 리비도의 원천이고, 주체가 동일시하는 모든 형상은 언제나 신앙적 욕망을 나타내는 상징의 후원자로 남을 것이다. 그것들은 신앙적 욕망의 양태에 대해서 알려 주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욕망의 표상을 결정한다. 그리스도의 인간 형상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심적 사실이라면, 그 욕망이 리비도를 형성하고 변화시킨 인간적 형성에 더 물들어있어야 한다. 신앙적 욕망과 사랑 및 인간의 욕망과 사랑 사이에는 아주 단순한 유비관계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이 신과의 관계 안에 전이(轉移)되고 확충된 것밖에 없는 것이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했듯, 이 세상에는 하나의 사랑밖에 없기에 신앙적 욕망을 에로틱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욕망 자체에 본래 내장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발달시켜야 하는 것이 단 하나의 사랑이라면, 욕망의 에로티시즘화라는 말은 병리의 시점을 판정하려 할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모하는 모호한 말이 된다. 그러면 애정 결핍이 인터넷중독을 초래한 점이 핵심이지만, 이는 신앙까지 연결된 점을 기술했다. 자칫 상당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중독의 특성이 진정 애정 결핍임을 알게 된다. 실로 충족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중독을 부르는 점에서다. 욕망 결핍, 애정 결핍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결론: 모든 중독은 결핍에서, 인터넷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인터넷 중독자의 욕망의 문제를 다뤘다. 상담치료에서 인터넷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해 욕망의 문제를 이해해하는 점을 기술한 것이다. 그런 욕망은 대개 어린 시절의 모성적 애착 실패로 채워지지 않은 것이 불만감으로 작용한 것이 중점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어린 시절로 국한되지 않고, 현재는 성욕 에너지인 리비도와도 상당 부분 관련됐다.
나아가 그런 욕망은 다시 모성 결핍, 그리고 현재 애정 결핍에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기술하면서 신앙과 비교했는데, 욕망 결핍이 있을 때 잘못된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욕망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부족하다 생각이다. 이는 치료자가 인간 본능이나 욕망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춰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고, 그 욕망은 오늘의 인터넷중독을 초래하고 말았다는 근본 문제를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상담에서 치료자가 그들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면 치료는 요원할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특성이 있다. 어린 시기 욕망은 성인이 돼서도 계속된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인 이상, 그 욕망은 인간의 존재 가치감을 충족하는 열쇠가 된다. 그러면 욕망을 충족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중독에 빠질 위험이 있다. 욕망은 특성상 충족을 원하고, 그것이 정상적이지 못할 때 일정 형태의 중독을 부르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커서 충족하려는 욕망이 작용한다. 이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남자는 결혼한 아내에게서 그 충족을 기대한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불만이 생겨나 활력을 잃어버리지만, 충족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와 스킨십이 결여된 남자는 아내와의 스킨십을 추구하고, 어머니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 남자는 아내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 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마땅히 채워야 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잔(盞)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잔을 ‘욕망의 잔’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욕망의 잔을 우리는 본능이라 부른다. 저자는 임상을 거듭할수록 이를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은 욕망이라는 본능에 결핍이 일어나면 심각한 병리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아니면 신체적인 것이 심리적으로 이행됐든, 심리적인 것이 신체로 전이된 것인지만 다를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이해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랑의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랑은 잃어버린 젖가슴을 다시 찾는 행위라고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이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남자들이 유달리 여성의 젖가슴에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이런 시각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이유로 남자들은 유방을 여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유방이 큰 여자를 선호한다. 이는 쾌락에서 여성적 특성을 제외시킬 수 없는 이유다. 여성적인 특성이 제외되면 쾌락의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술과 여자가 항상 함께하는 점에서도 이해된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컬어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터넷중독자를 사랑의 결핍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칼 융(C. G. Jung)이 말한 대로 인터넷중독자들이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는 행동은 모성애의 결핍으로 보거나, 프로이트가 어머니 가슴에 안긴 갓난아기로 돌아가려는 유아적 행위로 보려는 것이다. 사랑의 상징인 어머니를 동경하는 점에서 일치된다고 본다. 전자는 정신적 측면을, 후자는 신체적 측면의 강조로 볼 수 있다. 물론 그 현상과는 달리, 정신과 신체의 구분은 모호하다. 아무튼 이러한 상징적 모습은 개인의 기억 창고에 새겨져 있어 결핍을 느끼는 존재는 마치 속이 텅 비어있거나 움푹 파인 상태임을 말한다.
상담치료는 이런 결핍의 문제를 눈여겨 봐야 한다.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심리적 결핍이 내면에 작용해 그들을 중독에 끌리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에서 인터넷중독자를 돌보는 경우라면 이런 욕망 문제를 착안해 치료하기 바란다. 그러면 많은 점에서 풀리지 않고 신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시원하게 뚫릴 것이다. 저자도 상담치료에서 그들을 잘 치료할 수 있었던 계기가 이런 욕망에 착안하고부터다. 그런 이유로 상담치료에서도 인터넷중독자를 오로지 신앙 만능만을 주장하는 자세로 대하기보다, 인간을 욕망이 결핍된 존재로 이해할 때 좋은 결과를 경험하리라 확신한다. 교회에서 오로지 믿음의 문제로만 보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인간적인 이해를 가지고 보려는 태도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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