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찬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심현찬 목사.

이 글은 탐욕의 반지에 붙들린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이 시대에 순전한 복음이 회복되기 위해선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이 절실하다고 촉구하는 심현찬 목사(워싱턴 트리니티 연구원 원장)의 글이다. 본지는 총 4회에 걸쳐 이 글을 연재한다<편집자주>

2. 한국 교회의 ‘골럼 증후군’: 그 삼중의 탐욕의 반지에 대한 진단

1) 골럼 증후군-1: 사회학적인 측면.
먼저 현대 한국 교회의 골럼 증후군이라도 할 수 있는, 삼중 탐욕인 돈, 섹스, 권력의 반지에 붙들린 모습을 진단해보자. 먼저 권력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탐욕을 살펴보라. 오늘날 신문 지상에 잘 드러난 앞서 언급한 기독 단체의 회장 선거시, 부정한 관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돈을 통한 투표권자를 매수했다고 한다. 더우기 안타까운 것은, 이 부정 선거의 당사자는, 겸손한 회개와 사퇴가 아니라, 오히려 그래도 전보다는 깨끗한(?) 선거라고 자랑한다. 이런 금권 선거에 대해, 여러 가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권력에 대한 탐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체의 회장이 되었을 때, 누리는 엄청난(?) 세상적인 권력과 명예 , 그와 함께 오는 보이지 않는 돈…. 이렇게 돈으로 당선되면, 대통령과 함께 독대할 수 있다. 심지어 얼마 전의 국가조찬 기도회에선,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무릎꿇게하는 ‘무소불위’권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한국 교회에서의 상기한 기독교 대표 단체장과 같은 직함과 일부 교회의 목사직은 이젠 하나의 권력의 상징이다. 말그대로 나는 새로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이 권력의 탐욕에서 사로잡히면 상식과 이성, 복음적 윤리에 대해 눈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아직도 교회 세습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교회 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권력과 그에 따른 금권의 욕망 위에 건설된 것이라면, 교회 세습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돈에 대한 탐욕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 소위 건강한 교회 중의 하나라고 소문난 한 교회는, 담임 목사의 돈문제에 대한 비리로 시끄럽다. 이런 돈 문제와 관련한 한국 교회의 문제점 또한,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섹스에 대한 탐욕은 어떠한가? 최근 한국의 한 목사는 여성도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결국은 교회를 떠나야만 했고, 장학 사업으로 존경받아오던, 한 교회의 목사조차도, 결국은 가까운 여성도와의 관계로 사임을 했어야만 했다. 주의해볼 점은 이들은 비교적 젊은 세대라는 것이다. 한국 교계의 원로 세대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복음의 진리 안에서 참된 부흥과 개혁을 매진해야 할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오히려 돈과 섹스, 권력의 ‘반지의 마법’에 취해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 골럼 증후군-2: 신앙적이고 신학적 측면.
한국 교회는 이러한 삼중의 탐욕의 반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음같은 한국 교회는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면에서 총체적인 문제점을 노출하고 이젠 죽음에 이르는 말기암의 중증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런 문제점을,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듯이, 씨뿌리는 비유 (마13:19-23)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 교회의 문제가 ‘길가 신앙’처럼, 악한 자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을 수도 있다. 또는 ‘돌밭 신앙’처럼, 말씀을 듣지만, 뿌리가 없어서 인내하지 못하고 고난 중에 넘어질 수도 있다. 또한 ‘가시떨기 신앙’처럼,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면에서, 보다 한국적 상황에서, 몇 가지 이런 영적 골럼 증상을 진단해보자.

첫째로, 물질지향주의적 태도이다. 교회의 건강성을 과도하게 교회의 크기와 숫자와 양으로 평가하고, 실적주의를 강조한다.

둘째로, 인스턴트적 태도이다. 한국 교회는 목회에서도, 토저 목사님의 표현대로, 매우 ‘인스턴트적’이고 긴 안목의 목회가 부재하다. 또한 극단적인 유흥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셋째로, 반-지성주의적 태도이다. 건강한 성경에 대한 이해보다는, 맹목적이거나 깊이 없는 신앙 태도로, 건강하고 성경적인 지성을 무시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무속주의나 무분별한 은사주의를 강조한다.

넷째로, 반-감정주의적 태도이다. 이것은, 앞의 반지성주의와 반대로, 오히려 건강하고 성경적인 성령의 은사나 감정을 무시하는 극단적 이성주의요 ‘냉랭한 보수주의’적인 태도를 말한다.

다섯째로, 깊은 성경적 지식의 부재이다. 깊이 없는 성경적 지식으로, 결국은 참 복음을 증거하지도, 단편적이거나 소위 달콤한 복음이나 물탄 복음, 거짓 복음을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부분별한 신학 교육과 신학교를 통한, 함량 미달의 목회자 양성과 배출이 그 원인일 수도 있다.

여섯째로, 깊은 신학적 지식의 부재이다. 무엇보다도 중생과 회심, 성화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부재를 보여준다. 앞의 5번처럼, 총체적인 신학의 그림를 보여주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표층적인 신학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신학의 본질이나 기초에서 빈곤을 보인다. 특히 중생에 대한 표피적이고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한다. 잘못된 ‘인스턴트적인 중생론’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중생과 회심의 감격만을 비정상적으로 강조한다. 따라서 중생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과의 ‘동시적 상관 관계’의 중요성을 극히 간과한다(‘중생과 성화의 동시적인 상관 관계’에 대해서는, 칼빈과 바빙크, 벌코프 등을 참고하라). 여기서 소위 예수 믿는 것과 닮아가는 것의 분리, 이원론적인 태도를 초래한다. 예수믿는 것은 그저 예수를 ‘입으로만’ 믿는 것만을 강조한다. 말그대로 불신 지옥, 예수 천당 뿐이다. 거기엔 중생과 회심, 나아가 성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도, 그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다(물론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 뿌리엔, 개신교적인 은혜 중심의 신학에 대한 오해와 비정상적인 강조 때문일 수도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은혜에 따른 중생과 함께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데, 카톨릭의 공로 신학에 대한 반발로 인해, 은혜의 중생을 강조하느라고 성화의 측면을 간과하게 된다). 따라서 다음에서 언급될, 중생과 성화의 분리의 결과로, 복음적인 윤리나, 실천적 신앙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신앙과 생활의 이중성에서 오는 실천성의 부재를 들 수 있다. 교회 내에서의 신앙과 생활에서의 신앙 사이에 괴리와 이중성을 보인다. 따라서 로마서 12:1-2절에서 나오는, 생활 전반에 걸친 신앙을 통한, 영적 변혁과 삶의 변혁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실천성의 부재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먼저는 기독교인들의 이혼률이요, 둘째는 삶의 변화이다. 먼저 이혼률를 생각해보자. 기독교인들의 이혼율이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행동 양식에서 철저한 실천의 부재를 보여준다. 2004년의 미국 통계 전문 리서치 기관인 바나 리서치에 의하면, 미국 기독인들의 이혼율 (35%)이 비기독인들의 수준 (35%)과 거의 같다고 통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한국의 교인들의 수준도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통계청에 의하면, 한국이 이혼률은 32%로, 세계 2위요 증가율은 세계 1위라는 것이다. 한국 성도들의 이혼률에 대한 전문 연구 기관이 없어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결코 미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실천성의 부재와 관련해서, 둘째로 생각해 볼 것은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이런 면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는, 필자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서, 최근 사형당한 최초의 여성에게서 잘 볼 수 있다. 신문에 의하면, 그녀는 사형 전날엔 경건하게 예배와 찬송을 드렸다. 그러나 그녀의 다른 어두운 면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이 잔인하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청부 살인했다. 주목할 점은, 그녀는 고백하기를, 자신은 교회는 매일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 외에는 결코 성경 말씀을 읽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런 그녀의 삶은, 마약과 불륜, 절도 등으로 평생 동안 점철되었던, 실천없는 교인의 극단적 모습이었다. 이런 현상은 과연 미국만일까? 한국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실천없는 성도의 모습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다. 한국 교회 성도가 약 20퍼센트라고 최소한으로 잡는다고 해도,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사회의 변화에 얼마나 지도적인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선 매우 비관적인 대답 뿐이다. 이것은 결국 신앙의 실천의 부재의 사실을 보여준다. <계속> www.TrinityD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