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뜬 구름 이야기

지난주에 우리는 성 밖의 버려짐과 구름 밖의 버려짐에 대하여 살폈다. 구름의 이슈를 조금 더 살피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종종 하나님의 임재는 구름과 흑암을 동반한다는 것을 살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해가 질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데, 그 임재는 해가 져서 어두운 것과 구분되는 “캄캄함”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창세기 15:12). 모세의 경우에도 시내산에 임하시는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 임하신다. 이러한 구름의 임재는 모세의 성막에서도 나타난다. 민수기 9:15-22절에는 성막 위에 낮엔 구름으로, 밤엔 불과 더불어 임재하신다. 이사야서에서도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이사야 19:1)라고 말한다. 이 구름들은 단순한 뜬 구름이 아니다.

신약의 탄 구름 이야기

신약에서도 구름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시는 정황 속에서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 나눈다.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정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을 모세와 엘리야를 통하여 직접 예의를 갖추어 전하게 하신 것이다. 말씀을 마친 이들이 하늘로 돌아갈 때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고,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훗날 예수님의 부활 후 승천 때에도 구름 속으로 올라가시고, (사도행전 1:9) 재림 때,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고 말씀하신다.

이 구름들의 의미는 단순하게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늘의 분이시기에 하늘로 올라 가실 때 우리가 보는 구름을 뚫고 사시는 그런 차원의 이슈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감추시기 위한 구름이다. 빛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감춤으로 인간들이 너무나 강한 빛에 상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얼굴에서 광체가 나서 수건으로 가렸어야 했고, 변화산의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의 몸에서는 엄청난 광채가 났었다. 민수기의 기록에 보면 낮에는 구름 속에서 계시지만, 밤에는 불의 모습으로 나타 나셨다고 한다. 낮에는 구름으로 광채를 가릴 수 있었지만, 밤에는 구름 속에 계서도 광채나 구름을 뚫고 나왔던 것이다.

철저한 죽음, 처절한 죽음

구름에 대한 논지의 결론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런 하나님의 임재가 십자가 바로 위에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을 돕지 않으시고, 죽게 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셔서 도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돌아 앉으셨던 것도 아니었다. 함께 계셨지만 예수님께서 대속을 위하여 드려지는 양으로, 버려지는 아사셀의 염소로 죽으시도록 하셨어야 했기에 중간에 나서지 않으셨다. 부자간의 정과 사랑으로 그의 죽음을 중단시키고, 돌이켜 살리게 할 수 없으셨다는 것이다. 철저하고, 처절한 죽음으로 버려졌어야 한다.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버리심은 사실, 그간 하나님이 인간에게 받은 모독과 버림받음의 최고 정점에 있는 버림받음이다.

구름 속의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 이면서도 이제 초라한 어둠이 되어 버린 인간들 앞에, 그 찬란한 영광으로 나타나 내가 너희 아비다라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버림받으신 것이다. 그 영광으로 나타나시면 어둠의 인간들이 그 영광의 광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그 인간들이 아들 예수마저 죽이지만 그 악마저 혼자 감당하셔야 하는 감추어진, 숨은, 버려진 아버지의 아픔으로 버려진 것이다. 영광이시면서도 인간들을 위하여 어둔 구름으로 자신을 두르시고, 독생자의 육체적 죽음 앞에, 인간들의 영적 죽음 앞에 혼자 숨죽여 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그런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죄인이 아닌 것은 알지만 죽여야만 하는 빌라도에게, 죄인이 아닌 것은 알지만 이스라엘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제사장들에게, 죄인이 아닌 것은 알지만 예수님을 구할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죽으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코앞에서 보고, 느끼지만, 하나님의 도움과 스스로의 능력을 버렸어야 했다. 이 철저한 버려짐의 상황에서 예수님은 버려짐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이 말씀은 훗날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버려짐의 상황이 실제 상황임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의 크기를 온전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버림받고 죽으시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모습을 우리는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칠언은 매우 전략적인 말씀이었다.

외로운 결정, 의로운 결정

이 시점에서는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 받은 존재로서 철저하게 혼자 스스로 분별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중요한 것은 혼자 결정을 하셨다 하여도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결정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외로운 결정이었지만, 의로운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완성체의 모습을 보이신다. 하나님 형상의 최고 완성점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뜻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을 자원하여 순종하며, 사랑하게 됨에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알게 하여 주신다.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하나님의 보내신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고통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저 죄 용서의 상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제자들로부터,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인들로부터, 그리고 전 인류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고, 철저한 고통을 받으셨다. 모든 것에 결핍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그는 결핍해결을 위하여 자신의 뜻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신다. 100%의 고통과 결핍의 상황에서 100% 인간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고난을 당하신다. 그러나 100%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에 대한 반전

예수님의 버려짐은 그 버려짐에만 의미가 있지 않고, 그 버려짐에 대하여 어떻게 예수님께서 대처하시는가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고 있는 악인들을 응징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저주하지도 않으신다. 정당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악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신다. 이것은 아담이 에덴의 모든 풍요 속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던 것에 대한 극적인 반전이다. 아담이 풍요 속에서 죄를 지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버려짐과 죽음의 결핍 상황에서도 여전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아담의 죄를 반전시키신다. 이것이 버려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성취하셨는지를 알게 되는 대목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능력을 누리게 될 것인지를 선포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곧, 이것은 십자가에서의 경외를 배운 사람들은 사탄의 악의 순환의 고리, 악의 도미노 현상을 끊을 수 있는 능력을 입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버려짐을 자랑하신다. 이 버려짐을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해야 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신다. 그리고 우리 구원을 위한 반전을 가져다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원의 암호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이제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는 것 이상임을 알게 된다. 십자가는 우리가 능동적인 면에서 죄를 짖지 않게 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아담 이후 선과 악을 알되 악을 선택했던 인간들이지만,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선과 악을 알지만 그를 구분하고 선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여 주신 하나님의 형상 속에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카인의 죄에 대한 반전

이것은 창세기 4장 7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하신 말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의미를 알게 되는 상황이다. 많은 결핍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죄의 소원, 죄의 유혹들이 있지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을 선으로 다스리라는 말씀이다. 능동적으로 죄를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카인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인류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능성을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로 인하여 그 능력이 회복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의 온전함을 회복할 때 우리는 능동적으로 죄보다 선을 선택함으로 죄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물론 한번 죄로 물들여진 인간이 스스로 이것을 감당할 수는 없음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은 후에 가능한 일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해독된 암호: 버림받은 자가 회복한 하나님의 형상

십자가의 네번째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버림받음의 상황을 우리에게 확인시키신다. 그리고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얘들아, 내가 혼자 순수한 인간으로써 버림받고 죽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지킬 수 있다면, 이제 너희도 할 수 있단다. 태초에 죄 짓기 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지 않고 성숙하여 완성되었다면 이루질 모습이 바로 이것이란다. 죄를 짖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네게 있고, 선을 선택할 능력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네게 있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것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버림 받으시고, 인간으로 죽으심으로, 이제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사야 7장 14-16절에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나은 아이, 임마누엘이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안다고 말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 다는 뜻이다. 그 말씀과 우리의 연관성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수 있게 됐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아 보이는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계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을 통하여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며, 여기가 우리의 완성점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계속>

이 글은 <크로스코드>의 출판사 비전 북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