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네팔 현지 목회자 컨퍼런스를 은혜 가운데 종료하고 현재 한국 여의도 순복음 교회 재 37차 선교사 대회에 참여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1958년 시작된 순복음 교회는 초지일관 성령충만을 강조하며 우리 나라에서 성령운동을 주도함으로 한국 기독교를 세기적 영향을 주는 수준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실수와 잘못이 있을지라도 목회의 중심에 근본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었기에, 오랜만에 방문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최근에 안팎으로 어려운 시간을 통과했음에도, 지난 3월 역사상 가장 많은 새신자가 등록하여 한달동안 약 3000명의 새 신자가 등록하였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가족과 함께 모든 공적 직함을 내어놓은 후인 지난 화요일, 조찬기도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팡이 내어던지고, 신을 벗은 맨발의 모세에 비교하셨습니다. 자기가 의지했던 지팡이를 내어던지고 자신이 믿고 소중히 생각하던 모든 직함들을 벗어버리고 보니 자신은 그저 가시떨기 같은 무능하고 무가치한 늙은이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십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을 때 그 불을 받아 모세는 당시 최강의 바로의 압제속에 300년이나 매여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듯이 자신도 오직 성령님 의지하고 남은 세월 최선을 다하겠노라 하셨을 때, 장내가 감동과 은혜가운데 숙연해졌습니다.
다음 날에는 한세대학에서 “영산 조용기 목사의 십자가 신학” 이라는 주제로 신학 심포지움이 있어 모든 선교사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국내외 훌륭한 신학자들이 참여하여 조 목사님의 설교를 신학적으로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는데 영산 신학의 포인트는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구원과 희망으로 요약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포지움의 마지막에, 사회자가 참석한 발제자중의 한 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조 목사님의 지난 50년 목회의 키워드는 희망신학이었는데,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키워드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 때, 그 목사님은 망설이신 후에, 희망신학은 예수님 재림때까지 지속되어져야할 십자가의 근본 메시지라고 답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묻고 있는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여겨졌기에 제 자신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키워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조 목사님께서 목회를 시작하신 지난 세대에는 한국 땅에 진정 희망신학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희망신학때문에 한국은 살아났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조 목사님의 그 위대한 메세지가 얼마큼 한국 기독교에 성령의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인들을 살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개인적으로 감사해하며, 성도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켜왔으며 제 자신의 목회에 적용해 왔던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제 희망신학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키워드라기보다는 삶과 목회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며,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앞으로 한국 기독교가 추구해야할 키워드는 희망의 메시지보다 더 급한 메시지, 즉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마침 그 심포지움이 있던 날, 저의 말씀 묵상은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에게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엘리는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너무나 엘리 제사장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식만 남았고, 외형적으로 비둔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쓰나미와 원전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이 들어야 했던 메세지는 희망의 메세지가 아니라 심판의 메세지였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더 무서운 심판의 쓰나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분명 희망의 메세지이지만 한편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가난과 궁핍을 벗어난 한국 기독교는 종말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같아 보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복음을 전하며, 거룩한 신부로 단장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하겠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가족과 함께 모든 공적 직함을 내어놓은 후인 지난 화요일, 조찬기도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팡이 내어던지고, 신을 벗은 맨발의 모세에 비교하셨습니다. 자기가 의지했던 지팡이를 내어던지고 자신이 믿고 소중히 생각하던 모든 직함들을 벗어버리고 보니 자신은 그저 가시떨기 같은 무능하고 무가치한 늙은이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십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을 때 그 불을 받아 모세는 당시 최강의 바로의 압제속에 300년이나 매여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듯이 자신도 오직 성령님 의지하고 남은 세월 최선을 다하겠노라 하셨을 때, 장내가 감동과 은혜가운데 숙연해졌습니다.
다음 날에는 한세대학에서 “영산 조용기 목사의 십자가 신학” 이라는 주제로 신학 심포지움이 있어 모든 선교사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국내외 훌륭한 신학자들이 참여하여 조 목사님의 설교를 신학적으로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는데 영산 신학의 포인트는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구원과 희망으로 요약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포지움의 마지막에, 사회자가 참석한 발제자중의 한 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조 목사님의 지난 50년 목회의 키워드는 희망신학이었는데,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키워드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 때, 그 목사님은 망설이신 후에, 희망신학은 예수님 재림때까지 지속되어져야할 십자가의 근본 메시지라고 답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묻고 있는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여겨졌기에 제 자신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키워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조 목사님께서 목회를 시작하신 지난 세대에는 한국 땅에 진정 희망신학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희망신학때문에 한국은 살아났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조 목사님의 그 위대한 메세지가 얼마큼 한국 기독교에 성령의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인들을 살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개인적으로 감사해하며, 성도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켜왔으며 제 자신의 목회에 적용해 왔던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제 희망신학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키워드라기보다는 삶과 목회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며,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앞으로 한국 기독교가 추구해야할 키워드는 희망의 메시지보다 더 급한 메시지, 즉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마침 그 심포지움이 있던 날, 저의 말씀 묵상은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에게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엘리는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너무나 엘리 제사장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식만 남았고, 외형적으로 비둔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쓰나미와 원전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이 들어야 했던 메세지는 희망의 메세지가 아니라 심판의 메세지였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더 무서운 심판의 쓰나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분명 희망의 메세지이지만 한편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가난과 궁핍을 벗어난 한국 기독교는 종말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같아 보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복음을 전하며, 거룩한 신부로 단장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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