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예수님께서 자신이 버림받았음을 외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상황을 교양학부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였다. 한 학생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 좋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시겠냐는 것이었다. 내가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반응은 그러나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오랜 동안 신앙 생활을 해온 학생들에게 나의 강의는 때로 도전적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들은 평소에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들으면서 자주 당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한 말은… “난들 어떡하나, 예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네번째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심을 한탄하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유치하고 창피하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어쩌자고 이런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한다. 구원자시라면 체통과 품위를 지키실 일이지, 어찌 이런 공포에 찬 감정적인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과연 유치한 것일까? 과연 예수님께서는 무슨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어떤 이들은 반대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릴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과연. 이 말씀 속에 담긴 비밀 암호는 무엇일까?

암호 해독 포인트

우선 말씀 자체를 살피건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에 대하여 한탄하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함정에 빠진다. 이 함정에 빠지면 이 말은 지극히 유치한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의 암호 해독 포인트들은 구약에서 성 밖에서 죽는 것의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구름으로 단절된 하늘의 의미 또한 암호 해독에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그리고 이 말씀이 기본적으로 시편 22편 1절의 인용이었다는 것과 그 것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이 말씀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성 밖의 죽음

예수님께서 버림받음의 일차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버림받아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상 죄와 죄인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의 대표로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되고 버려진 채 죽으셔야만 했다. 죄인들의 버림받음을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감당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는 버린 바 되지 않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은혜를 누리도록 말이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대신 버림받으시어 성문 밖에서 혐오스러운 존재로 죽으셨다. 당시의 개념으로는 성 안은 안전과 평화, 영광, 선택의 상징이고, 성문 밖은 불안, 전쟁, 부정, 버려짐의 상징으로 정 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예루살렘 성 밖의 죽음은 그러므로 철저한 버려짐의 상징이었다.

죽임 당한 어린양과 버림받는 아사셀 염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하여는 구약에 숨겨져 있는 중요한 상징들에 담겨있는 암호를 해독하여야 한다. 그 첫째는 유월절의 양이다. 어린양인데 대신 죽임 당한 어린양이다.

유월절 양의 유래는 이스라엘이 400년간 애굽, 즉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출애굽을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2500여년 전, 애굽의 왕 바로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노예로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 가려 했을 때 이를 코웃음치며 거절한다. 애굽 노동의 근간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루 아침에 잃는다는 것도 큰 일이었지만, 더욱이 이스라엘을 보내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신의 명령인 것일 때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당시 바로는 신의 아들, 혹은 신의 현현으로 생각되었기에 더욱 그 자존심은 컷다. 당시 최대 국의 신이, 노예들의 신에게 간섭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강퍅함을 인하여 열 가지의 재앙을 주신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이, 파리, 가축의 죽음, 우박, 독종, 메뚜기, 그리고 이집트를 뒤덮은 흑암이었다. 그리고 10번째, 마지막 재앙은 애굽의 모든 장자와 초태생 가축들의 죽음이었다. 모든 재앙은 전 애굽에 걸쳐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재앙들은 애굽 사람들에게만 해를 끼치었을 뿐 이스라엘의 집에는 미치지 않았다(출애굽기 9:4, 26; 10:23).

그러나 열번째의 재앙은 조금 달랐다. 그 동안의 재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있던 이집트의 고센 지역에는 자동적으로 임하지 않았거나 미리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열번째 재앙은 자동적이거나 피하기만 하면 되지 않았다. 믿음의 행동을 요구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정에 한 마리씩 어린 양을 잡고 양의 피를 우슬초로 대문 입구와 방 입구에 바르라 하셨다. 그리고 그 양을 불에 구어서, 효소가 섞이지 않은 거친 빵인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먹고 이를 매년 기념하라 하셨다(출애굽기 12장).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기 (출애굽기 12:12) 위함이었다.

또한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이 재앙이 “넘어”가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Pesach (페사크), 영어로는 Passover (패스오버), 그리고 한문으로는 유월절이라고 쓴다. 페사크는 유월절도 의미하지만 유월절에 먹는 어린양을 직접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날을 뜻하는 유월절은 대신 죽은 어린양이 그날의 핵심인 것을 알 수 있다. 죄 있는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양의 죽음으로 대치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상징은 바로 이 유월절의 어린양이다. 어린양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죄악의 재앙이 넘어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이 유월절 대속의 어린양의 비밀을 완성하시는 것이다.

두번째의 양은 아사셀이라는 염소의 비밀이다. 유월절의 어린 양이 드려짐의 상징이라면 아사셀 염소는 버려짐의 상징이다. 아사셀은 이집트의 종살이를 마치고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또 다른 속죄의 방법이었다. 당시의 첫 제사장이 된 모세의 형,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다음과 같이 행하였다.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위기 16: 21-22). 아사셀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광야에서 대속의 죽임을 당하는 염소이다. 광야에서 놓임을 받은 염소는 곧 들 짐승의 밥으로 죽어간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태복음 25:32-33)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부연 설명을 하시면서 양은 “창세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25:34)고, 염소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25:41)고 말씀하신는데 이렇게 양은 순결을, 염소는 죄를 상징한다. 죄 없는 양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고 죄의 상징인 염소는 사람들의 죄까지 전가받은 후 광야에 버려진 채 죽는 것이다. 양은 이렇게 드려짐을, 염소는 버려짐을 상징한다.

위에서 살핀 양과 염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매우 중요한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죄는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공존과 공영의 진리에 거슬린다. 그러므로 죄는 소멸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죄의 주인이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의 주인인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법칙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대속의 법칙이다. 누군가 대신 죽어주면 그 사람의 죄가 덮이고 무효화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 희생양으로 죽어 드려지는 것이다. 아사셀 염소를 통하여 세워 주신 비밀은 죄는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희생양으로 인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 주심으로 인류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고, 아사셀 염소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에서 버림 받고 대신 죽으심으로 인류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암호이지만 이것이 해독되어 이해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죄의 용서 방법이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동물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죽음이 모면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죄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비밀스러운 은혜의 법은 오히려 이스라엘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나의 죄악 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 죄가 그렇게 사악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고 죄를 그치기 보다는 동물 하나 죽이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타락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고대 많은 나라들에 의하여 모방되고, 오염되어 우상숭배의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신다. 이미 정하신 법칙을 충족시키면서, 그것을 완성하는 대안이었다. 그것은 수 없이 많은 죄 없는 동물들을 구하고, 또한 인간들을 구하는 대안으로, 순결한 피를 흘림으로 모든 죄들을 한꺼번에 덮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순결치 못한 피가 아무리 흘려져도 죄인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충족시킬 유일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었다. 왜냐하면 온 우주에서 순결한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의 순결한 피흘림을 통하여 인류 모든 죄에 대한 대속의 제물을 대치하도록 하셨다.

이것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 5:2). 향기로운 제물은 죽은 후 불태워짐으로 향기로운 제물이 된 양을 의미한다. 또한 생축은 산 채로 광야에 버려져 이스라엘 죄를 담당한 아사셀 염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희생 제물과 버림받은 생축으로 피를 흘리고 죽음을 당하였음으로 이제 더 이상 다른 희생제물이나, 다른 방법이 필요 없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구약에서 예표된 하나님의 구원과 속죄를 위한 중요한 암호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의 상징으로 죽어 드려지게 하신고, 아사셀 염소 상징으로 버림 받게 하시고,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에 물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더 이상 다른 죽음들이 남용되지 않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