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새벽예배. 한국교회 부흥의 첫 번째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척교회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의 신앙성숙과 더불어 부흥을 소망하는 곳에는 새벽예배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이에 기독일보는 남가주 한인교회들의 새벽 설교를 집중 조명하여 새벽제단에서만 내리는 특별한 은혜를 나누고 개교회를 넘어 지역과 미주 전역의 부흥을 함께 소망하고자 한다.

새벽강단 취재를 위해 얼마전 찾은 교회는 34년의 역사를 가진 오렌지카운티제일장로교회다. 이 교회 담임 엄영민 목사는 이날 새벽강단에서 로마서 5장 9절부터 11절을 본문으로 ‘구원의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다음은 엄 목사의 설교 내용 요약.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과녁을 벗어난 삶”입니다. 원어로는 ‘하말티’라고 표현합니다. 괘도를 이탈한 삶,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다 길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살아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며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의 근본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는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인생의 모든 비극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엔 사람들이 죄에 대해 민감했습니다. 근본적으로 희미한 도덕적인 형상이 있어서 민감했는데, 작금의 현대인들을 보면 죄에 대해 둔감해진 모습들이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오히려 합리화됐습니다. 법을 어기지 않은 이상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한 번도 감옥에 들어갔다 온 적이 없으므로, “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법을 어기지 않고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법은 도덕의 최소한입니다. 법만 지켰다고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대놓고 죄를 지을려고 합니다. 성경엔 분명히 동성애는 분명 죄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동성애는 유전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타고난 거라며 병이라고 하면서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전적인 병이라고 하면서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이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이게 죄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원망합니다.

어느 신문을 보니 육사 출신의 어떤 이가 커밍아웃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원래 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미 많은 동성애자들이 “한 때는 자기도 질병이었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그것은 죄였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의 수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질병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거기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를 벗어난 인간의 질서에 진노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분노하고 계십니다. 언약을 벗어난 인간에게 분노하고 계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다는 겁니다.

영적인 각성은 어디로 부터 오는 겁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계시는가. 지옥이 우는 사자처럼 포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거기서부터 진정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는 절규가 있을 때 거기서부터 진정한 영적 각성이 시작됩니다.

진단은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하나님과의 질서의 언약을 벗어나 살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합니까.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셔야 합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고 계신 하나님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죄의 딜레마 입니다.

죄는 그냥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죄에 대해 분명히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모든 죄에 대해 짐승의 피로 사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라고 해서 다 사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흠없는 피로, 죄 없는 인간의 피가 흘려져야지 우리의 죄가 대속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의 또 다른 딜레마는 흠없는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제물이 주어질 수 있었을까. 이 물음 앞에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시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망의 땅 가운데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무엇도 나를 죄의 굴레로 부터 얽매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와 주셨다는 단 한 가지 사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온전히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구원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구원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번째 더 이상 정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릴 의롭다고 하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즉 더 이상 이제는 (그 누구도 너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케 됐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도 우리에게 죄책감을 불어넣으려고 합니다. ‘넌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안 돼’ 이게 마귀의 음성입니다. ‘축복이라니 웬 말이냐’. 이 또한 마귀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의롭다고 선언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유혹 앞에서 예전에는 죄에 끌러가는 죄의 집요함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적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너희를 그 죄를 물리칠지어다” 이것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의 소속이 마귀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노예시장에서 (값을 치루고) 사 왔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는 표현은 “내가 값을 다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속전을 주어서 우리의 소속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어떤 일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던지 십자가를 자랑하고 찬송하며 날마다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