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을 이런 자리에서 뵙기에 앞서, 여러분들의 찬송가 소리를 들으니 왠일인지 눈물이 쏟아져 말을 잘 못하겠네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온 사람인데, 어렸을 때 들었던 찬송가 생각이 난다. 그 때 느꼈던 감격 같은 것이 숨어 있다가 지금 이 순간에 다시 느껴지는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도 나고.

내가 어렸을 때 함석헌 선생님이 우리집 옆에서 씨알농장을 하셨다. 한 손엔 희랍어 성경을 들고, 한 손엔 호미질을 하셨다. 매년 가을이 되면 참외와 복숭아를 지게에 지고 우리 집에 오셨다. 어렸을 때 뵈면서 ‘참 잘 생긴 할아버지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잘 생기셨다. 가까이서 뵈면. 평안도 분들이 인물이 좋다. 거기에 수염을 기르셨다. 북한에서 핍박받고 남하하시면서 수염을 자를 기회가 없으셨다고 한다. 그런 생각들이 솟구친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교회에 가는 것엔 감격이 있었다.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게 그냥 예배 드리는 게 아니라 감격이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도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셨다.

영친왕이 마지막 황손인데, 그가 죽어서 장례 행렬이 나가는데, 사람들이 엄청 울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 설교 때, 이 우매한 백성이 가짜왕이 나가는데 울고 따라간다고 욕을 했다. 그 때만해도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의 설교가 그랬다. “너희들 착각하지 마라. 기독인들은 세속의 왕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게 야단을 쳤다. 그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인생의 자세와 역사를 염려하고 하고, 우리 민족이 어떻게 바르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던 사람들이다. 그게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지금의 한국교회에서 발견할 수 없다.

어느 시점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기보다는 등산을 가는 것이 참다운 예배라고 생각했다. 북한산에 올라가 물소리 듣고, 새소리 들으면 그게 하나님 소리다. 교회에 가면 솔로몬의 백합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를 안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 선생도, 로마서 12장 보면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의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 그것이 영적 예배니라. 내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린다”고 했다. 등산을 가면 몸이 건강해진다. 내 몸 하나라도 건강하게 지켜서 살아야 이 몸을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냐. 일요일날 교회 대신 등산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여러분을 보니,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께 몸을 산 예배로, 영적 예배로 드리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에 여러분이 드린 찬송가에서, “다 좋지만, 바라 보아라 인간의 깊은 내면을, 인식하여라 온전할 수 없는 인간을, 아무리 노력하여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절망적인 메시지냐. 사람이 그렇거든. 내가 입만 뻥긋하면 욕을 해댄다. 우선 도올이 뭘 얘기하면 까고 본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좋은 말만 하는데, 입만 열면 깐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은 예의라도 지켜가면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할 수 없는 게 인간의 모습이다. 내 자신을 반성해 봐도 그렇다. 내 자신이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신앙이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잘난 척해 봐도 인간은 인간이다. 변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육체를 가지고 있고, 육체에 의해 지배당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 극복하기 어렵다.

인간의 힘으로서 되면 좋겠는데, 그게 어렵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미륵보살의 도움을 필요도 한다. 자기를 구원한다지만 그걸로 해결이 안된다. 그래서 세상에 종교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 속에서 무엇인가 희망을 바라보고 있어서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예수의 진리다. 요한복음은 ‘예수=진리’다. 그러나 이 진리를 평범한 인간들의 한계 상황 속에서는 인식하기 어렵다. 이 상황을 극복하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로고스’다. 말씀은 이 살(피부)이 할 수는 없다. 영혼이 울려야 목청이 떤다. 이 목청을 울리게 하는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고 정신이다. 말씀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 성령이라고도 하고, 보혜사란 말도 쓴다.

이런 것을 통해 인간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너는 나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엄마 자궁 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와야 하느냐. 불가능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땅의 놈이고 나는 하늘의 사람이다. 너는 땅의 언어로 하늘의 언어를 알려고 하느냐. 너가 그러고도 유대인의 지도자냐”고 꾸짖으신다.

너희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 세대를 본받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얼마나 추잡스럽고 악한 사태들이 많이 있나. 신문을 들여다 보면 매일 지저분한 이야기만 실린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혼자 고고하게 살라는 게 아니다. 네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일치해서 우리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회도 나오는데 매주 똑같으면 안 된다. 나올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우리에게 분별돼 나타난다. 마음이 새롭게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뭔지 모른다.

내가 요한복음 해석을 냈다. 기독교는 새로운 것이면 그것을 읽어보고, ‘이런 시각에서도, 저런 시각에서도 볼 수 있구나’하고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새롭게 통합해야 한다. 근데 기독교는 그저 분열만 시키려고 한다. ‘도올이 성서를 잘못 해석했다. 순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 교회 목사님은 내 강연에 앞서, ‘도올은 정통신앙에 비추어볼 때 조금도 어긋난 게 없다”고 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는 나와 긍정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새롭게 하지 않으면 썩어 버린다. 나는 늘 새로워지지 않으면 내 인생을 살면서도 아무 재미가 없다.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

햄릿이 그러지 않았느냐 “투 비 오어 낫 투 비”. 존재할 거냐. 존재하는 것을 그칠 것이냐. 인간은 자살할 수도 있다. 인생이 가치가 없다면 간단히 죽을 수도 있다. 자기가 존재하려고 한다면, 존재하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대학(大學)이란 고전을 봐라. 대학은 큰 배움이다. 소학(小學)은 작은 배움이다. 대학은 그런 걸 배우는 게 아니다. 대학은 요한복음 사상과 같다. ‘在明明德(재명명덕)’ 밝은 덕을 밝게 하는 데 있다. 요한복음엔 인간의 로고스, 즉 인간에게 빛이 있다고 한다. 근데 밝은 덕을 밝히는 게 대학이다. 그렇게 해서, ‘在新民(재신민)’ 백성들을 새롭게 한다. 그렇게 해서, 지극히 선한 데 이르게 하는 것이 큰 배움이다. 이게 대학의 첫말이다.

근데 더 중요한 것은 매일 새로워지는 것이다. ‘日新(일신)’이다. 그 다음에 또 ‘日日新(일일신)’이 나온다.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얼마나 정체를 거부하고, 새로워지는 것을 중요시하느냐.

동양은 변하지 않는 지속의 왕국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동양 사람이야말로 일신 일일신 우일신 하는 문명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정체를 싫어한다. 인터넷 하면 싸그리 갈아버린다. 유교하다가도 싸그리 벗어버리고 기독교 받아들여 버린다. 지구상에서 이렇게 끊임 없이 새로워지는 문명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지독하게 샤머니즘을 하다가 불교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였다. 또 그것을 싹 쓸어버리고 5백년을 유교로만 지탱했다. 그것도 구한말에 싹 쓸어버리고 기독교로 바꾸었다. 인류에 그런 문명이 있느냐. 샤머니즘을 최치원은 풍류지도라고 말한다. 풍류지도, 불교, 유교를 이렇게 싹 쓸어 버렸다. 기독교 또한 잘못하면 쓸어버린다. 기독교도 싹 갈아버릴 수 있다. 너무 명백하다. 우리 민족은 진리를 추구하는 민족이지 특정한 종교에 미치는 민족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1세기 동안 기독교에 헌신했다. 헌신했던 이유는 딴 게 아니라 기독교에 우리 민족의 희망이 있다고 봤다.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해 억압받은 상황과 우리가 구한말부터 일제에 억압받는 상황이 비슷했던 것이다.

일본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길거리에 순사 온다면 우리는 울음을 그쳤다. 일본 순사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어도 서슬이 퍼랬다. 그들이 그냥 죽여버려도 꼼짝 못했다. 일본인들은 너무 잔악했다. 지금 일본 가보면 놀랍습니다. 그렇게 질서 정연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학문 수준 높고, 위대한 민족처럼 보인다. 지들 안에선 그런 룰을 잘 지키는데,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개새끼가 된다. 일본인들은 보편주의가 없는 것이다.

나도 동경대에서도 강의했다. 너희는 보편주의가 없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안그렇다. 보편주의가 있다. 우리끼리만의 잣대로만 사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서 진리를 추구할 줄 아는 민족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보편주의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독교가 뭔가 던져주는 것이 ‘예를 들면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말구유간에서 태어나 목수로 살았다’는 것처럼 비천해 보이지만, 우리에게 보편주의를 일깨워준다. 그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러한 메시지를 던졌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듯이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녔다. 그 사람이 좋은 일들을 많이 했다. 은혜도 권능도 있고 이적도 행했지만, 몸이 아팠다고 한다. 나도 관절염의 고통을 심하게 받고 살았다.

사도 바울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몸에 가시를 줬다고 했다. 나도 관절염이 툭툭 쑤셨다. 어린시절에 ‘그 순간 사도바울이 관절염에 걸렸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사도 바울을 좋아했다. 동병상련의 느낌으로 사도 바울을 좋아했다. 남은 고치면서 왜 자기의 병은 못 고치느냐. 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 나온다. 3번이나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은혜가 이미 충분하다. 왜냐. 내 힘은 연약한 가운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가 아프고 고통당하는 데서 하나님의 온전한 권능, 힘이 깃든다는 것을 알고 전도여행의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실존적 고백이 있다. 나 역시 내 병을 평생을 갖고 산다. 아직 관절염이 낫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큰일을 하는 것을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다. 내 몸이 연약하다고 탓하지 말자. 아프면 아픈 대로 받아들이고 살자고 생각한 것이다.

성경이 27서 체제이다. 27서 체제는 A.D. 367년 이전에는 없었다. 초대교회 역사는 다 그 전이다. 314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교회가 늘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초대교회를 모른다. 초대교회는 성경이 없는 교회다. 기독교 3백여년 동안 기독교엔 성경이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만 있었다. 여러가지 텍스트는 있었지만 단일한 체제로서 성경이란 이름이 없었다.

그 때는 아주 자유롭다. 교회의 모습이 권위적인 모습이 아니다. 성경도 자기들이 자유롭게 만들었다. 성경조차도.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었다. 그게 ‘가라사대’ 구절이다. 내가 보기엔 그게 우리가 가장 중시해야 할 부분이다. 복음서의 출현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라사대’였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초대교회의 오리지널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가지고 복음서 기자들이 그것을 연결하는 드라마를 쓴 것이다. 그게 내러티브다. 근데 우리는 내러티브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도 대한예수회장로회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교와 기독교가 다르다. 예수교는 정말로 3년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 3년이 진짜 예수교다. 그 다음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 사도들의 모임을 ‘기독교’라고 부른다. 그것이 ‘그리스도교’다. 그리스도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믿음의 종교다. 예수교와 기독교는 엄밀하게 다르다.

그래도 초대교회는 예수교적인 기독교다. 그런데 313년 로마황제에게 공인 받은 뒤엔 황제교적 기독교가 됐다. 나는 그것을 못 믿겠다. 그 이후 기독교는 문제가 있다. 예수교장로회이면 예수교로 돌아가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자.

요한복음 17장 21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믿게 한 것을 아옵소서”라고 했다.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를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내가 참 포도나무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다. 예수가 만약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열매가 여러분이다. 나무 전체가 교회라는 영적인 생명 공동체다. 내 안에 거하라.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기독교가 이런 것을 상실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땐 내 안에서 거하라, 동시에 상호적인 것이다. 나도 너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 근거는 내가 하나님 속에 거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 그러한 거함에 의해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 논리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과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로서 거한다.

기독교는 요한복음 메시지를 밀고 들어가면 불교도 설 자리가 없이 과격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이런 요한복음 사상을 해석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런 속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데 하나님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있느냐. 인간의 관계를 떠난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민족과의 계약 관계에서만 하나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줬다는 것 때문에 야훼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예수와 우리, 예수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게 ‘항상 하나님과 내가 서로 하나된 것처럼 그의 생명에 매달린 열매, 너희들도 서로 하나가 되라’ 은혜공동체교회는 여기서 찬송가 부를 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나무는 과수원의 한 나무는 아니다. 무식한 놈이 과수원의 한 나무로 생각한다. 우주적 나무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 나무다. 거기에 있는 열매는 이슬람도 불교도 있다. 그게 다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하나님 나무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해석을 안 내린다. 로마 황제가 심은 한 나무에만 매달린다. 도둑놈들이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그건 반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신도들에게 구라를 피운다.

그것이 과연 기독교의 모습인가. 그래서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모습은 한민족이 갈구하던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이 땅에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다. 근데 자꾸 악순환이 많다. 나는 훌륭한 목사님들의 훌륭한 생각들이 이 땅에서 펼쳐지길 바라는 사람이다, 왜 내가 반기독교냐. 나야말로 정통 기독교 신앙인이다. 모태신앙이고 유아세례를 받았다. 우리집안이 예수교장로회에 헌신한 집안이다. 헌금한 액수만 해도 최고의 정통 기독교 집안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도올 같은 사람을 내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사도 바울 같은 이가 기독교를 구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핍박했던 사도 바울을 이방인 사도로 만들어 썼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면 나를 까더라도 예의는 지켜야지. 그런데 인신공격을 한다. 네가 공부를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다. 어려서 하는 말이니깐 그냥 웃고 넘어간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을 가지고 나에게 덤비겠다니…

나는 지금도 재즈 공부를 한다. 다음엔 피아노 반주하러 오겠다. 나는 절대 지식인임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나한테 까불면 안된다. 쑥쓰러운 얘기지만 자신들을 돌아보는 게 현명하다.

<기독교성서이해>라는 책이 나와서 이 설교 기회가 만들어졌다. 오늘의 설교를 울음으로 시작했지만, 여러분과 영적인 교류가 이뤄진 것에 대해 너무 행복하게 생각한다. 내가 예수교장로회다. 내가 예장에서 커 온 사람이다. 이런 교회가 있어서 예수교장로회의 체면을 세워줘 너무 기쁘다. 은혜공동체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길 바라면서 이것으로 여러분과의 만남의 설교를 끝내겠다.

정리=김근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