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업가는 많다. 그러나 성공한 기독교인 사업가는 많지 않다. 기독교인으로서도 사업가로서도 동시에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성공한 기독교인 사업가를 꼽을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장 김수웅 장로의 존재가 더욱 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김 장로의 별칭인 ‘소금 장로’는 비단 평생을 염전 사업을 일구어 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평생의 사업이 된 염전 사업을 통해 대기업이 아닌 개인사업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물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소금으로 성공했다는 사실보다도, 이 성공을 통해 얻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소금 장로’라는 별칭을 더 잘 설명해 준다. 그의 평생은 물질의 축복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깨달음 앞에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어떻게 하면 이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쓸 것인가를 두고 기도하고 응답 받은대로 실천에 옮겨온 삶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금은 사람들의 밥상을 맛깔 나게 할뿐 아니라 이 세상을 더욱 맛깔나게 하는 하나님의 소금이 됐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금 장로’의 사명
김수웅 장로는 이 때까지 국내외에서 1천여 회가 넘는 집회를 인도했다. 그의 집회에서는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불화가 있던 곳에는 화해가 찾아오고, 또한 복음을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며, 아픈 자가 병 고침을 받는 일들이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여의도순복음교회(당시 순복음중앙교회) 최초의 남자 구역장 시절부터 시작한 교도소선교와 군선교는 현재 아가페기독교교도소 재정위원장을 맡고, 군선교에 기여한 공로로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까지 김 장로가 평생을 두고 관심을 기울이고 헌신해 온 일들이다.
또한 김 장로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성전을 짓는 일이라는 굳은 믿음 아래 어디든 교회를 건축한다는 말만 들으면 이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참여해 왔다. 서울장신대학교 1천여 전교생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 해성홀과 제주도의 초교파 교회이자 선교재단법인인 방주교회는 그 규모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손꼽힐 수 있다.
김 장로는 이외에도 자라나는 하나님의 일꾼을 키우는 소중한 일에 참여하는 것만큼 귀한 것이 없다는 신념으로 학교에서 강사 초빙을 받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순위로 달려가는 것 외에도 숭실학원, 한동대학교 등 신학대학교와 연결된 일에 헌신해 왔으며, 멀리 북한 땅에도 평양신학교를 세우는 결실을 맺었다. 이는 또한 평양에서 태어난 그가 숙원해 오던 북한선교의 꿈에 더욱 매진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북한에 교회를 회복한다는 비전을 갖고 평양에 1866년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계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이렇듯 한 사람의 몫으로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그의 역할들은, 그가 늘 바쁜 업무 일정을 안고 있는 사업가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더욱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는 사업은 사업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김 장로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소금 장로’로서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다. 6.25 전쟁 당시 고향을 떠나온 그가 오랜 피난 생활 끝에 소금 유통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자비량 선교를 하고 싶다는 열망 하에 소금 생산에 뛰어든 것도, 그리고 평생의 염전 사업으로 성공한 것도 지금 돌아볼 때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소금 장로’라는 별칭도 기도 가운데 나왔다. 당시로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염전 10만 평을 두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는 소금을 만들어 생산하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다고 말한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의 근원이 빛과 소금에 있듯 소금을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힘써 온 그의 삶은, 그렇게 염전 10만 평을 기도하던 끝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음성을 듣고 당시 좁은 천막이던 오산리금식기도원(현재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건축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같은 결단을 알리면서 최자실 목사로부터 축복기도를 받던 중 최 목사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소금 장로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 줬고, 오늘날 김 장로는 그 기도대로 이름뿐만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소금 장로’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자비량 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에 기도했던 염전 10만 평이 응답됐으니, 이와 함께 기도했던 5대양 6대주를 누리는 자비량 선교사의 삶 역시 응답된 것이다.
‘햇볕에 졸이고 또 졸이듯…’ 연단의 과정
이처럼 하나님의 일이라면 멈추지 않고 달려 온 그의 삶이 더 귀한 것은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많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마실 수 없는 바닷물 같은 내 인생을 졸이고 졸여서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소금이 되게 하셨다”라는 김 장로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인생은 순백의 소금을 얻기 위해서 ‘강한 햇볕에 졸이고 또 졸여야 하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끊임없는 연단의 과정이었다. 이 연단의 과정에서 김 장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가진 것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소금 수송과 판매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사업이 번창하고 있을 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것은 물론 엄청난 빚을 지게 되자 고통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했지만 이 곳에서 만난 기독교인 의사를 통해서 김 장로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소개 받고 성경을 읽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됐다. 마음에 즉시로 평안이 찾아 들었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사업을 재개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후 하나님과 함께 하며 더욱 번창하게 된 사업은 김장철에 판매하기 위해 모아 둔 소금 3천 가마가 홍수로 인해서 모두 녹아 버리는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되지만 김 장로에게 이 사건은 이 세상의 성공이 주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헛되고 헛되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갖게 하는 기회가 됐다. “소금더미가 다 떠내려갔어도 제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만은 떠내려가지 않았다”는 기도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런 연단은 기도 응답으로 받은 염전 10만 평이 해일에 휩쓸려 폐허가 됐을 때도 원망이 아닌 이같은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김 장로가 되게 했다.
사랑하는 큰아들이 갑자기 희귀병으로 앉은뱅이가 됐을 때 아버지로서 이겨내야 했던 극심한 고통과 “예수 잘 믿는 장로 아들이 왜 저렇게 됐냐, 짓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어서는 아니냐”라는 주위의 시선으로 인한 상처, 이 모든 고난들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인내할 수 있었다. 이 기간 신학교 입학과 졸업이라는 또 다른 인생의 문을 하나님께서는 여셔서 자신을 더욱 준비된 평신도 지도자로 성숙시켰다고 김 장로는 회상한다. 신학교 졸업과 맞물려 5년을 장애인으로 지낸 큰아들이 기도 가운데 치유된 것은 김 장로와 가족은 물론, 주위 모든 이들에게도 은혜를 끼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이 됐다. 기독교인에게는 고난이 또 다른 상급을 위한 과정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이 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멈추지 않는 꿈, ‘10만 기독실업인’을 향해
이렇듯 자신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면 김 장로는 아직까지도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매일 그 사랑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니 김 장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에 생을 온전히 드리고 싶다는 은혜의 불꽃이 꺼질 틈이 없다.
특히나 김 장로에게는 자신과 같은 기독실업인들에게 이 은혜의 불꽃을 나누어 세상의 ‘소금’ 역할을 감당할 수많은 주의 일꾼들이 나타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이 바람은 2009년 한국기독실업인회(CBMC)의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더욱 구체화된 계획을 통해 추진되고 있다. 2009년 기공식을 가진 충남 당진의 국제리더십센터는 전 세계 영적 비즈니스 리더를 훈련시키는 장으로 쓰임 받기 위해 지금도 하나님의 뜻 아래 추진되고 있다. 김 장로의 리더십 아래 한국CBMC는 2010년 500개 지회, 1만 명 회원의 목표 이후 2020년까지 ‘1천-1만-10만’, 즉 1천 개의 킹덤 컴퍼니, 1만 명의 영적 비즈니스 리더, 10만 명의 회원이 세워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같은 비전이 너무나 큰 것이기에 사람들은 과장된 꿈이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김 장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 비전을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가 이런 꿈을 하나님 안에서 꾸는 것은,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이 나라를 발전시켜 왔다는 깨달음을 강하게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에 나라를 잃었을 때도,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6.25전쟁 때에도, 전후 극심한 폐허를 딛고 일어나 유례가 없는 빠른 속도로 경제대국이 되기까지도 그 뒤에는 애국심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해 왔던 이들이 있었고 이들의 애국심의 원천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족대표 33인들의 절반 가량이 기독교인이었고, 이들의 기도 위에 건국된 이 나라에서 1등 교회가 나오면서 1등 기업도 나오기 시작했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했던 나라가 선교사 2만 명을 파송하게 되자 국민총소득 2만 불을 넘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 장로는 성숙한 신앙을 가진 기업인들이 나라와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국내외 선교에 동참해 선교의 문을 활짝 여는 데 협력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앞으로도 한국CBMC의 사역을 이끌어나갈 전망이다.
김 장로의 별칭인 ‘소금 장로’는 비단 평생을 염전 사업을 일구어 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평생의 사업이 된 염전 사업을 통해 대기업이 아닌 개인사업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물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소금으로 성공했다는 사실보다도, 이 성공을 통해 얻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소금 장로’라는 별칭을 더 잘 설명해 준다. 그의 평생은 물질의 축복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깨달음 앞에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어떻게 하면 이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쓸 것인가를 두고 기도하고 응답 받은대로 실천에 옮겨온 삶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금은 사람들의 밥상을 맛깔 나게 할뿐 아니라 이 세상을 더욱 맛깔나게 하는 하나님의 소금이 됐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금 장로’의 사명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장 김수웅 장로. 염전 사업을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통로로 삼아 온 그에겐 ‘소금 장로’란 별칭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손현정 기자 | |
김수웅 장로는 이 때까지 국내외에서 1천여 회가 넘는 집회를 인도했다. 그의 집회에서는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불화가 있던 곳에는 화해가 찾아오고, 또한 복음을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며, 아픈 자가 병 고침을 받는 일들이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여의도순복음교회(당시 순복음중앙교회) 최초의 남자 구역장 시절부터 시작한 교도소선교와 군선교는 현재 아가페기독교교도소 재정위원장을 맡고, 군선교에 기여한 공로로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까지 김 장로가 평생을 두고 관심을 기울이고 헌신해 온 일들이다.
또한 김 장로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성전을 짓는 일이라는 굳은 믿음 아래 어디든 교회를 건축한다는 말만 들으면 이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참여해 왔다. 서울장신대학교 1천여 전교생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 해성홀과 제주도의 초교파 교회이자 선교재단법인인 방주교회는 그 규모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손꼽힐 수 있다.
김 장로는 이외에도 자라나는 하나님의 일꾼을 키우는 소중한 일에 참여하는 것만큼 귀한 것이 없다는 신념으로 학교에서 강사 초빙을 받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순위로 달려가는 것 외에도 숭실학원, 한동대학교 등 신학대학교와 연결된 일에 헌신해 왔으며, 멀리 북한 땅에도 평양신학교를 세우는 결실을 맺었다. 이는 또한 평양에서 태어난 그가 숙원해 오던 북한선교의 꿈에 더욱 매진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북한에 교회를 회복한다는 비전을 갖고 평양에 1866년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계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이렇듯 한 사람의 몫으로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그의 역할들은, 그가 늘 바쁜 업무 일정을 안고 있는 사업가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더욱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는 사업은 사업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김 장로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소금 장로’로서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다. 6.25 전쟁 당시 고향을 떠나온 그가 오랜 피난 생활 끝에 소금 유통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자비량 선교를 하고 싶다는 열망 하에 소금 생산에 뛰어든 것도, 그리고 평생의 염전 사업으로 성공한 것도 지금 돌아볼 때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소금 장로’라는 별칭도 기도 가운데 나왔다. 당시로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염전 10만 평을 두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는 소금을 만들어 생산하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다고 말한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의 근원이 빛과 소금에 있듯 소금을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힘써 온 그의 삶은, 그렇게 염전 10만 평을 기도하던 끝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음성을 듣고 당시 좁은 천막이던 오산리금식기도원(현재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건축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같은 결단을 알리면서 최자실 목사로부터 축복기도를 받던 중 최 목사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소금 장로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 줬고, 오늘날 김 장로는 그 기도대로 이름뿐만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소금 장로’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자비량 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에 기도했던 염전 10만 평이 응답됐으니, 이와 함께 기도했던 5대양 6대주를 누리는 자비량 선교사의 삶 역시 응답된 것이다.
‘햇볕에 졸이고 또 졸이듯…’ 연단의 과정
이처럼 하나님의 일이라면 멈추지 않고 달려 온 그의 삶이 더 귀한 것은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많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마실 수 없는 바닷물 같은 내 인생을 졸이고 졸여서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소금이 되게 하셨다”라는 김 장로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인생은 순백의 소금을 얻기 위해서 ‘강한 햇볕에 졸이고 또 졸여야 하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끊임없는 연단의 과정이었다. 이 연단의 과정에서 김 장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가진 것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소금 수송과 판매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사업이 번창하고 있을 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것은 물론 엄청난 빚을 지게 되자 고통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했지만 이 곳에서 만난 기독교인 의사를 통해서 김 장로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소개 받고 성경을 읽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됐다. 마음에 즉시로 평안이 찾아 들었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사업을 재개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후 하나님과 함께 하며 더욱 번창하게 된 사업은 김장철에 판매하기 위해 모아 둔 소금 3천 가마가 홍수로 인해서 모두 녹아 버리는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되지만 김 장로에게 이 사건은 이 세상의 성공이 주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헛되고 헛되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갖게 하는 기회가 됐다. “소금더미가 다 떠내려갔어도 제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만은 떠내려가지 않았다”는 기도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런 연단은 기도 응답으로 받은 염전 10만 평이 해일에 휩쓸려 폐허가 됐을 때도 원망이 아닌 이같은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김 장로가 되게 했다.
사랑하는 큰아들이 갑자기 희귀병으로 앉은뱅이가 됐을 때 아버지로서 이겨내야 했던 극심한 고통과 “예수 잘 믿는 장로 아들이 왜 저렇게 됐냐, 짓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어서는 아니냐”라는 주위의 시선으로 인한 상처, 이 모든 고난들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인내할 수 있었다. 이 기간 신학교 입학과 졸업이라는 또 다른 인생의 문을 하나님께서는 여셔서 자신을 더욱 준비된 평신도 지도자로 성숙시켰다고 김 장로는 회상한다. 신학교 졸업과 맞물려 5년을 장애인으로 지낸 큰아들이 기도 가운데 치유된 것은 김 장로와 가족은 물론, 주위 모든 이들에게도 은혜를 끼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이 됐다. 기독교인에게는 고난이 또 다른 상급을 위한 과정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이 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멈추지 않는 꿈, ‘10만 기독실업인’을 향해
▲김수웅 장로는 교회가 부흥할 때 사회도 반드시 발전해 왔던 한국 역사를 되돌아보며, 영적인 리더의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손현정 기자 | |
이렇듯 자신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면 김 장로는 아직까지도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매일 그 사랑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니 김 장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에 생을 온전히 드리고 싶다는 은혜의 불꽃이 꺼질 틈이 없다.
특히나 김 장로에게는 자신과 같은 기독실업인들에게 이 은혜의 불꽃을 나누어 세상의 ‘소금’ 역할을 감당할 수많은 주의 일꾼들이 나타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이 바람은 2009년 한국기독실업인회(CBMC)의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더욱 구체화된 계획을 통해 추진되고 있다. 2009년 기공식을 가진 충남 당진의 국제리더십센터는 전 세계 영적 비즈니스 리더를 훈련시키는 장으로 쓰임 받기 위해 지금도 하나님의 뜻 아래 추진되고 있다. 김 장로의 리더십 아래 한국CBMC는 2010년 500개 지회, 1만 명 회원의 목표 이후 2020년까지 ‘1천-1만-10만’, 즉 1천 개의 킹덤 컴퍼니, 1만 명의 영적 비즈니스 리더, 10만 명의 회원이 세워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같은 비전이 너무나 큰 것이기에 사람들은 과장된 꿈이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김 장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 비전을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가 이런 꿈을 하나님 안에서 꾸는 것은,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이 나라를 발전시켜 왔다는 깨달음을 강하게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에 나라를 잃었을 때도,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6.25전쟁 때에도, 전후 극심한 폐허를 딛고 일어나 유례가 없는 빠른 속도로 경제대국이 되기까지도 그 뒤에는 애국심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해 왔던 이들이 있었고 이들의 애국심의 원천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족대표 33인들의 절반 가량이 기독교인이었고, 이들의 기도 위에 건국된 이 나라에서 1등 교회가 나오면서 1등 기업도 나오기 시작했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했던 나라가 선교사 2만 명을 파송하게 되자 국민총소득 2만 불을 넘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 장로는 성숙한 신앙을 가진 기업인들이 나라와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국내외 선교에 동참해 선교의 문을 활짝 여는 데 협력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앞으로도 한국CBMC의 사역을 이끌어나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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