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로마서 5부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신자의 삶이 나타나는 영역에 따라 설명하였는데, 동심원으로 설명하면 맨 안쪽의 원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관계이며, 그 다음은 이러한 관계가 교회에 표현되고, 다음은 성도 상호간에 어떤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설명하였고, 다음으로 핍박하고 가로막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이러한 삶의 모습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유형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도들이 국가의 국민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만약에 성도가 국가에 대하여 항상 부정적이고 여러 가지 부정한 방법으로 세금을 속인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존재를 알 수 있을까요? 또한 국가가 악을 행하고 법 적용의 형평성을 잃어버릴 때 성도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분명 아닙니다.

이 문제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문제를, 두 번째로는 국가에 대한 성경적인 본질이 무엇인지,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국가제도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며, 네 번째로는 국가에 대한 신자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교회와 국가의 관계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일으킨 주제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두 관계를 정의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네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국가가 교회를 통제한다는 국가우선론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이 이론을 잘 이용하였습니다. 이 이론이 얼마나 위험한 이론인지도 모르면서 국가가 있어야 교회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와는 반대로 교회가 국가를 통제한다는 신정론입니다. 대표적으로 중세시대의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AD. 800년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이슬람 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세력을 얻어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샤를마뉴의 대관식으로 말미암아 교황들은 자기 마음대로 세상의 왕들을 세우거나 폐위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는 서로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국가가 교회에 호의를 베풀고,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받기 위해 국가의 편의를 도모해 주는 콘스탄틴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우선론과 신정론의 타협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독특한 책임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반자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이론 가운데 네 번째 가장 성경에 부합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국가를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의 필요를 위해 주신 제도로 인식하고, 서로의 고유한 책임을 인정하고 서로 건설적으로 협력하는 관계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 그럼 이 인간이 세운 정부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정부는 혹은 국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분 이라는 것입니다.

국가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권세의 모습은 어떠한 특별한 체제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아니면 군주주의든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어떠한 다스리는 체제를 갖느냐, 그것이 좋으냐 나쁜가는 여기서 논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체제를 가지더라도 이 땅에서 완전한 체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함입니다. 무신론에 의한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이 공화정치건 민주 정치건 아니면 왕정이건 간에 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권력을 쥔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롬 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물론 구약에서 특히 시편 72편에 1-5절에 보며는 존경받고 인정받는 지도자들의 자격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반대로 불의한 지도자에 대해서는 이사야서 10장 1-3절에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 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그들의 행함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세우신분은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권세는 임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고전 15:24절에 그 후에는 예수님 재림 후에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하나님께서 종국에 가서 인간이 세운 모든 권력을 다 폐지하시고 친히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세상을 열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2:9-10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인간에 다스리는 권세는 일시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