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은 제3차 로잔대회가 열리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10월 16일부터 25일까지 남아공 케이프타운(Cape Town)에서 개최되는데 로잔대회는 ‘현대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산실’로 오늘날 선교신학과 선교전략이 이곳에서 다 배출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차 대회는 유럽(스위스)에서, 2차는 아시아(마닐라)에서 각각 개최되었고, 3차는 아프리카(케이프타운)에서 열린다. 특별히 이번에 개최되는 제3차 로잔대회가 지니는 큰 의미를 세 가지로 찾는다면 첫째는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기념해서 열리는 것이고, 둘째는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대회이며, 셋째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18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초교파적인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열자고 제의한지 꼭 200년 만에 케이프타운에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로잔운동은 왜 개최되었을까?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공산주의의 확산이다. 1960년대 세계 정세는 미소 냉전시대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당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최고조로 달하였다. 특히 중국이 1949년 공산화가 된 이후 공산주의는 아시아권에서 점차 확산되어 갔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가 공산화 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서방의 식민주의 국가였던 이들 나라들은 반서방주의를 표방하면서 서구 선교사들을 축출하였다. 자유로운 포교활동은 제한되었고 선교사의 신분으로 활동할 수 있는 나라들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이 당시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독일은 동서로 갈라섰으며 중국의 문화혁명(1966-1976)은 종교를 탄압하며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시켰다.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의 이견으로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통해 세워진 세계선교운동의 조직체인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가 1961년 WCC에 흡수되면서 세계선교의 비전과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당시 공산주의의 확대로 선교사들이 설 땅이 점차 좁아지게 되자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선교열정을 회복하려는 모임을 갖길 소망했다.

둘째, 민족주의와 종족종교의 부흥이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하나 둘씩 독립하게 되었다. 대다수 이들 국가들은 식민통치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것이 강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racism) 등장과 종족종교(ethnic religions)의 부흥이었다. 자기 민족의 문화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는 물려가라!(Missionary Go Home!)”고 외치며 자신의 종족종교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2/3세계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렇다 보니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서구 선교사들의 자기방어식 게토(Ghetto) 사상은 선교 열매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하였다. 이런 현상은 당시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17세기,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으로 왕성한 선교활동을 했던 덴마크 할레 선교회나 모라비안 선교회와 같은 선교운동을 회복하도록 눈을 돌리게 하였다.

셋째, WCC의 급진적 선교관의 확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서구사회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교회는 전쟁으로 인한 질병, 가난, 고아, 부의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것은 서구교회로 하여금 ‘How Mission’에서 ‘Why Mission’으로 선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가 일방적으로 어떻게 선교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회는 당시 사회적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52년 빌링겐 대회에서 ‘선교=하나님의 선교’라는 급진적 선교관을 수용하게 되었고, 마침내 1968년 웁살라 대회에서는 ‘선교=인간화’로 정의를 내렸다. 1973년 방콕 대회에서 WCC는 “구원이란 인권에 대한 정치적 억압에 항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인의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에 항거하여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처럼 WCC의 급진적 선교관의 확산은 복음주의자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음주의자들은 선교에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아시아와 동유럽으로 급속하게 퍼지는 공산주의 사상, 2/3세계에서 부흥하는 민속종교, WCC의 급진적 선교관 수용과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대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가 있었다. 그는 1966년 베를린 대회에서 ‘한 인류, 한 복음, 한 과제’라는 주제로 개최하여 복음주의 진영의 사람들을 끌어 모아 복음적인 선교운동을 회복하길 원했다. 이 대회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베를린 대회를 잘 할 수 있도록 빌리 그래함 목사를 도운 정신적 지주는 「크리스처니티투데이」 편집장인 칼 헨리(Carl Henry)였다. 이후 1968년 싱가포르 대회, 1969년 미니애폴리스와 보고타 대회, 1971년 오스트레일리아 대회를 거치면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선교관이 약간씩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은 ‘선교=복음전파’라는 전통적 선교개념을 여전히 고수하는 자들이 있었다.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과 세대주의학파 신학교인 달라스 신학교가 여기에 속한다.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1970년 프랑크푸르트 대회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에 관한 사회정치적인 분석과 비기독교적 세계의 요구에 의하여 선교의 본질과 임무를 결정하는 현재의 경향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선교=복음전파+사회적 책임’이라는 통전적 선교개념을 주장하는 새로운 그룹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존 스토트(John Stott)이다. 스토트 목사 외에 풀러학파 교수들이 이 그룹에 속한다. 스토트는 1968년 WCC가 주최하는 웁살라 대회에 자문위원(adviser)으로 참여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무척 미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성경해석 제시와 온화한 성품은 많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통전적 선교개념을 수용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선교의 우선순위는 항상 복음전파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마침내 1974년 제1차 로잔대회에서 발표된 로잔언약에서는 “전도와 사회·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고 발표하여 통전적 선교개념이 복음주의자들에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계속)

안희열 교수
-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 세계선교훈련원(WMTC) 원장
-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