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예수’ 그 길은 결단이다
그 길은 약속이다 그 길은 사명이다


옥한흠 목사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 역시 종교생활을 하는 곳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실소가 나오는 가당치는 않는 소리로 여길 수도 있다. 그만치 교회는 사회 속에 단지 종교적인 모습으로 더부살이 하는 답답한 처지를 말하려 한 것은 아닐까.
옥 목사는 그 이유에 대해 원론적인 답을 던진다. 신앙과 교회의 본질은 생명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한다

옥 목사는 교회 안에 그토록 기초적인 신앙의 본질조차 망각하고 있음을 늘 안타까워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데 그칠 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닮은 삶으로 이끌고 가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책망이었다. 그 책망과 안타까움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과 경종을 울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단지 나만 잘났다는 기만적 허세도 죽어가는 교회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회피적 비아냥도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의 새로움을 말하며 죽어가는 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의 토로였다. 부흥의 성과에 도취되어 사회와 나아가 세상과도 단절 된 이른바 ‘신앙적 만리장성’을 쌓아 버린 한국교회는 그 절실함 마저 외면하고 그 필요성 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성장에 자아도취된 한국교회를 향해 호소 한다. ‘우리는 두 날개 부흥을 꿈꿔야 합니다. 한 쪽은 대각성 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성장 입니다’..

그리고 더 애타게 더 간절하게 읍소한다.

“회개를 통해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고 치유되면 성장은 그 결과로 자연스레 찾아옵니다. 교회성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선 교회건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한국교회.

도리어 강단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라는 선구자적 외침은 상실 되어 버리며 목사들은 회개나 반성보다는 듣기 좋고 부드러운 말을 골라하게 되는 변질된 목소리만 높아 져만 갔다.

회심을 통한 변화

그는 결단한다. 한국교회 부흥을 자축하는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그 자리에서 그는 수만 명의 성도들, 아니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울부짖었다.

“주여, 한국 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 주옵소서. 부어 주시옵소서.”

한국교회의 부흥은 죄업을 놓고 가슴 치는 회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 하며 자신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고 통회자복 하는 모습 앞에 모두는 경악했고 모두가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교회의 절망을 선언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희망이 남겨져 있음을 발견했고 함께 그 희망의 고지를 가길 원했다. 그토록 간절하게 찾았던 희망은 회심을 통한 한국교회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전한 것이었다.

다름이 주는 감동

그는 교회를 평가 절하하지 않는다.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영광의 그날을 사모한다. 그렇기에 결코 세상과의 타협은 용납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감동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때 세상이 반응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감동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들과 접촉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비슷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마귀의 소리 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비슷해지거나 같아지면 기독교는 망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교회는 문을 닫습니다. 크리스천의 생명은 죽어 버립니다”

그는 강조한다.

“우리 모두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감추어 있고 예수와 함께 나타날 사람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유명해 지는 것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모든 세상의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당하는 실패를 보는 눈도 달라야 합니다. 고통을 보는 눈도 달라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달라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감동을 느낍니다. 만일 우리와 접촉 하면서도 그들 자신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감동이 없는 곳에는 어떤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다르구나 정말 무언가 달라 하고 느낄 때는 이미 마음 속에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름이 있을 때 감동이 생깁니다”

예수에 미쳐야 했다

세상과의 다름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이라고 강조한다. 세상과의 다름은 세상을 감동 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명을 일깨워 준다. 교회는 세상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이미지는 너무도 참담하다. 그들의 눈에 우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특별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다른 모습을 세상 사람 앞에 보여 줌으로써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가치관을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감동 시킨다면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하루 빨리 임할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신앙, 그래서 그는 예수에 미쳐야 했고 예수의 제자 됨을 가르치는 제자훈련에 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생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자의 삶을 따르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은 이유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

‘작은 예수’ 그 길은 결단이다. 그 길은 약속이다 그 길은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

“ ‘우리가 흠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오를 정상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 정상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고 흉내라도 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지금 당장 갈릴리 언덕으로 달려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요’라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무릎 앞에 다가 앉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처럼 걷고 예수처럼 말하고 예수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를 다짐 한 이들이 감당해야 할 본분인 것이다”.

/사랑의교회 커뮤니케이션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