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는 얼핏 보기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 중 하나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뜨인돌)>는 ‘전쟁’까지 불사하고 있는 과학과 종교의 이같은 관계가 그릇된 ‘통념(myth)’ 때문임을 밝히는 책이다.

현재 상황은 이렇다. 비기독교인인 일반 대중은 갈릴레이와 다윈 등의 공격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일부 과학자들의 ‘선동적 주장’으로 조직화된 종교가 항상 과학 발전을 방해해온 것으로 안다. 반면 기독교 대중은 자연주의와 반성서주의를 통해 과학이 믿음을 좀먹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책을 엮은 로널드 L. 넘버스는 “이런 통념을 바로잡기 위한 첫 걸음으로, 역사적 사실인양 이어져 내려온 케케묵은 신화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취지를 전한다. 책은 각기 다른 전공을 가진 석학 25명이 ‘통념’의 옷을 입고 어느새 진실이 돼 버린 과학사의 종교 관련 이슈들을 끄집어내 논증을 펼치는 내용으로, 하버드대 출판부가 기획했다.

먼저 대표적인 통념 중 하나인 ‘중세 기독교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가르쳤다’에 대한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 대학 예술과 사회과학부 학장인 레슬리 B. 코맥의 설명을 들어보자. 중세를 통틀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이 문제를 바라보는 양측 사상가들 모두 가톨릭 교도들이었으며 이들은 지구의 형태를 전통적 또는 진보적 시각으로 등식화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사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지구의 모양보다는 구원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섰다는 통념도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다. 이미 그 사실은 다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며,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콜럼버스가 과연 항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에 관해서였다. 더구나 당시 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활용해 콜럼버스를 반대했는데, 지구가 콜럼버스의 생각보다 더 크기 때문에 배를 타고 세계를 완전히 일주하려면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주장이었다.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 등 고대 학자들부터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초기 교부들, 7-14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자연 세계를 탐구한 주요 중세 사상가들 모두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언급해 왔다고 그는 지적한다. 성직자들은 진실을 감추지도 않았고,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진화론자들의 아버지’ 찰스 다윈이 진화론 때문에 신앙을 버렸다가 임종 직전에 회개했다는 극적인 ‘회심의’ 이야기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책은 밝힌다. 역사학 교수인 제임스 무어는 다윈의 아내였던 호프 부인에 의해 알려진 이 이야기는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라 치부하긴 어렵지만, ‘잘 만들어진 가짜’로 결론내린다.

대신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종교적 신념을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버렸을 거라는 추측에 대해서도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다윈의 공식적인 고백으로 반박한다. 그가 40세 때인 1849년은 그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발전시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성직자 생활을 꿈꾸던 다윈은 진화론이 아닌, 아버지와 딸 애니의 죽음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 그러나 신은 계속 믿었다고 한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는 ‘진화(evolution)’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창조(creation)’와 이에 상응하는 단어가 100회 넘게 등장한다고 무어는 덧붙인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종의 기원>은 경건한 작품이었다”며 “기적에 의한 창조는 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신론자의 처지에서 법칙에 의한 창조를 지지하는 ‘하나의 긴 주장’이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보스턴대학의 지식사 교수인 존 H. 로버츠는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신학을 파괴했다는 통념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대체로 신의 존재와 특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자연신학’의 범위는 대단히 합리적인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에서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s)’에 이른다.

역설적이게도 자연신학자들에게 다윈의 이론은 설득력 있는 확실한 도구였다. 19세기 말 유기적 진화이론을 주창한 사람들은 분명 자연신학의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주장을 내놓았다. 첫째,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적자생존을 잘 설명할지는 모르지만 이런 자연선택을 가능하게 한 다양성의 기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데, 따라서 진화는 좌충우돌하며 ‘사방으로 시행착오를 겪는 방법’일 수 없으며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세상을 관장하는 어떤 마음’과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둘째도 자연선택 개념을 주의깊게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진화에서 얻은 통찰을 활용했다. 진화 과정은 ‘더 고등한 종’의 출현을 암시하는 진보 과정이라는 점에서 자연선택 개념도 단순히 설계 논증과 충돌하지 않고, 설계 논증에 새로운 해석을 첨가할 토대를 구성한다. 자연신학의 운명이 형성되는 데 다윈주의의 가장 큰 공헌은, 많은 유신론자들에게 설계 논증의 범위를 생명체에서 자연세계 전체로 확장한 점이다.

이밖에 ‘기독교의 융성이 고대 과학의 쇠퇴를 가져왔다?’, ‘중세 교회는 인체 해부를 전면 금지했다?’, ‘과학 혁명이 과학을 종교에서 해방시켰다?’,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론이 신의 필요성을 제거했다?’, ‘아인슈타인은 인격화된 신을 믿었다?’, ‘지적 설계론은 진화에 대한 창조론의 과학적 도전을 대표한다?’, ‘창조론의 범람은 미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등의 통념들을 뒤집고 있다.

이 책은 <만들어진 신>, <종교전쟁>, <지상 최대의 쇼> 등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정죄’하고 ‘파멸’시키려는 일련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과학사에 잘못 채워진 25가지 통념’들에 대한 실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낸다. 각 장을 맡은 과학자들의 절반은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이지만,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면 ‘종교인’들이 책의 제목을 보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