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기자고 만든 것이 운동경기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운동경기가 과열되니까 심판의 오판도 많아지고 불평도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심판 판정의 항의를 줄이기 위해 시합 중에 VTR로 재생해서 심사를 하자는 의견이 FIFA에서도 나왔지만 한마디로 일축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인격과 양심을 믿자는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야구에서도 스트라이크냐, 볼이냐를 판정하는 주심을 로봇으로 세워서 정확하게 판정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이 역시 야구의 맛이 떨어진다는 뜻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촌각을 다투는 정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운동이라는 것이 빈틈없이 승패만 놓고 판단하고 본다면, 인간적인 면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가 있기에 사람답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인간답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끔 실수가 있는 사람이 구수하고 편안합니다. 완벽주의가 좋은 것 같지만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죽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찬양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완벽한 하모니는 없습니다. 아무리 천상의 소리라고 불린다 해도 하늘 아래에서는 완벽한 하모니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찬양의 잣대를 정확한 높낮이로 판단한다고 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기준 앞에 측량을 한다면 어느 누가 그 앞에서 완벽함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소리에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일을 유학하고, 불란서를 유학한 성악가가 부르는 찬양보다 때로는 교회의 악보조차 읽을 줄 모르는 집사님이 부르는 찬양이 더 은혜스럽고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완벽이 아닙니다. 찬양은 성공이 아니고, 스타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이고, 희생이고, 주님 앞에 겸손과 부끄러움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동이 없으면 사라지는 연기와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주님을 찬양하면 할수록 부르면 부를수록 나의 약함을 자랑한 바울처럼 오늘 나에게 힘이 되는 주님을 영원토록 목소리 높여 찬양해 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은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