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최성은 목사(다리놓는교회 담임)가 3년 전에 쓴 칼럼이다. 본지는 한인이민교회에 필요한 내용이라 판단, 저자의 동의를 얻어 이번에 칼럼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요즘 복음주의의 본질을 퇴색시키는 슬픈 이야기들을 심심치않게 듣게 된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또 주님의 제자로서 정말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늘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은 제외하고서라도 일부 한국 복음주의자들의 최근의 실수들을 두 가지 이야기로 예를 들어본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교회를 대상으로 발행하는 크리스챤 신문의 한 칼럼 난에 오프라 윈프리(Oprah Winprey)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녀가 어떻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하였는가를 감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오프라를 복음주의 크리스챤으로 소개하며 그녀의 힘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오프라는 미국에서 시행되는 갤럽조사마다 미국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선정되는 단골손님이다. 한 예로 마이클 잭슨이 오프라의 쇼에 출연했을 때 시청률이 9천 만명에 육박했다. 그녀의 영향력과 리더쉽은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다.

그러나 오프라가 어린 시절 침례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녀는 복음주의 크리스챤도 아니고 회심한 크리스챤도 아닐뿐더러, 요즘 많은 헐리우드 스타들이 그러듯이,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빙자한 새로운 뉴 에이지 운동의 한 사람의 기수이다. 그녀는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는 new spiritualism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최근에는 자신이 삼위일체의 네 번째 “fourth person”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에도 불구하고 오프라는 한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성공적인 크리스챤으로 소개되며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크리스챤들의 입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부각되어 진다.

Houston, Texas에서 아버지John Osteen(1929-1999)의 교회를 물려받아 목회하는 Joel Osteen은 Lakewood Church 를 몇 년안에 30,000명이 넘는 대교회로 성장시켰다. 필자는 3년 전부터 그의 설교를 자주 들어왔고 처음부터 그의 화술과 설교에 매료되었다. 그는 화술에 있어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고 부담을 주기보다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격려하고 동감하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이 점은 모든 설교자가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데는 동감한다).

그런데, 그의 설교를 1년쯤 듣다보니 고민이 생겼다. 너무 듣기좋고 신기할 정도로 말을 잘하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그에게서 십자가나 심판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지 못했다. 부임 후 처음 일년간은 많은 성경구절을 다 외워서 적시 적소에 잘 사용하는가 했는데 요즘은 그의 설교에서 성경구절을 찾아보기 힘들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인용구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CNN의 Larry King Live에 단독출연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교회 안에서 “sinner”“죄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I don’t use it. I never thought about it.”그는 죄와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매 주일 “positive stuff” 긍정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성경(the King James Bible)은 죄라는 단어를 무려 830번 이상 언급 하고 있다. 오스틴의 CNN 인터뷰는 많은 파장과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인가?”라는 질문에 Yes나 No의 답변을 피하며 너무나 성의 없는 대답으로 복음주의 크리스챤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결국 자신의 웹사이트에 공개 사과를 하며 예수는 당연히 그리스도라며 그 답변을 수정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챤들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놀랍게도 오스틴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개적인 TV쇼에서 그 기본적인 답을 확신 있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게도 오스틴은, 좀 과장이겠지만, 한국에서 이미 시대가 낳은 복음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님만큼 유명해졌다. 한국에서 번역된 오스틴의 베스트셀러 Your Best Life Now (긍정의 힘)는 한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추천서를 개재하며 마치 죠엘 오스틴이 미국을 이끌어 가는 떠오르는 복음주의자인양 소개하고 있다. 목회자를 위한 한국의 유명한 전문 웹에서도 아예 그의 영문 설교를 매 주 볼 수 있도록 링크를 올려놓고 있다. 그 실용주의에만 바탕을 둔 오스틴의 강의와 철학을 배우며 영향력을 받는 신학생들과 교인들의 신앙을 누가 책임질지 걱정이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겠지만 이민목회 속에서의 목회자의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는(제대로 된 목회자라면)“ 매 주일 무엇을 설교 할 것인가?”일 것이다. 4,000여 개의 이민교회가 있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성도수가 100명을 넘지 않는 아담한 교회이다.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아는 분위기 속에서 목회자로서 매 주일 십자가와 회개에 대한 가볍지않은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성도들 역시 부담주는 설교자를 본능적으로 피한다. 현재 젊은 미국 교회 목회자들의 특징은 didache (도덕적, 교훈적)적인 설교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10년 넘게 미국 목회자들의 설교를 조명한 바로는 설교의 적용부분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미국설교의 장점이기도하다. 수 천년 전 성경 본문의 내용을 현실세계의 나의 삶의 자리까지 끌어오는 해석학과 본문 적용은 설교자의 기본 과제이며 당연한 의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도덕적이고 교훈적이고 적용적인 설교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다 보니 kerygma(신약 성경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적인 설교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상당수 중 소형 교회에 다니는 오래된 교인들도 didache적인 설교에만 귀가 훈련되어 있는 듯 하다. 사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상 휠씬 듣기 편하다.

필자의 조심스런 소견으로는 한국의 복음주의 설교는 대체로 미국의 형편과 반대로 didache적인 설교보다는 kerygma적인 설교가 더 많지않나 생각한다. Kerygma적인 설교를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 방법이 너무 지루하거나 교리적이고 않아야 하고, 오히려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고민과 만나는 철저한 몸부림의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케리그마적인 설교도 당연히 교훈적이고 삶과 밀접한 적용이 필요하다.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John Stott, Michael Green, Robert Mounce, Craig Loscalzo, Lewis Drummond 등이 지적한 대로 C. H. Dodd가 주장한 kerygma와 didache에 대한 너무 분명한 구분(too sharp distinction)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은 케리그마와 디다케 두 가지를 다 중요하게 여기셨고 균형있게 사용하셨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복음적인 설교와 도덕적인 설교의 비중의 균형이 깨어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 오스틴의 예처럼 일부 복음주의의 경향이 복음의 본질의 내용까지 흐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프라의 쇼가 마치 하나의 종교인 양 추앙 받는 것이나, 그 성공담을 여과없이 설교의 예화로 삼고, 악덕 기업인이었던 록펠러가 아직도 한국인의 십일조 설교에서 영웅으로 등장하고, 죠엘 오스틴의 설교가 하늘을 찌르듯 인기가 있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복음과 십자가에 대한 본질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해도 성도가 불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복음주의 설교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설교의 위기는 곧 신학의 위기이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 참조-갈 6:14)고 했다.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 신학의 정수이고 설교의 핵심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성도들의 가려운 데만 긁어주고 놀라운 화술과 웅변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해도 십자가를 통해 성도들이 숨기고 있는 썩어져 가는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설교를 하지않는 다면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 앞에 교회성장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며 사람들 가운데 목회를 하더라도, 언어의 둔함과 지역의 한계때문에 교회 성장이 더디더라도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사랑의 메시지로 성도들을 치료하고 사랑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교회 성장이 어디 있겠는가? 오프라의 카리스마와 죠엘 오스틴의 화술이 없더라도 어둔한 언어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민 성도들의 아픔을 포용할 수 있는 설교자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위로하시지 않겠는가?

아담한 교회이지만 부족한 설교이지만(설교 준비와 기도가 부족한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부족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심장 깊숙한 곳에서 불을 뿜듯 토해낼 수 있는 설교자라면 무엇이 부러울 것인가?

오프라를 거듭난 교인으로 생각하며 설교의 예화로 사용하는 오류나, 죠엘 오스틴을 복음주의의 기수로 평가하는 실수는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하나의 단편적인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 시대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설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의 포스트 모던의 파도에 휩쓸려 성도들의 필요한 부분만을 긁어주며 잘못된 희망(fake hope)으로 일관하는 교양강좌로 흘러간다면,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케리그마(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선행적으로 선포하는 인기없는 선지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 무엇인가 적용할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필요(felt need)를 충족시켜주는 didake적인 설교도 의심의 여지없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영혼의 목마름(real need)을 만져 줄 수 있는 복음적인 설교의 우선순위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시대는 케리그마와 디다케적인 설교의 균형은 두 번째 이야기이고, 오스틴의 예처럼 심리학을 곁들인 화려한 교양강좌가 복음의 본질을 위협한다는 것이 더 화두일 것이다. 그리고 무분별하게 그 성공담을 퍼뜨리는 설교는 오늘도 교인 수에 집착하지 않고 온전히 십자가의 복음 설교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키워내고자 고전 분투하는 주의 종들을 낙심케 만드는 위험한 일이다. 복음의 본질에 관한 설교는 뒷전이고, 일년 내내 십자가 고난을 통한 성장에 대한 이야기 하나없이, 사랑과 은혜의 교양강좌를 통한 교회 성장을 이뤄내는 것을 보면 참 말세긴 말세인가 보다. 그런 면에서 적용이 훌륭한 미국 설교의 장점은 수용하면서도 실용주의에 빠져있는 미국 설교자들을 지나치게 우상시하는 실수는 철저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사실 어느 영국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 받은 설교보다 더 훌륭한 설교는 고난과 핍박 위에 세워진 한국 초대교회의 순교자적인 복음설교, 십자가 설교라 생각한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바라보며 그러한 순수한 복음 설교가 그 부흥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하겠다.

복음은 믿지않는 자들에게 당연히 부담스러운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다 보면 당연히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사도들의 사명이었다. 우리가 누구의 제자인가?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 어려운 교회, 힘든 상황이지만 성실하게, 쉬워 보이는 길과 타협하지 않으며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의 교회들을 돌보며 십자가를 설교하고, 한편으론 진심으로 성도들의 삶을 어루 만져내는 이 시대의 이민 목회자들을 격려하며 생각해 본다. 사도행전 첫 베드로의 긴 설교의 핵심은 다름아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라는 은혜와 회개의 선포였다. 아무런 교양강좌와 웅변없이도(물론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과 학식에 사람들이 놀라긴 했지만) 그날 회개하며 삼천 명이 주님앞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복음주의 설교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초대교회의 설교로 돌아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십자가에 묻어난 피의 복음을 설교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거기에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