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위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다섯번째 인터뷰는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공부 중인 한동수 목사다. 한 목사는 연세대 법학과를 다니던 중 4학년 때 소명을 받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해 M.Div.를 마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부목사로 목회하던 2000년대 초, 급변하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며 다음 세대 목회를 위한 대안을 찾고자 고민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고든콘웰신학교에서 신약으로 Th.M. 학위를 받고, 교회사 분야로 M.A. in Religion을 수료한 후 시카고로 와 트리니티신학교에서 교회사로 Ph.D. 중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갈보리교회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청년 컨퍼런스인 코스타와 킹덤의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목사님께서 유학을 결심하게 된 배경부터 알고 싶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이 변화에 적응할지, 이 변화를 거부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교회 성장을 이뤄냈던 1세대 목회자들이 은퇴하는 상황에 겹쳐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있었습니다. 2세대 목회자들은 성장세를 유지해 가야 한다는 부담과 함께 뭔가 쇄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절박감은 성장하는 미국교회의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약화된 강단’의 문제를 ‘프로그램’이라는 겉포장으로 싸는 미봉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런 식은 아니다”란 생각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문제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부목사로 훈련을 받으면서도 내가 담임이 될 3세대를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강단이 제대로 세워져야 하는데 솔직히 신학대학원에서 3년간 배운 것으론 부목회 몇년만에 밑천이 다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교회사 연구가 목사님의 문제 의식에 어느 정도 답을 주었습니까?
저는 19-20세기 미국교회 역사를 연구 중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미국교회에 관해 배울 길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근현대교회사를 배우긴 하는데 주로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역사를 간략하게 다루고, 미국 역사는 근본주의 논쟁 정도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시작부터 미국의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교회사를 배우면서 ‘미국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미국의 기독교 운동’들이 갖는 의미와 흐름을 이해하게 되고 이것을 한국적 상황에 대입해 보게 됐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는 미국적 상황에서 일어난 이 운동을 한국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미국적 상황이란 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것이 한국적 상황에 어떻게 대입되던가요?
한 예만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사회는 독립전쟁을 치르고 19세기에 들어서며 민주화되어 갔습니다. 사회가 민주화 되었고 교회도 민주화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권위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고 평신도들이 깨어났습니다. 평신도 설교자들이 나타났고 각종 부흥 모임이 생겨 났습니다. 물론 이 물결을 타고 이단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활발한 변화 가운데 그 영향이 20세기까지 지속됐으며 19-20세기의 각종 사회 운동들도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사회와 교회는 2백년동안 민주화와 이에 따른 각종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발전해 온 것이죠.
그러나 한국에 민주화가 일어난 것은 언제인가요? 1980년대 이후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민주화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목사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교회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서 평신도라는 계층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20년, 더 길게 잡아 봐야 30년입니다. 30년간 경험한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가 2백년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시켜 온 미국교회의 평신도 관련 프로그램을 그대로 도입했을 때 문제가 안 생길 수 있을까요? 미국교회와 비교할 때 사상적으로는 19세기의 것을 가진 한국교회가 프로그램은 20세기의 것을 따라 가려니 각종 문제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더구나 그 프로그램들을 수용함에 있어 진지하고 종합적인 신학적 고찰마저 부재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평신도 훈련 프로그램 외에도 교회성장학 등 다양한 부분에서 한국교회가 현재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교회의 리더로 세우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들이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사역하고 참여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소그룹 리더가 되고 새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는 그것이 지나치게 단계별 학습화 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 과정만 다 마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목회자들은 각종 교회 성장 프로그램에 투입할 평신도 리더들을 양산하는데 급급한 것 같고,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리더로 세우면서 목회자의 고유한 직능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한 깊은 신학적 고민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만약 평신도가 목회자와 같아진다면 누군가가 “그럼 설교하는 것 외에 목회자가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 셀교회, 가정교회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이것도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론에 관한 것이기에 조직신학자들이 더 잘 논의할 문제이지만 제 생각에 이런 용어들보다는 소그룹 혹은 구역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경의 근거를 따라 전통적 교회론을 주장하는데, 교회는 말씀과 성례, 권징이 있어야 하고 목사와 같은 직능 체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셀이나 소그룹 조직에서 말씀과 성례, 권징이 모두 이뤄지나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교회라 부릅니다. 목회자가 목회자의 직능을 셀교회와 셀교회 리더에게 위탁했다면 그것이 목회자가 대기업의 CEO로서 하부 조직을 관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목사가 한마리 양을 대하듯, 성도들을 직접 대하고 양육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970년대 한국에 들어온 로버트 슐러나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도 대형교회에 대한 번영신학을 확산시켰으며 목회자들 안에 메가처치에 대한 간절한 환상을 심어 놓았습니다. 저는 앞서 말한대로 목회자는 성도를 직접 돌보고 양육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담임 목회자가 직접 성도를 양육할 수 있는 수가 넘어가면 교회를 분립개척하면 됩니다. 오늘날 일고 있는 셀교회, 가정교회 시스템은 대형교회가 교회 관리를 위해 도입한 고육지책이라 봅니다. 목회자의 능력에 따라 성도가 2백명이든 3백명이든 직접 양육하며 리더를 세워가고 그 한계 수치를 넘을 때는 부목사 등을 통해 새 교회를 개척하면 굳이 쩔쩔매며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교회들은 목회자들이 리더를 세운다는 미명 아래 목회자에게 직접 맡겨진 목양의 의무를 평신도들에게 지우고 있습니다. 인원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모든 리더는 목회자가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간 리더가 그 다음 하부 리더를 세우는 시스템을 반대합니다. 목회자가 평신도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 그 평신도들이 목사와 같은 신학적 지식과 목회철학을 갖고 그 다음 리더를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리더를 목사가 직접 세워야 합니다.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3-4백명 정도가 목회자가 성도를 직접 양육할 수 있는 한계라고 봅니다. 그리고 부교역자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라면 5-6백명 정도까지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1-2천명이 되면 담임목사가 직접 성도들을 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소그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옛날 한국교회가 갖고 있던 구역조직, 속회조직에 큰 의미를 둡니다. 구역장들은 사랑과 열심을 갖고 구역원들을 심방하고 챙겼으며 이웃들을 전도하는 일에도 열심이 있었고, 특별한 신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기도하며 그들의 상황을 목회자와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자칫하면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가교 역할을 잘해 준 것이죠.
-목사님은 미국의 은사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을 연구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교회의 은사주의가 한국으로 도입되며 어떤 결과를 낳았다고 보십니까?
미국 은사주의 운동 역시 한국처럼 신비한 은사와 기적을 중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 전반에 흐르는 이성주의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은사주의 운동은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신앙인 샤머니즘과 만났습니다. 이 샤머니즘적 요소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수용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그 선을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무속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1백일동안 기도하는 것과 기독교인의 40일 작정기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40일 기도를 함에 있어서 성경적 근거를 가져 오지만 우리가 가진 정서에는 샤머니즘의 영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아프면 꼭 담임목사가 병원을 찾아가서 심방을 해야 합니다. 부목사들이 수십번 다녀 가도 담임목사가 한번 간 것만 못하다고 성도들이 느낍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작은 무당과 큰 무당이 있어서 큰 무당이 한번 굿을 해야 문제가 풀린다고 믿습니다. 목회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런 것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은사주의가 샤머니즘과 결합하게 됐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교회에서 은사주의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유는 아시아의 정서와 문화 속에 있는 샤머니즘적 요소 때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우는 샤머니즘과 결합된 은사주의가, 민주화를 겪으며 흔들리는 교회 강단을 만났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기본적으로 교단을 불문하고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은 철저히 강단 중심적입니다. 민주화 전에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에 어떤 불만도 가질 수 없었고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민주화에 대한 바람이 불자 목회자의 말씀에 비평을 제기하게 됐습니다. 이 혼란 가운데 교회는 무슨 대안을 찾아야 했고 답은 두가지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먼저는 다시 말씀의 깊이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잡기에 수년, 수십년 전 신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재교육을 받을만큼 목회자들에게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 상황의 불가피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평신도 리더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의 깊이를 잃어가고 평신도들은 리더가 되어 가는 이 상황에서 목회자가 권위를 찾는 길은 바로 ‘신비한 능력’이었습니다. 미국교회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미국에서 나온 현대 교회 성장 프로그램들은 모두 성령의 능력과 체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교회 성장에 성령의 능력은 필수라고 볼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체험과 기적이 없으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권위가 안 서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무너진 강단을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의 회복보다는 은사주의에서 비롯된 신비한 능력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교회의 민주화와 강단의 권위 약화에 대해 은사주의적 요소로 해법을 찾아 왔다는 말씀이십니다. 미국교회의 경우 한국보다 훨씬 긴 민주화의 기간을 가졌는데 미국교회는 민주화와 강단의 권위 약화가 일어날 때 어떤 식으로 대처했나요?
앞서 말한대로 우리가 30년만에 적응해야 했다면 미국은 수백년에 걸쳐 이 문제에 적응했습니다. 물론 미국교회도 현상적으론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평신도 설교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평신도 설교자들이 권위적인 목회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역을 인정받는 수단은 신비한 능력과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메인라인 교단들 안에서는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건전한 인식은 있었지만 목사의 권위 회복을 위해 은사주의의 요소들을 도입하지는 않았습니다.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은사를 중시하고 강단을 경시하는 풍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역으로 미국교회는 더욱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사용하여 더욱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은사주의 운동이 모든 교단으로 퍼져나간 후에도 은사주의가 미국사회의 주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교단은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성경연구를 강조했고, 현재에도 미국 내 주요 교단들의 목사 안수를 위한 자격시험은 꽤 수준높은 성경강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권위의 문제에 관해서는, 민주화에 따른 평신도들의 역할이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책 자체를 존중히 여겨주는 문화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행사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짧은 민주화 역사 가운데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관한 해답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은사주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태로 발전해 갔군요.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미국 오순절교회는 독자적 노선을 갖고 있었지만, 대공황과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거센 도전 등으로 교회가 급속도로 혼란스러워지고 성도들의 영적인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교회는 그것을 타개할 방법을 찾게 됐고 오순절의 은사주의를 받아들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이적과 기사, 능력이 혼란스런 영적 상황을 극복할 요소로 인정 받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의 장로교는 장로교답고 감리교는 감리교답고 침례교는 침례교답습니다.
한국은 은사주의가 도입되면서 교단의 벽이 무너지는 형국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강단의 권위와 평신도의 권위를 지지할 수단으로서 은사주의를 필요로 했고 모든 교단이 그것을 수용했습니다. 게다가 은사주의 운동과 짝을 이루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은 교단의 신학과는 무관하게 여러 교회들이 받아들입니다. 장로교 신학을 고수한다고 하면서 침례교회의 프로그램을 가져 오고, 교회의 직분과 직책들도 의사결정기구를 제외하고는 교단간 서로 비슷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새들백이나 윌로크릭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학과 프로그램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전 의문스럽습니다. 저는 교단의 벽을 절대 사수하자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작업은 거친 후에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게 대세니까 따라 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러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 혹은 아니다”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비판적 수용은 곧 교회의 전통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결국 한국에 은사주의가 무분별하게 도입된 것이나, 각종 프로그램의 범람은 말씀의 권위 약화와 직접 관계가 돼 있고 이것은 또 교회의 민주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미주 한인교회의 문제로 넘어 와서, 한인교회 역시 한국교회와 비슷한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담임목사와 평신도 간에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새로운 담임목사가 왔을 때 평신도들이 담임목사에게 적응할 것인지, 아니면 담임목사를 적응시킬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평신도들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서도 짚어야 할 것들이 많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목사들의 책임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성도들을 잘 양육할 책임도, 변화시킬 책임도, 결국 목회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민교회의 아픔의 원인을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가지 공통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목회자들이 강단의 권위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민 목회자들은 대부분 이민 온지 오래된 분들이며 이민목회 가운데 재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공부한 것과 과거의 문화에 젖어 목회를 하는 가운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성도들은 사회 속에서 변화를 겪는데 목회자들만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면 강단의 권위가 도전받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특히 요즘 이민 오는 분들은 고학력자들로 사회적 지위가 어느정도 있는 사람들인데다가,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한국 목회자들의 지적 수준을 경험했고, 인터넷 등을 통해 수많은 설교를 들었을텐데 이민 목회자들을 만났을 때, 마치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민교회 목회자들의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뼈아픈 현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태도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이민 목회자들의 일방적인 책임도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목사들에게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도들 편에서 볼 때 이민자들의 사회적, 심리적 상황이 고려될 수 있습니다. 이민자는 한번 조국을 떠나본 사람이며, 고향도 등져 본 경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꿈과 목표가 있다면 언제든지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리적으로 떠나고 떠나 보내는 것이 낯설지 않게 된 것입니다. 교회도 한번 떠나는 것이 어렵지 두번 세번 떠나는 것은 쉽습니다. 이민교회 안의 수평이동 현상은 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로는, 교인들의 신앙성숙도입니다. 이민자들이 미국에 와서 교회를 찾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정착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펠로십을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3-4년이 지나면 진정한 회심이 없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게 되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목회자에 대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어떤 계기로 교회에 오게 됐건 교회에 왔다면 그들을 참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해낼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으면 되는데 그게 부재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문제가 그렇다 해도 목회자가 말씀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먹이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갓 부임해서 교회 안에 보이는 부조리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 첫걸음은 1년이건 2년이건 말씀으로 성도를 먹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을 들으면서 신뢰를 갖게 되고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그 후에 하나하나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말만 잘하는 설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깊은 성경 연구를 바탕으로 한 통찰력 있는 말씀을 온 마음으로 전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인들은 직책 자체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바는, 목사의 권위가 오직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데에서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은 “목회자가 스스로 선포한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그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합치된 삶을 살기 위해 씨름하고 있는가”를 늘 확인하며 목회자들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의 민주화에 어떻게 적응해 가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이라 볼 수 있겠군요.
사실 꼭 민주화에 대한 적응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 이미 민주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침례교회의 회중정치, 장로교회의 장로정치가 모두 민주적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안에 민주화가 기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민주화에 대한 이해가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온유는 자신이 가진 권위와 능력을 컨트롤하는 능력입니다. 내가 결정권이 있으니까 내 맘대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능력을 완벽히 컨트롤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게 바로 정의다”라면서 그 권위를 마구 남용합니다. 성경도 장로 제도를 말하고 평신도 역할을 강조하지만, 자기 권위를 남용하라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미국교회사를 연구하시는 입장에서 미국교회 안의 한인교회가 어떻게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현재 한 교회 안의 KM과 EM이 상호불가침의 영역을 갖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 것이 이 기여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세도 2세로부터 배워야 하고 2세도 1세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자 간에 공식적 채널이 있어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합니다. 한인교회들은 KM과 EM을 서로 분리시키고 있는데 그 기준이 신학이 아니라 언어와 정서입니다. 특히 서로의 문화에 대해 신학적으로 적합하지 않거나 그르기 때문에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서적으로 맞지 않으니 그저 불간섭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예배 형식이나 찬송 등에 대한 교회적 차원에서의 신학정립이 되지 않은 채 “KM은 CCM이 불편하니까 안 부른다, EM은 찬송가가 불편하니까 안 불러도 된다” 이런 식입니다. 담임목사와 1세 사역 담당자, 2세 사역 담당자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신학적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역사적 자산으로 남겨야 합니다. 한인 1세들은 언어 문제와 타민족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소극적 정서 때문에 미국교회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세들은 1세의 유산을 갖고 있으면서 언어나 적극성 면에서 1세보다 유리하기에 한인과 미국 간에 좋은 가교가 될 수 있습니다.
-한인교회 뿐 아니라 많은 동양인 교회가 미국 주류교계에 영향을 못 미치고 있지 않습니까?
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수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찬양은 흑인 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신학교에서도 흑인 설교학을 공부합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부르는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는 원래 라틴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남미의 한 지역에서 음란한 삼바 축제가 열릴 때,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며 도시를 돌면서 부른 노래인데, 이후 그 지역에서 삼바 축제가 근절됐다고 합니다. 현재 이 노래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이 함께 부르는 찬양이 됐습니다. 한인들도 미국교회에 영향을 미칠만한 유산들을 학문적으로 잘 연구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한인교회 안의 KM과 EM이 소통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EM들이 친구와 동료 등 피어 그룹을 통해 한국적 기독문화를 확산시켜 가면 한인교회가 미국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저로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한인교회가 역사를 소중히 여겼으면 합니다. 미국은 자기 교단과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기록하고 유산으로 남기려 합니다. 우리는 개교회든 교단이든 역사를 남기는 작업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 연구가 교회에 끼칠 수 있는 또다른 긍정적 면이 있을까요?
역사는 좌표를 읽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어떻게 섭리해 오셨고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응답하는지를 알아내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찾게 해 줍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편적으로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학을 통해 현 위치를 찾게 되면 누가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노틀담대학교의 역사학자 마크 놀 교수는 “역사는 서술함에 있어서 신학적 판단을 유보하지만 우리는 진리,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역사적 진실과 진리가 밝혀지면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 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배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현 한인교회의 좌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매우 안타깝고 조심스럽지만, 솔직히 말해 표류하고 있다고 봅니다. 급변하는 신학, 미국 사회와 문화, 1.5세와 2세들의 교회 주축세력으로의 성장, 목회자의 세대교체, 이민과 교회 구성원의 변화 등과 같은 내외부적 요인들을 조율하여 미래를 건설하는 일에 대체로 속수무책인 듯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서로간에 심각한 몰이해를 겪고 있으며 성도와 성도간에도 심각한 몰이해가 있습니다. 몰이해는 불신이 되어 가고 있고 이것이 걷히지 않는 한 표류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저는 한인교회 내에서 사역하는 협동목사 혹은 부목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사역하는 이분들이 적극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역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교회에 대한 헌신과 깊은 사랑으로 한 교회의 신학을 정립하고 말씀의 깊이를 더해 가며, 현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는 작업들을 해 나가야 합니다. 결코 잠시 머물면서 적당히 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인교회의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교회의 본질적 영광스러움은 하나님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민교회에 일고 있는 각종 어려움들은 사단이 하는 일이지만 대장되신 예수께서 그들을 밟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한인교회는 기본적으로 미국교회에 비해 아직 복음주의적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한인교회가 어렵다고 해도 미국교회보다는 희망적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네. 목사님. 인터뷰에 감사합니다.
다섯번째 인터뷰는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공부 중인 한동수 목사다. 한 목사는 연세대 법학과를 다니던 중 4학년 때 소명을 받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해 M.Div.를 마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부목사로 목회하던 2000년대 초, 급변하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며 다음 세대 목회를 위한 대안을 찾고자 고민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고든콘웰신학교에서 신약으로 Th.M. 학위를 받고, 교회사 분야로 M.A. in Religion을 수료한 후 시카고로 와 트리니티신학교에서 교회사로 Ph.D. 중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갈보리교회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청년 컨퍼런스인 코스타와 킹덤의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목사님께서 유학을 결심하게 된 배경부터 알고 싶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이 변화에 적응할지, 이 변화를 거부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교회 성장을 이뤄냈던 1세대 목회자들이 은퇴하는 상황에 겹쳐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있었습니다. 2세대 목회자들은 성장세를 유지해 가야 한다는 부담과 함께 뭔가 쇄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절박감은 성장하는 미국교회의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약화된 강단’의 문제를 ‘프로그램’이라는 겉포장으로 싸는 미봉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런 식은 아니다”란 생각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문제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부목사로 훈련을 받으면서도 내가 담임이 될 3세대를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강단이 제대로 세워져야 하는데 솔직히 신학대학원에서 3년간 배운 것으론 부목회 몇년만에 밑천이 다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교회사 연구가 목사님의 문제 의식에 어느 정도 답을 주었습니까?
저는 19-20세기 미국교회 역사를 연구 중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미국교회에 관해 배울 길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근현대교회사를 배우긴 하는데 주로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역사를 간략하게 다루고, 미국 역사는 근본주의 논쟁 정도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시작부터 미국의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교회사를 배우면서 ‘미국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미국의 기독교 운동’들이 갖는 의미와 흐름을 이해하게 되고 이것을 한국적 상황에 대입해 보게 됐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는 미국적 상황에서 일어난 이 운동을 한국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미국적 상황이란 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것이 한국적 상황에 어떻게 대입되던가요?
한 예만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사회는 독립전쟁을 치르고 19세기에 들어서며 민주화되어 갔습니다. 사회가 민주화 되었고 교회도 민주화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권위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고 평신도들이 깨어났습니다. 평신도 설교자들이 나타났고 각종 부흥 모임이 생겨 났습니다. 물론 이 물결을 타고 이단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활발한 변화 가운데 그 영향이 20세기까지 지속됐으며 19-20세기의 각종 사회 운동들도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사회와 교회는 2백년동안 민주화와 이에 따른 각종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발전해 온 것이죠.
그러나 한국에 민주화가 일어난 것은 언제인가요? 1980년대 이후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민주화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목사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교회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서 평신도라는 계층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20년, 더 길게 잡아 봐야 30년입니다. 30년간 경험한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가 2백년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시켜 온 미국교회의 평신도 관련 프로그램을 그대로 도입했을 때 문제가 안 생길 수 있을까요? 미국교회와 비교할 때 사상적으로는 19세기의 것을 가진 한국교회가 프로그램은 20세기의 것을 따라 가려니 각종 문제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더구나 그 프로그램들을 수용함에 있어 진지하고 종합적인 신학적 고찰마저 부재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평신도 훈련 프로그램 외에도 교회성장학 등 다양한 부분에서 한국교회가 현재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교회의 리더로 세우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들이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사역하고 참여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소그룹 리더가 되고 새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는 그것이 지나치게 단계별 학습화 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 과정만 다 마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목회자들은 각종 교회 성장 프로그램에 투입할 평신도 리더들을 양산하는데 급급한 것 같고,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리더로 세우면서 목회자의 고유한 직능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한 깊은 신학적 고민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만약 평신도가 목회자와 같아진다면 누군가가 “그럼 설교하는 것 외에 목회자가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 셀교회, 가정교회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이것도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론에 관한 것이기에 조직신학자들이 더 잘 논의할 문제이지만 제 생각에 이런 용어들보다는 소그룹 혹은 구역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경의 근거를 따라 전통적 교회론을 주장하는데, 교회는 말씀과 성례, 권징이 있어야 하고 목사와 같은 직능 체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셀이나 소그룹 조직에서 말씀과 성례, 권징이 모두 이뤄지나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교회라 부릅니다. 목회자가 목회자의 직능을 셀교회와 셀교회 리더에게 위탁했다면 그것이 목회자가 대기업의 CEO로서 하부 조직을 관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목사가 한마리 양을 대하듯, 성도들을 직접 대하고 양육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970년대 한국에 들어온 로버트 슐러나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도 대형교회에 대한 번영신학을 확산시켰으며 목회자들 안에 메가처치에 대한 간절한 환상을 심어 놓았습니다. 저는 앞서 말한대로 목회자는 성도를 직접 돌보고 양육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담임 목회자가 직접 성도를 양육할 수 있는 수가 넘어가면 교회를 분립개척하면 됩니다. 오늘날 일고 있는 셀교회, 가정교회 시스템은 대형교회가 교회 관리를 위해 도입한 고육지책이라 봅니다. 목회자의 능력에 따라 성도가 2백명이든 3백명이든 직접 양육하며 리더를 세워가고 그 한계 수치를 넘을 때는 부목사 등을 통해 새 교회를 개척하면 굳이 쩔쩔매며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교회들은 목회자들이 리더를 세운다는 미명 아래 목회자에게 직접 맡겨진 목양의 의무를 평신도들에게 지우고 있습니다. 인원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모든 리더는 목회자가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간 리더가 그 다음 하부 리더를 세우는 시스템을 반대합니다. 목회자가 평신도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 그 평신도들이 목사와 같은 신학적 지식과 목회철학을 갖고 그 다음 리더를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리더를 목사가 직접 세워야 합니다.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3-4백명 정도가 목회자가 성도를 직접 양육할 수 있는 한계라고 봅니다. 그리고 부교역자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라면 5-6백명 정도까지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1-2천명이 되면 담임목사가 직접 성도들을 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소그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옛날 한국교회가 갖고 있던 구역조직, 속회조직에 큰 의미를 둡니다. 구역장들은 사랑과 열심을 갖고 구역원들을 심방하고 챙겼으며 이웃들을 전도하는 일에도 열심이 있었고, 특별한 신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기도하며 그들의 상황을 목회자와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자칫하면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가교 역할을 잘해 준 것이죠.
-목사님은 미국의 은사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을 연구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교회의 은사주의가 한국으로 도입되며 어떤 결과를 낳았다고 보십니까?
미국 은사주의 운동 역시 한국처럼 신비한 은사와 기적을 중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 전반에 흐르는 이성주의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은사주의 운동은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신앙인 샤머니즘과 만났습니다. 이 샤머니즘적 요소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수용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그 선을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무속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1백일동안 기도하는 것과 기독교인의 40일 작정기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40일 기도를 함에 있어서 성경적 근거를 가져 오지만 우리가 가진 정서에는 샤머니즘의 영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아프면 꼭 담임목사가 병원을 찾아가서 심방을 해야 합니다. 부목사들이 수십번 다녀 가도 담임목사가 한번 간 것만 못하다고 성도들이 느낍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작은 무당과 큰 무당이 있어서 큰 무당이 한번 굿을 해야 문제가 풀린다고 믿습니다. 목회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런 것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은사주의가 샤머니즘과 결합하게 됐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교회에서 은사주의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유는 아시아의 정서와 문화 속에 있는 샤머니즘적 요소 때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우는 샤머니즘과 결합된 은사주의가, 민주화를 겪으며 흔들리는 교회 강단을 만났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기본적으로 교단을 불문하고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은 철저히 강단 중심적입니다. 민주화 전에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에 어떤 불만도 가질 수 없었고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민주화에 대한 바람이 불자 목회자의 말씀에 비평을 제기하게 됐습니다. 이 혼란 가운데 교회는 무슨 대안을 찾아야 했고 답은 두가지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먼저는 다시 말씀의 깊이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잡기에 수년, 수십년 전 신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재교육을 받을만큼 목회자들에게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 상황의 불가피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평신도 리더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의 깊이를 잃어가고 평신도들은 리더가 되어 가는 이 상황에서 목회자가 권위를 찾는 길은 바로 ‘신비한 능력’이었습니다. 미국교회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미국에서 나온 현대 교회 성장 프로그램들은 모두 성령의 능력과 체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교회 성장에 성령의 능력은 필수라고 볼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체험과 기적이 없으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권위가 안 서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무너진 강단을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의 회복보다는 은사주의에서 비롯된 신비한 능력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교회의 민주화와 강단의 권위 약화에 대해 은사주의적 요소로 해법을 찾아 왔다는 말씀이십니다. 미국교회의 경우 한국보다 훨씬 긴 민주화의 기간을 가졌는데 미국교회는 민주화와 강단의 권위 약화가 일어날 때 어떤 식으로 대처했나요?
앞서 말한대로 우리가 30년만에 적응해야 했다면 미국은 수백년에 걸쳐 이 문제에 적응했습니다. 물론 미국교회도 현상적으론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평신도 설교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평신도 설교자들이 권위적인 목회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역을 인정받는 수단은 신비한 능력과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메인라인 교단들 안에서는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건전한 인식은 있었지만 목사의 권위 회복을 위해 은사주의의 요소들을 도입하지는 않았습니다.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은사를 중시하고 강단을 경시하는 풍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역으로 미국교회는 더욱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사용하여 더욱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은사주의 운동이 모든 교단으로 퍼져나간 후에도 은사주의가 미국사회의 주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교단은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성경연구를 강조했고, 현재에도 미국 내 주요 교단들의 목사 안수를 위한 자격시험은 꽤 수준높은 성경강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권위의 문제에 관해서는, 민주화에 따른 평신도들의 역할이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책 자체를 존중히 여겨주는 문화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행사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짧은 민주화 역사 가운데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관한 해답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은사주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태로 발전해 갔군요.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미국 오순절교회는 독자적 노선을 갖고 있었지만, 대공황과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거센 도전 등으로 교회가 급속도로 혼란스러워지고 성도들의 영적인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교회는 그것을 타개할 방법을 찾게 됐고 오순절의 은사주의를 받아들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이적과 기사, 능력이 혼란스런 영적 상황을 극복할 요소로 인정 받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의 장로교는 장로교답고 감리교는 감리교답고 침례교는 침례교답습니다.
한국은 은사주의가 도입되면서 교단의 벽이 무너지는 형국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강단의 권위와 평신도의 권위를 지지할 수단으로서 은사주의를 필요로 했고 모든 교단이 그것을 수용했습니다. 게다가 은사주의 운동과 짝을 이루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은 교단의 신학과는 무관하게 여러 교회들이 받아들입니다. 장로교 신학을 고수한다고 하면서 침례교회의 프로그램을 가져 오고, 교회의 직분과 직책들도 의사결정기구를 제외하고는 교단간 서로 비슷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새들백이나 윌로크릭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학과 프로그램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전 의문스럽습니다. 저는 교단의 벽을 절대 사수하자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작업은 거친 후에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게 대세니까 따라 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러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 혹은 아니다”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비판적 수용은 곧 교회의 전통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결국 한국에 은사주의가 무분별하게 도입된 것이나, 각종 프로그램의 범람은 말씀의 권위 약화와 직접 관계가 돼 있고 이것은 또 교회의 민주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미주 한인교회의 문제로 넘어 와서, 한인교회 역시 한국교회와 비슷한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담임목사와 평신도 간에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새로운 담임목사가 왔을 때 평신도들이 담임목사에게 적응할 것인지, 아니면 담임목사를 적응시킬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평신도들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서도 짚어야 할 것들이 많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목사들의 책임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성도들을 잘 양육할 책임도, 변화시킬 책임도, 결국 목회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민교회의 아픔의 원인을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가지 공통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목회자들이 강단의 권위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민 목회자들은 대부분 이민 온지 오래된 분들이며 이민목회 가운데 재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공부한 것과 과거의 문화에 젖어 목회를 하는 가운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성도들은 사회 속에서 변화를 겪는데 목회자들만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면 강단의 권위가 도전받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특히 요즘 이민 오는 분들은 고학력자들로 사회적 지위가 어느정도 있는 사람들인데다가,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한국 목회자들의 지적 수준을 경험했고, 인터넷 등을 통해 수많은 설교를 들었을텐데 이민 목회자들을 만났을 때, 마치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민교회 목회자들의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뼈아픈 현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태도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이민 목회자들의 일방적인 책임도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목사들에게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도들 편에서 볼 때 이민자들의 사회적, 심리적 상황이 고려될 수 있습니다. 이민자는 한번 조국을 떠나본 사람이며, 고향도 등져 본 경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꿈과 목표가 있다면 언제든지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리적으로 떠나고 떠나 보내는 것이 낯설지 않게 된 것입니다. 교회도 한번 떠나는 것이 어렵지 두번 세번 떠나는 것은 쉽습니다. 이민교회 안의 수평이동 현상은 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로는, 교인들의 신앙성숙도입니다. 이민자들이 미국에 와서 교회를 찾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정착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펠로십을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3-4년이 지나면 진정한 회심이 없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게 되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목회자에 대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어떤 계기로 교회에 오게 됐건 교회에 왔다면 그들을 참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해낼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으면 되는데 그게 부재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문제가 그렇다 해도 목회자가 말씀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먹이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갓 부임해서 교회 안에 보이는 부조리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 첫걸음은 1년이건 2년이건 말씀으로 성도를 먹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을 들으면서 신뢰를 갖게 되고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그 후에 하나하나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말만 잘하는 설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깊은 성경 연구를 바탕으로 한 통찰력 있는 말씀을 온 마음으로 전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인들은 직책 자체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바는, 목사의 권위가 오직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데에서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은 “목회자가 스스로 선포한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그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합치된 삶을 살기 위해 씨름하고 있는가”를 늘 확인하며 목회자들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의 민주화에 어떻게 적응해 가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이라 볼 수 있겠군요.
사실 꼭 민주화에 대한 적응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 이미 민주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침례교회의 회중정치, 장로교회의 장로정치가 모두 민주적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안에 민주화가 기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민주화에 대한 이해가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온유는 자신이 가진 권위와 능력을 컨트롤하는 능력입니다. 내가 결정권이 있으니까 내 맘대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능력을 완벽히 컨트롤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게 바로 정의다”라면서 그 권위를 마구 남용합니다. 성경도 장로 제도를 말하고 평신도 역할을 강조하지만, 자기 권위를 남용하라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미국교회사를 연구하시는 입장에서 미국교회 안의 한인교회가 어떻게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현재 한 교회 안의 KM과 EM이 상호불가침의 영역을 갖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 것이 이 기여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세도 2세로부터 배워야 하고 2세도 1세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자 간에 공식적 채널이 있어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합니다. 한인교회들은 KM과 EM을 서로 분리시키고 있는데 그 기준이 신학이 아니라 언어와 정서입니다. 특히 서로의 문화에 대해 신학적으로 적합하지 않거나 그르기 때문에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서적으로 맞지 않으니 그저 불간섭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예배 형식이나 찬송 등에 대한 교회적 차원에서의 신학정립이 되지 않은 채 “KM은 CCM이 불편하니까 안 부른다, EM은 찬송가가 불편하니까 안 불러도 된다” 이런 식입니다. 담임목사와 1세 사역 담당자, 2세 사역 담당자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신학적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역사적 자산으로 남겨야 합니다. 한인 1세들은 언어 문제와 타민족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소극적 정서 때문에 미국교회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세들은 1세의 유산을 갖고 있으면서 언어나 적극성 면에서 1세보다 유리하기에 한인과 미국 간에 좋은 가교가 될 수 있습니다.
-한인교회 뿐 아니라 많은 동양인 교회가 미국 주류교계에 영향을 못 미치고 있지 않습니까?
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수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찬양은 흑인 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신학교에서도 흑인 설교학을 공부합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부르는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는 원래 라틴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남미의 한 지역에서 음란한 삼바 축제가 열릴 때,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며 도시를 돌면서 부른 노래인데, 이후 그 지역에서 삼바 축제가 근절됐다고 합니다. 현재 이 노래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이 함께 부르는 찬양이 됐습니다. 한인들도 미국교회에 영향을 미칠만한 유산들을 학문적으로 잘 연구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한인교회 안의 KM과 EM이 소통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EM들이 친구와 동료 등 피어 그룹을 통해 한국적 기독문화를 확산시켜 가면 한인교회가 미국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저로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한인교회가 역사를 소중히 여겼으면 합니다. 미국은 자기 교단과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기록하고 유산으로 남기려 합니다. 우리는 개교회든 교단이든 역사를 남기는 작업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 연구가 교회에 끼칠 수 있는 또다른 긍정적 면이 있을까요?
역사는 좌표를 읽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어떻게 섭리해 오셨고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응답하는지를 알아내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찾게 해 줍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편적으로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학을 통해 현 위치를 찾게 되면 누가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노틀담대학교의 역사학자 마크 놀 교수는 “역사는 서술함에 있어서 신학적 판단을 유보하지만 우리는 진리,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역사적 진실과 진리가 밝혀지면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 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배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현 한인교회의 좌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매우 안타깝고 조심스럽지만, 솔직히 말해 표류하고 있다고 봅니다. 급변하는 신학, 미국 사회와 문화, 1.5세와 2세들의 교회 주축세력으로의 성장, 목회자의 세대교체, 이민과 교회 구성원의 변화 등과 같은 내외부적 요인들을 조율하여 미래를 건설하는 일에 대체로 속수무책인 듯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서로간에 심각한 몰이해를 겪고 있으며 성도와 성도간에도 심각한 몰이해가 있습니다. 몰이해는 불신이 되어 가고 있고 이것이 걷히지 않는 한 표류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저는 한인교회 내에서 사역하는 협동목사 혹은 부목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사역하는 이분들이 적극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역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교회에 대한 헌신과 깊은 사랑으로 한 교회의 신학을 정립하고 말씀의 깊이를 더해 가며, 현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는 작업들을 해 나가야 합니다. 결코 잠시 머물면서 적당히 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인교회의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교회의 본질적 영광스러움은 하나님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민교회에 일고 있는 각종 어려움들은 사단이 하는 일이지만 대장되신 예수께서 그들을 밟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한인교회는 기본적으로 미국교회에 비해 아직 복음주의적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한인교회가 어렵다고 해도 미국교회보다는 희망적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네. 목사님. 인터뷰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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