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위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첫번째 인터뷰는 트리니티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학을 공부 중인 이돈하 목사다. 이 목사는 서강대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대학원에서 M.Div., 트리니티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학으로 M.A.를 마쳤으며 현재 Ph.D. 과정에 있다. 대학생 시절에는 IVF와 서강대 기독지체연합 활동에 헌신했고 총신대 졸업 후, “꿈틀거리는 어린이 설교”를 저술했다. 시카고에서는 M.A. 과정 당시 윌로크릭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인턴을 수행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 현재는 시카고한인교회에서 4년 반동안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목사님은 기독교 교육 분야로 계속 공부해 오셨는데 이 학문이 목회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기독교 교육은 신학 분야 중에도 실천신학에 가까운, 더 현장적인 학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요즘 평생교육이 사회적 이슈인데 교회만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없습니다. 유년부터 노년까지의 모든 교육이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 교육의 목표는 “어떻게 사람을 신앙으로 변화시킬 것인가”입니다. 한국에서 주일학교 사역을 해 보면 학생들에게 영적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수련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 학생들이 순간적으로 변화되는데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원점으로 돌아 온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이 문제의 원인을 고민하다 기독교 교육 분야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신학 교육과 목회 현장의 괴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극단에서는 현장 사역과는 거리가 먼 이론 중심의 교육이 이뤄지고 또 한 극단에서는 성경적 근거 없이 프로그램 위주로만 사역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론과 실천이 통합되는 그런 모델이 필요합니다. 트리니티의 기독교 교육학은 양자를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오래 전부터 기울여 왔고 기독교 교육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교수들이 많습니다.

-교육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의 신학적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이 두 관점 다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주의적 기독교 교육의 문제는 학습자의 심리적, 사회적 상황을 지나치게 반영하다 보니 성경적 근거가 약해질 수 밖에 없고 근본주의적 기독교 교육은 학습자의 배경을 무시하고 성경적 지식만을 주입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와 학습자의 상황을 무시하고 성경만을 강조하면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성경을 배격하면 하나님의 메시지가 약화되는, 양극단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양자 간의 통합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완전한 충족은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입니다. 계시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 나뉩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이고 일반계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의 법칙과 질서를 통해 하나님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본주의적 신앙교육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근대 진보주의적 종교교육은 사회 과학적인 방법론을 지나치게 의지하면서 말씀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복음주의 교육학계를 중심으로 리서치, 인터뷰, 케이스 스터디 등 사회과학적 방법을 이용하면서도 동시에 성경에 보다 충실한 기독교 교육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교육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면서 성경적인 면에서는 미약했으며 이 점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이란 분야는 리서치나 인터뷰, 케이스 스터디 등이 강조되는 분야이기에 기독교 교육 역시 사회과학이 사용하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적인 방법론을 찾아 가자는 움직임이죠.

-트리니티신학교 접근법은 뭔가요?

트리니티신학교는 서부의 탈봇신학교, 침례교 계통 학교인 사우스웨스턴, 서던신학교와 함께 복음주의, 보수주의 기독교 교육학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학교입니다. 트리니티신학교가 지난 20여년간 강조해 온 분야는 모두 현장 목회와 관계된 트랙들입니다. 따라서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관한 고민에 진지하게 접근합니다.

역시 위에서 말한 양 극단의 통합 문제입니다. 성경과 과학을 통합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분야를 나름대로 정리한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육은, 모든 교육이 추구하는 바가 동일하지만,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전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메시지를 성경적으로 전하되, 이것을 학습자의 사회적, 심리적 상황에 가장 알맞은 과학적 연구와 방법론을 통해 전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좀 소개해 주십시오.

교육의 방법에 관해 먼저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형식적 교육(Formal Education)입니다. 이것은 교육자의 권위가 지나치게 강조되며 학습자는 교육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식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 우리들이 한국에서 받은 교육은 대부분 형식적 교육입니다. 한국은 유교주의 문화와 일제의 교육 문화, 군사정권 시절을 지나면서 학습자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존재로 인식됐습니다. 따라서 교육자는 학습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치중했습니다. 미국의 교육도 존 듀이가 나오기 전까지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교육이 변화된 것도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이 지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형식적 교육이 교회에 적용된 방식은 맹목적인 성경 구절 암송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가르쳐 주지도 않고 요절을 많이 외우면 신앙이 좋은 것이고 성경 지식이 많은 것이고 영성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런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운다고 그의 삶이 변화되는가? 성경적 지식이 많다고 해서 그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는가입니다.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관이 미국 유학파들을 통해 한국에 전해지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교육계에는 열린 교육에 대한 관심이 점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열린 교육의 극단적 형태를 무형식적 교육(In-formal Education)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사람이 문화에 적응하는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 자체를 교육이라고 부르는 관점으로서, 인위적 교육을 완전히 배격합니다. 어린이들이 크면서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우듯 모든 교육은 그렇게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며 교육자는 학습자가 이런 배움을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입니다. 이 교육은 형식적 교육과 정반대로, 교육자가 아닌 학습자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교육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것을 성경적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부모가 부지런히 자녀들을 가르치라고 돼 있지 그냥 놔 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저절로 신앙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형식적 교육(Non-formal Education)입니다. 이것은 미시건주립대 교육학 교수인 테드 워드(Ted Ward)가 주창하는 방식입니다. 워드 교수는 미시건주립대 교수 시절부터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 교육을 고민해 왔으며 트리니티신학교로 옮겨 이 분야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올해 80세인 그는 트리니티신학교의 기독교 교육은 물론 트리니티 전체의 신학 교육의 토대를 세웠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크게 기여했으며 비형식적 교육을 어떻게 교회에 적용시킬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형식적 교육은 교육자와 학습자가 상호작용을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형식이라 볼 수 있으며 제가 볼 때 가장 성경적 교육 모델입니다. 교육자는 학습자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학습자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 주며 그의 학습에 참여합니다.

여기서 교육자는 형식적 교육에서 말하는 척척박사도 아니고 무형식적 교육에서 말하는 소극적 협력자도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학습자의 상황 속에 들어가 그와 함께 이루어 가는 교육입니다. 이것은 “성육신적 교육(Incarnational educational model)”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2장 7-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내려와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셨고 하나님이 다시 그를 높여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교육자는 학습자의 상황으로 내려와 학습자와 눈높이를 맞추고 상호작용을 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즉, 성숙하고 진정한 교육자는 학습자 앞에 겸손할 수 있어야 하고, 학습자를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된 교사상을 찾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나치게 교사의 권위를 강조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학습자의 기호를 맞추려다 보니 현재 우리들의 교육현장은 겸손과 방향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자의 겸손한 태도와 방향성을 강조하는 교육이 바로 비형식적 교육입니다. 영성 교육학자 파커 팔머(Parker J. Palmer)의 말대로 “교육자와 학습자가 모두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서서 성령 앞에 순종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라 생각됩니다.

50분간 제자 훈련을 하면서 목회자가 혼자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성도들이 자기 경험만 말하는 것도 아닌,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성령 앞에 겸손해지는 것으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트리니티 기독교 교육학이 말하는 양극단의 통합은 성령이 주인되신 비형식적 교육철학 위에 성경과 과학을 통합시켜 이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형식적 교육을 교회에 도입했을 때, 인간의 전인적 변화라는 교육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의 진리는 “선포되는 진리”이므로 학습자의 상황과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와 교회들이 형식적 교육 방식을 도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울로 프레리를 예로 들어 본다면, 그는 브라질 군사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며 감옥생활을 하다 미국으로 와서 일반 교육은 물론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는 브라질 농촌의 문맹을 개선하는 데에 큰 교육적 공을 세웠습니다. 군사정권은 체제 유지를 위해 농민들의 교육 기회를 차단했습니다. 프레리의 농촌 문맹 퇴치 운동은 그들의 삶을 듣고 나누며 글자를 가르치는 식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는 농민들이 삶에서 권리를 약탈당한 경험을 듣고 그 경험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 함께 나누고 설명해 준 후 그것을 ‘권리’라는 단어로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권리라는 단어를 읽을 줄 몰랐지만 프레리와 대화하고 경험을 나누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며 ‘권리’라는 단어를 읽고 쓰고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단 일주일만에 프레리가 가르친 농촌의 문맹이 폭발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교육 역시 과거 군사정권들이 사용했던 식의 ‘뱅킹 어프로치 (Banking approach)’로는 안됩니다. 은행에 적금하듯 왜 배우는지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지식을 머리 속에 꾹꾹 눌러 담으면 언젠가는 뽑아서 그 지식을 사용할 날이 온다고 믿는 주입식 교육으로 건강한 신앙과 가치관이 전수되긴 어렵습니다. 학습자가 무비판적으로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학습자는 흥미를 잃고 창의력이 없어지며, 시켜야만 억지로 순종하는 기계들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교육은 생명이 없고 변화가 동반되지 않습니다.

교회 교육도 학습자와 교육자가 함께 신앙의 경험을 나누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해 가는 식으로 개선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교육자는 학습자의 경험을 듣고 학습자가 그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프레리의 사례를 통해 좀더 실질적으로 접근해 보면, 성경지식을 맹목적,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들이 이미 갖고 있는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고 유기적으로 이것을 성경 말씀과 연결시켜 준다면, 문맹이 폭발적으로 개선됐듯,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기대와 호기심, 참여율이 높아지고 삶에서 실천해 보고자 하는 강한 동기가 유발될 수 있습니다.

목회에 접목시켜 본다면, 교육자 역할인 목회자들이 심방을 통해서 학습자 역할인 성도들을 찾아 가서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그들의 경험을 듣고 그것을 성경적인 내용으로 연결시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때 생전 처음 듣는 성경 구절이나 단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 가정과 직장에서 느끼고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성경은 그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접근한다면, 성도들의 귀에 들리며 삶을 변화시키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동일한 관점을 설교에 접목시키면 성도들이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예화를 설교에 반영하고 이것을 성경과 유기적으로 조직시킬 수 있는 설교가 큰 교육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즉 탁월한 설교자는 성경과 성도들의 경험을 공교하게 붙이고 기워낼 수 있는 바느질의 명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의 형식도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매주는 힘들더라도 분기에 한번 정도 토크쇼나 연극, 영상을 통해 설교 전에 문제를 제기하고 설교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토픽은 성도들이 날마다의 부딪히는 실제적인 이슈가 좋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 신앙의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직장은 물론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구체적인 유혹과 갈등과 도전들을 연극이나 영상, 구체적인 예화로 끌어내고, 이것을 다시 말씀으로 풀어낸다면 예배 때 조는 일은 경청하는 것보다 힘들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목표는 사람의 변화라고 하셨는데 이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바뀌려면 전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아니라 문화 심층에 있는 세계관,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전에는 세계관이라고 하면 자본주의 세계관, 사회주의 세계관 등 지적 측면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은 감성적인 면, 행동적인 면에서도 세계관을 나누어 보기도 합니다.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세계관 변화라는 주제로 넘어 오면, 교회는 설교를 통해 지적인 면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면에서는 예배 의식, 성례전, 찬양을 통해서 세계관이 전해지며 사람이 변화됩니다. 행동적 면에서는 선교 여행이나 전도를 하며 변화되어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육의 방법론에 관해 과학적, 이론적으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성경과 연결시키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양자를 연결시키겠습니까?

기독교 교육의 목표는 말씀드린대로, 사람을 전인적,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과학적 통계와 이론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은 모두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셨나를 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교사상이 있고 교육의 방법론이 있습니다. 지금은 타계하셨지만 윗튼대학교의 르바(Lois E. LeBar) 前 교수 같은 인물이 이 분야의 대표적 학자입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는 것이었으며 섬기는 것이었고 듣는 것이며, 비형식적 교육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나 니고데모와의 대화시 예수님은 문제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그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으로 교육을 시작하십니다. 그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가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진 고민과 질문을 이해한 후, 그것을 역이용해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삶에서 처한 상황을 예로 삼아 신앙적 개념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백합화의 비유, 참새의 비유는 모두 그 시대 사람들이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예화였습니다. 70인 전도대를 파송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교실 밖의 체험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교육자였으며 12명의 제자들을 양육하시는 모습을 통해 스몰 그룹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교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비형식적 교육 방식이 예수님의 방식이며 가장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이 설명에 한가지 첨언한다면 비형식적 교육이 성경적이란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 교육에 비형식 교육적 측면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교육은 교육자와 학습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교육자는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요즘 어린이와 성인 그룹을 막론하고 기독교 교육 커리큘럼의 전반적 경향은 먼저 학습자의 경험을 나누게 함으로써 호기심과 동기를 유발하고 그것을 서로 토론한 후에 실천할 내용을 찾고 그것을 실천한 후 또 토론하는 식으로 많이 변화돼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교육자 위주의 교육에서 학습자 위주의 교육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현 추세를 증명해 줍니다.

선교지에서도 이런 경험을 얻었습니다. 현지인의 경험과 토착문화를 배려하지 않고 주입하려는 교육이 교회를 수적으로 부흥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삶의 변화에는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문화의 껍질을 벗기고 나면 어느 문화에서나 통하는 초문화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어느 쪽이 좀더 우월하고 열등한지를 이야기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최선인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말씀 앞에 변화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며, 그래서 현지인들의 경험을 경청하고자 하는 선교사에게 현지인들은 마음을 엽니다.

-한인교회에 이런 교육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유교적 문화나 군사정권의 잔재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문제의 원인을 찾기보다 목회자들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좋겠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먼저는 학습자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일입니다. 나의 교인들에 관해서 그 교인이 까다롭건, 모범적이든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는 언행일치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선포하는 메시지와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을 보는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라고 설교했으면 실천을 성도들의 몫으로만 맡기지 말고 성도들과 함께 마켓에 나가 전도하고, 단기선교를 떠나서 복음을 외치는 실천이 동반될 때 그 설교는 능력이 있고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처한 문제 가운데 이 교육의 문제를 가정 안으로 가져 오면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배우고 느끼는 교육도 가능하겠지요?

1세대와 2세대의 문화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민교회의 교육자들은 양쪽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해를 넘어서 양 문화의 가교 역할도 해야 합니다. 문화를 뛰어 넘어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반성이 부단히 이뤄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민가정의 경우는 부모가 자녀를 가르친다는 생각보다는 서로를 통해 함께 배운다는 개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을 얕잡아 볼까 걱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상호 작용을 통해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집니다.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각자 문화를 가르쳐 준다면 자녀는 부모를 한국문화를 잘 아는 교육자로 받아들이지 결코 권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서로 윈윈하며 양쪽 문화를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할 줄 알고 서로의 고민도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자녀는 “나는 부모에게 중요한 사람”이란 존중감을 갖게 됩니다. 이민자 부모의 모든 고민을 자녀에게 털어 놓을 수도 없고 털어 놓아서도 안되지만 일부분을 공유하면서 같이 기도하고 대화하면 자녀는 부모를 더욱 신뢰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신앙전수나 믿음생활의 문제로 넘어가면, 믿음은 가치관의 전수인데 이 가치관의 전수를 위해서는 양자 간에 정확한 의사소통이 필요하겠지요. 상식적으로는 1세들이 영어를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2세들이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 신앙이 잘 전수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흥미있는 연구 결과는 정확한 언어 사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양자 간의 사랑과 신뢰라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영어 사용에 어려움과 불편이 있더라도 자녀와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들이 영어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자녀들과 관계가 나쁜 부모들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신앙을 전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전수에 있어서 부모와 자녀의 의사 소통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양자 간의 사랑과 신뢰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

1세 목회자와 2세 목회자의 계승 문제도 언어보다는 신뢰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불편함과 서로 간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민목회는 1세와 2세 목회자들이 상호 의존하지 않고서는 반쪽 목회, 절름발이 목회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쌍방이 알기에 서로가 가진 장점을 배우고 싶은 깊은 동경이 있다는 것을 캐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갈망을 알고 서로가 용기를 내어 다가가면 1세와 2세 목회자들의 간극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빅맥 하나라도 함께 먹으며 서로의 어려운 일을 이야기 하거나 함께 땀흘려 운동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서로에게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성이 더욱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쌍방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상호 멘토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다고 불평하거나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함께 교제하고 신뢰를 쌓아간다면 1세와 2세 목회자 각각이 가진 고유한 영성은 서로에게 건강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인터뷰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