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평신도가 건강한 교회를 만든다. 지난 2년간 한국 신학을 미국에 소개하는 사역을 자처해 온 한국기독교연구소(CSKC, The Center for the Study of Korean Christianity)가 시카고 지역의 평신도들을 위한 신앙강좌를 8주에 걸쳐서 연다. CSKC는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의 한인 교수들과 유학 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이후, 20여 차례에 걸친 월례 포럼과 각종 행사를 통해 한국 신학의 자리와 미국 신학과의 대화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민해 왔다. 주로 신학자와 신학생, 목회자들이 참여하던 CSKC가 사역을 평신도에게 여는 이유는 ‘강단에 갇힌 신학’을 넘어 평신도들의 성숙한 신앙 생활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삶 속의 신학’을 찾기 위해서다. 이번 강좌는 한국의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신앙과 삶의 조화를 모색했던 선배들의 삶을 함께 공부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이 8주간 공부하게 될 신앙의 선배들은 한경직, 김창준, 최문식, 최흥종, 강양욱 목사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들은 각자 사상과 목적, 방법이 달랐지만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뚜렷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 가운데 좌우가 극하게 대립하던 시기를 살던 이들은 한쪽에서 보면 빨갱이고,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수구세력이지만 정치적 노선을 떠나 사회적 혼란기에 신앙과 인간의 삶을 고민한 목회자란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대표적 목회자로 숭실대와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평북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으나 한국전쟁을 겪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후, 영락교회를 설립하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됐다. 그는 교회 사랑, 민족 사랑, 하나님 사랑을 일생의 모토로 삼고 교회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목회자로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았다. 그의 목회는 교회에만 갇히지 않아 학교, 병원, 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사회 봉사와 복음화 활동을 했다.
김창준 목사는 독립운동가 33인 중 1명으로 시카고와는 친숙한 인물이다. 감리교 학교인 한국 협성대와 게렛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3년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의 초대 목회자로 사역한 바 있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감리교신학교 교수직도 역임했다. 그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주주의 실현을 주장하며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했으나 기반을 형성하지 못하고 1948년 월북했으며 1959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해답으로 제시했던 기독교 운동가였으나 현재 북한에서 김창준 목사의 삶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
최문식 목사는 1946년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일어난 10월 민중항쟁을 이끈 주역이다. 그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대구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며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협력하면서 좌파 정치노선에 가담하게 됐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민중이 주도하는 통일 혁명을 꿈꾼 인물이다. 그는 미군정에 반대하며 민중항쟁을 이끌었지만 이것이 동족 간의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본 후, 사태 협상에 나섰다. 결론적으로 그는 우파로부터는 빨갱이로, 좌파로부터는 변절자로 매도당하고야 말았다. 정치적인 면이야 어떻든 간에 그는 민중과 성도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인민군에 반대하며 많은 고초를 겪은 신앙인이었다.
최흥종 목사는 역시 평양신학교 출신이다. 그는 광주YMCA 총무를 지낸 기독교 사회운동가로 소록도에 나환자촌을 창설했다. 그는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뒷골목 깡패였으나 친구와 함께 선교사의 집에 들렀다가 광주의 첫 성도가 됐다. 그는 한국인 나환자를 돌보다 나환자가 된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자신도 나환자를 위해 인생을 헌신하게 됐다. 그는 삼일운동 때 시위에 참여하며 1년간 징역형을 살고 출옥한 후 목회자가 됐다. 해방 후 전남 건국준비위원장, 미군정 도정 고문을 맡았으나 다시 걸인과 나환자, 결핵환자를 위한 사역으로 돌아 왔다. 그는 부패해 가는 한국교회를 향해 1964년 12월 30일 경고문을 작성한 후 95일간 단식하다 세상을 떴다.
강양욱 목사는 평양신학교와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고 한다. 그는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의 육촌동생이다.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그는 김일성의 자문역을 맡게 됐으며 북한 정권 측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북한 내에서는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평안남도위원장,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최고인민회의 1~5대 대의원,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등 1983년 세상을 뜨기까지 요직을 지냈다. 1982년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으며 유해는 평양애국열사릉에 매장되는 등 북한 내에서는 상당한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
이 강좌는 4월 1일부터 시작돼 8주간동안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미드웨스트장로교회(1437 W. Oakton St. Park Ridge, IL 60068)에서 열린다. CSKC 관계자는 “다른 신앙적 관점과 배경을 가진 신앙인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이야기와 고민을 담아 내는 모임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 강좌의 교재는 한신대 연규홍 교수가 펴낸 “해방 공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 5인 5색(생명의 씨앗 & 터닝 포인트, 2007)”이란 책이다. 교재 없이도 참여가 가능하며 CSKC 연구원들이 각 인물에 대한 개괄적 소개를 한 후, 참석자들이 형식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식으로 강좌가 진행된다.
문의) 773-633-8112/ www.cskcstudy.org
이 8주간 공부하게 될 신앙의 선배들은 한경직, 김창준, 최문식, 최흥종, 강양욱 목사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들은 각자 사상과 목적, 방법이 달랐지만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뚜렷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 가운데 좌우가 극하게 대립하던 시기를 살던 이들은 한쪽에서 보면 빨갱이고,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수구세력이지만 정치적 노선을 떠나 사회적 혼란기에 신앙과 인간의 삶을 고민한 목회자란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대표적 목회자로 숭실대와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평북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으나 한국전쟁을 겪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후, 영락교회를 설립하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됐다. 그는 교회 사랑, 민족 사랑, 하나님 사랑을 일생의 모토로 삼고 교회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목회자로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았다. 그의 목회는 교회에만 갇히지 않아 학교, 병원, 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사회 봉사와 복음화 활동을 했다.
김창준 목사는 독립운동가 33인 중 1명으로 시카고와는 친숙한 인물이다. 감리교 학교인 한국 협성대와 게렛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3년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의 초대 목회자로 사역한 바 있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감리교신학교 교수직도 역임했다. 그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주주의 실현을 주장하며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했으나 기반을 형성하지 못하고 1948년 월북했으며 1959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해답으로 제시했던 기독교 운동가였으나 현재 북한에서 김창준 목사의 삶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
최문식 목사는 1946년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일어난 10월 민중항쟁을 이끈 주역이다. 그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대구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며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협력하면서 좌파 정치노선에 가담하게 됐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민중이 주도하는 통일 혁명을 꿈꾼 인물이다. 그는 미군정에 반대하며 민중항쟁을 이끌었지만 이것이 동족 간의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본 후, 사태 협상에 나섰다. 결론적으로 그는 우파로부터는 빨갱이로, 좌파로부터는 변절자로 매도당하고야 말았다. 정치적인 면이야 어떻든 간에 그는 민중과 성도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인민군에 반대하며 많은 고초를 겪은 신앙인이었다.
최흥종 목사는 역시 평양신학교 출신이다. 그는 광주YMCA 총무를 지낸 기독교 사회운동가로 소록도에 나환자촌을 창설했다. 그는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뒷골목 깡패였으나 친구와 함께 선교사의 집에 들렀다가 광주의 첫 성도가 됐다. 그는 한국인 나환자를 돌보다 나환자가 된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자신도 나환자를 위해 인생을 헌신하게 됐다. 그는 삼일운동 때 시위에 참여하며 1년간 징역형을 살고 출옥한 후 목회자가 됐다. 해방 후 전남 건국준비위원장, 미군정 도정 고문을 맡았으나 다시 걸인과 나환자, 결핵환자를 위한 사역으로 돌아 왔다. 그는 부패해 가는 한국교회를 향해 1964년 12월 30일 경고문을 작성한 후 95일간 단식하다 세상을 떴다.
강양욱 목사는 평양신학교와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고 한다. 그는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의 육촌동생이다.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그는 김일성의 자문역을 맡게 됐으며 북한 정권 측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북한 내에서는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평안남도위원장,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최고인민회의 1~5대 대의원,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등 1983년 세상을 뜨기까지 요직을 지냈다. 1982년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으며 유해는 평양애국열사릉에 매장되는 등 북한 내에서는 상당한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
이 강좌는 4월 1일부터 시작돼 8주간동안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미드웨스트장로교회(1437 W. Oakton St. Park Ridge, IL 60068)에서 열린다. CSKC 관계자는 “다른 신앙적 관점과 배경을 가진 신앙인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이야기와 고민을 담아 내는 모임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 강좌의 교재는 한신대 연규홍 교수가 펴낸 “해방 공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 5인 5색(생명의 씨앗 & 터닝 포인트, 2007)”이란 책이다. 교재 없이도 참여가 가능하며 CSKC 연구원들이 각 인물에 대한 개괄적 소개를 한 후, 참석자들이 형식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식으로 강좌가 진행된다.
문의) 773-633-8112/ www.cskcstud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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