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5살 짜리 터키 소녀.
10년째 이슬람권 선교를 하고 있는 A선교사가 집회 차 애틀랜타를 방문했다. 기독교 국가에서 조차 기독교 핍박이 일어나는 시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이슬람권 선교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자가 A선교사를 만난 것은 18일 늦은 오후였다. 7천 5백만 인구 중에 기독교인이 2천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터키, 신앙의 황무지 한복판에서 벌이는 그의 영적 사투를 들어보자.

2000년, A 선교사의 선교가 시작됐다. 그의 나이 30세.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가 선교에 부름을 받았다.

“16살 어린 나이에 기드온출판사에서 나온 작은 파란색 성경으로 처음 예수님이란 분을 알고 난 후 철없이 ‘30세 이후로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게요’라고 기도했었다”는 그의 기도응답이었다.

주변에서 만류도 많았다. ‘그 위험한 땅을 왜 가려느냐? 힘들면 바로 돌아오라’는 주변의 걱정 섞인 인사에도 묵묵히 미소만 짓던 그였다.

“누군가 가야 한다면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한 후, 한국인은 전무한 터키 C도시를 밟은 것이 2002년이다. 앙골라와 이스탄불을 거쳐 터키로 들어갈 무렵 A선교사는 당시 터키의 현지상황을 듣고 예기치 못한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

터키전의 패배를 사용하신 하나님

당시 한 한국인 선교사가 터키국기의 별 모양을 십자가모양으로 바꿔 웹싸이트에 게재한 것이 문제가 돼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된 사건을 계기로 터키 국민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빠진 것이다.

‘C도시에는 한국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데…’ 유일한 한국인으로 들어가는 A 선교사는 걱정이 들었지만, 하나님께 믿고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월드컵을 기점으로 터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180도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A선교사가 C도시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

“터키와 한국이 월드컵에서 만나, 한국이 졌던 경기가 있었어요. 경기가 다 끝난 후 경기는 비록 졌지만 한국전에서의 우애를 기억하며 모두 어깨동무를 하는 등 진한 우정애를 보여줬죠. 터키국기와 한국국기가 관중석에서 함께 올라가기도 했고, 서로 옷을 바꿔 입으며 감동적인 장면이 중계됐어요. 그 때 터키에서 중계 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면 다시 죽을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죠. 그 후로는 길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인식이 좋아졌어요.”

▲터키 캠퍼스에 부흥의 불길을 주소서!
월드컵은 월드컵이고, 선교는 선교라고 하는 이가 있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월드컵의 패배를 통해서도 선교의 길을 열어주셨다.

한 자매의 변심

예상보다 쉽게 시작된 터키에서의 삶, 그러나 이슬람 국가에서 학생신분으로 공부하면서 짬을 내 전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몰래카메라 사건도 있었고, 왕따도 당하면서 여러가지 핍박이 있었죠”라며 A선교사는 한 가지 크게 놀랐던 사건을 소개했다.

하루는 일대일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한 자매에게 전화를 받았다. 평소와 달리 이것 저것 질문을 많이 하던 그녀와의 대화, 끊고 나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당시 통화내용이 학교 교지에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 된 것이다. ‘너는 선교사니? 너는 하나님을 전하니?’ 등의 질문에 A 선교사가 대답한 내용이 그대로 실렸다.

‘너는 선교사니?’라고 묻는 질문에 A 선교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선교사라고 생각해. 복음전파가 모든 크리스천들의 사명이니까’라고 지혜롭게 넘겼기에 학교에서 큰 문제로까지 불거지지는 않았다.

신문에 보도가 된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던 한 자매의 변심이 더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는 그. 그래서 그 후로는 그 자매에게 전화하기도, 전화를 받기도 겁이 나 약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시고 붙드셨던 주님을 묵상하면서, 미워할 것은 죄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A선교사가 먼저 전화 소화기를 들었다. “그 문제(신문 인터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안하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려고 했어요. 그런데 대화 하면서 ‘나도 아팠지만, 이 아이도 참 아팠구나’를 알게 됐어요.” A선교사와 연락이 끊긴 한 달 동안, 정신과치료까지 받으며 몹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자매가 이젠 A 선교사의 믿음 어린 돌봄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신실한 주님의 사람으로 자랐다고 그는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모진 핍박 못이겨 믿음 떨어지기도, 그러나 다시 돌아오리라

그런가 하면 모진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믿음이 떨어지는 이들도 많다.

“저희(선교사)를 만나기 전에 15일 정도 예수님 꿈을 꿨다는 K라는 청년이 있었어요. 성경공부를 하면서 믿음을 가지게 된 후, 가정에서 핍박이 심했지만 꿋꿋이 이겨내 참 기특했던 청년이었어요.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고 여기 저기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의 문이 닫히면서, 지금은 교회에 나오지 않아요. 그래도 예수님을 체험한 뜨거운 눈물이 있으니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기도하고 있어요.”

성지순례의 현장이기도 한 터키, 그만큼 견고한 진이 터키를 감싸고 있다고 A 선교사는 이야기 했다. 이웃 이슬람국가, 이란에 2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과 비교할 때, 2천명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적은 수치다.

A 선교사는 “2천년 전 사도바울에 의해 전해졌던 복음의 땅인 이곳이 지금은 그 자취를 감췄다”며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땅이기에 사단이 더욱 강력히 붙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터키는 이슬람국가 중 가장 부유할 뿐 아니라, 성지순례의 현장이어서 무슬림국가사이에서 입김이 가장 세다. 디아스포라만도 2억명으로 하나님께 크게 사용될 땅이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사적인 정보 유출을 절대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A선교사는 “터키에서 한국으로 선교를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국말을 잘하는 터키인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A선교사는 “앞으로도 계속 터키 영혼들을 섬길 계획”이라며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것은 힘이 들지만, 내 자식을 돌보는 일은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엄마가 된 마음으로 섬기니 힘이 들지 않는다. 터키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며 손을 꼭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