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전 코리아데스크 소식지 '꿈이 있는 세상' 2009년 가을호는 디도스가 36세의 젊은 나이이며 방글라데시 내 주소 인종인 가로(Garo)족 출신인 실을 감안할 때 파격적인 일이라고 전했다.

디도스는 방글라데시가 1971년 파키스탄과 독립 전쟁을 펼치면서 폐허가 된 Joyramkura라는 접경 지역에서 태어났다. 전쟁으로 디도스의 부모를 포함한 수많은 가로족 출신들이 인도로 피난을 가야했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모두 약탈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히 스웨덴 적십자사가 구호 식량과 함께 학교와 교량, 하수도를 건설해 주었고 호주 침례교 선교 재단이 병원을 지어줬다. 디도스는 1975년 이 병원에서 태어났고 몇 년 후 월드비전이 Joyramkura 에서 지역 개발 사업을 시작하며 아동 결연 후원을 받게 됐다.

디도스는 월드비전이 그의 학교 생활을 매우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하루 수업이 끝나는 벨이 울리면 아이들은 빵과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과자 등을 얻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는 학생들을 위해 조촐한 잔치 같은 것이 벌어졌고, 크리스카스 때는 자신과 다른 결연 후원 아동들에게 옷, 신발과 같은 선물이 도착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또한 그는 후원자로부터 편지와 함께 별도의 학용품을 받기도 했다.

"후원자의 편지는 방글라어로 번역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방글라어로 답장을 쓰면 월드비전 직원들이 영어로 번역해서 생활 기록부와 함께 후원자에게 보내 주었죠."

고등학교 졸업 후 디도스는 다카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월드비전은 디도스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약간의 용돈을 주어 그가 학업을 끝마칠 때까지 도와 주었다.

1998년, 마침내 디도스는 오랜 인내와 투자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다카 대학교에 재학 중인 가로족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법학 석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방글라데시의 인권 변호사로 활동을 펼쳤다. 디도스는 주로 억울하게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변호를 자청했다. 그 가운데는 10년 이상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교도소에 복역 중인 죄수들도 있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감옥에 가는 대신 아동 보호 시설에서 순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소수 인종에게 가해지는 차별 정책을 폐지하는 캠페인을 벌여, 방글라데시 북동부에 사는 Khasis 족이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토지를 잃지 않도록 법률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디도스는 법무 차관으로서 방글라데시의 약자들을 위해 일하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전한다.

"부모님은 제가 크리스천으로서, 약한 자 편에 서서 그들을 돕는 것을 너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월드비전은 이러한 영광이 있기 까지 제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출처: 월드비전 코리아데스크 소식지 '꿈이 있는 세상'(2009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