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잘 아는 지인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장 석윤 박사가 쓴 “The Ways of Folly" 라는 영문판 단편 소설집이었다. 그 지인은 그 책 가운데 “For the Sake of Uiri" (의리를 위하여)라는 글의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수줍게 이야기 하였다. 책을 선물한 그 분의 성의를 생각하여 또, 책을 읽고 뭔가 코멘트를 해 드리는 것이 그 분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 그 부분을 찾아 읽어 보았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단숨에 읽어 내려 가는 동안 진한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는 아내와 두 어린 남매를 한국에 두고 30여 년 전 미국에 유학을 왔다. 학비를 벌며 공부하고 한국에 생활비까지 부쳐야 할 형편이었지만 학생 신분으로 일을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처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렸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한국에 있을 때 미 8군에서 태권도를 가르쳐 Black Belt까지 따게 했던 Frank라는 청년이 서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와 있냐고 물어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기 위해 유학 왔다고 설명하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Blue Card를 얻을 길이 없겠냐고 상의했더니 Frank가 대뜸 하는 말이 그러지 말고 차라리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다. 자기가 그 방면에 잘 아는 변호사를 알고 있으니 상의해 보겠다고 하였다. 변호사 비용을 낼 만한 형편이 아직 안 된다고 하자 Frank는 그 모든 비용 일체를 자기가 다 먼저 지불 할 것이니 나중에 형편이 되면 천천히 갚으라고 하였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Frank를 바라 보며 당신이 내게 뭣 때문에 이런 호의를 베푸냐고 물었다. Frank는 “It's Uiri. Master."라고 대답하였다. 한국에서 태권도를 가르쳐 줄 때 ‘의리’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냐고 하면서 자기는 스승님으로부터 배운 의리를 실천 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였다.

영주권 인터뷰를 앞두고 한국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은 날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그도 주일날 교회에 나가 그 당시 가난한 유학생으로서는 꽤 거금인 $20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리며 인터뷰를 잘 통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다.

드디어 영주권 인터뷰를 하는 날이 되었다. 이민국 직원은 그에게 왜 영주권을 원하냐고 물었다. 그는 미리 집에서 연습한대로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후 이 미국을 위해 공헌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담당 직원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 올랐다. 다음은 스폰서를 서준 태권도장의 주소를 말해 보라고 하였다.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형식상으로 서류를 꾸민 것이므로 직장의 주소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모른다고 대답 하였다. 이번에는 담당 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면 전화 번호를 대라고 하였다. 앞이 캄캄해졌다. 그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주급은 시간당 얼마씩 받냐고 물었다. 거짓으로 대답하면 일이 오히려 복잡하게 꼬일것 같아 역시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이민국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이 신청 서류는 기각시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 직원의 손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한국에서 아내와 어린 남매가 손꼽아 이곳에 오기를 기도하고 있으니 제발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수 없겠냐고 사정하였다. 그 이민국 직원은 잠깐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그럼 한 번 더 인터뷰할 수 있도록 스케쥴을 잡아 줄테니 그 때는 실수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자기보다 덜 까다로운 직원과 인터뷰 할 수 있도록 스케쥴을 잡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인터뷰할 때도 당신과 꼭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 후 그 직원과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할 때 그는 자신있게 태권도장의 주소와 전화 번호, 받는 수당을 말할 수 있었고 인터뷰에 합격 하였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그 이민국 직원의 손을 붙들고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형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직원은 왜 내가 당신의 형님이 되야 하냐고 의아해 했다. 그는 동양 사상 중 고상한 도덕적 가치중의 하나인 "Uiri"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죽을 때까지 형님으로 모시면서 형제로서의 의리를 지킬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얼마 후 미국에 도착한 그의 가족과 Taylor 가족은 수년간 서로의 집을 오가며 친 형제 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Taylor 씨의 전화 번호가 끊긴 사실을 알았다. 집에 찾아가 보니 그들은 집을 팔고 어딘가로 이사를 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깊은 충격과 아울러 허탈감과 배신감마저 느꼈다. 안타까와 하다가 Taylor 씨의 아들이 다니고 있는 하버드 법대를 수소문해서 그의 아들과 가까스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Eric 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뇌종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 집을 팔고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볼티모어로 달려 갔다. 병원에서 Taylor씨를 만나자 마자 따졌다. 부담이 될까 봐 알리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Taylor 씨에게 그는 “그러면 내 아내가 이런 병에 걸려도 당신은 모른 척 하려고 했오? 우리는 서로 형제이니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함께 풀어 나갑시다.”라고 하였다. Taylor 씨는 아내가 수술하려면 12만불이 필요한데 집을 팔고 보험 혜택을 받아도 6만불밖에 충당이 안되어 수술을 못 받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뉴욕에 오자 마자 아내에게 그 동안 두 부부가 안 먹고 안 쓰면서 two job 뛰면서 모아 놓은 총 재산 6만 불을 Taylor 부인의 수술비에 보태자고 말했다.

아내가 펄쩍 뛰고 울면서 반대했다. 그 돈은 우리의 생명이고 소망이고 미래인데 그것을 다 주고 나면 우리는 앞으로 언제 자리 잡겠냐고 하면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아내에게 “이웃 사랑의 참 뜻이 무엇이오? 우리가 이 돈을 형제 사랑을 위해 쓰면 하나님이 백배로 갚아 주실 것이오.”하며 밤새 설득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을 찾아 갔다. Taylor 씨에게 6만불짜리 수표를 내밀었다. Taylor 씨는 감격으로 말을 잃은 채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의 얼굴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는 Talyor 씨에게 말했다. “It's Uiri of brotherhood. 형제된 의리일 뿐입니다.“ Taylor 씨는 그를 꼭 껴안으며 ”You are my real brother." 라고 말해 주었다.

성공적인 수술로 Taylor 부인은 완치 되어 건강한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아들 Eric 은 하버드를 졸업한 후 현재 뉴욕에서 이민법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사람들의 법적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특별한 열심과 정성을 쏟고 있다. Eric 은 한국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가 쥴리어드 음대를 다니고 있던 한국 여학생에게 한 눈에 반해 결혼하였다. Taylor 씨는 지금도 어디를 가든지 자기에게 한국인 brother 와 한국인 며느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히며 다니고 있다.

어느 날 아내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25년 전 당신이 우리가 형제 사랑을 위해 우리의 물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백배로 갚아 주실 거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우리가 백배로 받았네요. 형제 사랑도 실천하고 백배로 받고. 그 때 당신이 하신 일은 정말 잘 한 일이었어요.“ “내가 누구를 도운 적이 있었나? 난 아무 기억도 안 나는데.” 너스레를 떠는 그와 아내의 눈이 마주쳤을 때 진한 행복감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