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성을 가진 교육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과거에 한국에서 교육받았던 학생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재는 미국에서 교육받는 학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몇 가지 차이점을 느낄 수가 있다.
한국은 주입식과 암기식 그리고 성적과 등수(等數)에 따른 결과에 치중하는 반면 미국의 교육은 자율적 접근방식으로 책을 많이 읽게 하는데 가령 대통령이 한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 앞에서 책을 읽어 주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세이를 자주 쓰게 하므로 사고(思考)의 폭을 넓혀 준다든지 또는 프로젝트를 과제로 주거나 봉사활동 등을 통해 스스로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유도하여 사회에 참여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사람들의 눈과 귀 그리고 모든 신경을 자극하고 유혹하여 좀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마치 마약성분과도 같이 과도하리만큼 집중되어있다.
대표적으로 컴퓨터, Cell Phone 그리고 MP3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신(分身)과도 같은 존재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도구와 잠시라도 함께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반응도 있다고 하니 거의 절대적인 우상수준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멀티미디어의 발달이 혜택(惠澤)을 넘어 도리어 해악(害惡)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자연 편리주의 사고가 만연하여 삶의 모든 영역과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불편하다고 느껴지면 즉각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편리지상주위는 불편한 것은 잘못된 것이고 편리한 것은 좋다는 공식으로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어 불편을 감수할 줄 모르는 바보로 사람들을 전락(轉落)시키고 있다.
군 시절 고참으로부터 혼 날때 "너 아무생각 없지?"라든지 "머리에 순대만 꽉 차 가지고..." 라고 조롱을 받는다. 지금도 왜 순대가 머리에 찼다고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의미 상 생각이 없거나 모자란 상태를 표현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이렇듯 생각없는 마네킹이나 로보트와 같은 수준의 삶은 아무래도 인간상실을 가져올 뿐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핵 실험으로 국가는 물론 전 세계를 어지럽히는 "생각없는 북한정권"의 태도. 여러가지로 민망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문명의 발달과 혜택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당히 적절히 그리고 선하게 활용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만 하더라도 거의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완전무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데 필요 적절하게 활용하여 선한가치와 효과를 생산적으로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어째든 이러한 지나친 편리주위식사고가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불편하다고 예배생활, 기도생활, 전도생활, 봉사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안할 수 있는가? 어차피 경건하고 거룩한 영적생활은 범죄하고 타락한 쓴 뿌리를 바탕으로 한 육적생활과 마찰을 가져오게 되므로 불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성전은 많이 세우시고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셨으나 은퇴 이후에 막상 가실 곳도 불러주는 곳도 없는 원로목사님으로 남은 생을 쓸쓸히 보내셔야만 했던 아버님께서 마지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하시는 날까지 성경책을 의지해 설교원고를 작성하셨음을 기억한다. 평소에도 설교 작성을 위해 항상 원고를 책상위에 펼쳐 놓으시고 생각나시면 기록하시곤 하셨다.
“설교자로 아무도 어디서도 불러주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목사의 본분이요 또한 자신을 위해서도 복된 일”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특히 노년에 가만히 그저 편안히 있는 것은 독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로서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상고하며 설교를 한다는 자세 하에 한 주도 거름이 없이 원고를 기록하시며 준비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아버님 목사님을 평안히 주무시는 가운데 불러 주셨던 같다. 평소 입버릇처럼 "죽는 모습 자녀들에게 조차 보이기 싫고 부담되기 싫다"고 하셨던 것 처럼....
정말 아버님의 평소 목회(牧會)지론(至論)데로 목회자의 세 가지 준비 즉 죽을 준비, 보따리 쌀 준비, 설교준비를 그대로 몸소 모범적으로 실천하시고 가신 분이셨다.
반면에 같은 목회자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얼마나 편리하고 다양한 문화혜택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 지나치게 의지하고 영향을 받아 불편을 힘들어하거나 거부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빨리 멀리 크게 그것도 쉽게 나가려는 욕심은 없는가?
때론 내가 의도하고 목적한 바대로 빨리 쉽게 안 된다고 하나님께 무리하고 무례한 떼는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그리고 목적하신 바를 구체적으로 깨닫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서 깊이 묵상을 해야겠다. 조금 늦어지더라도 조금 아니 혹시 많이 불편함이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편이라는 과정이 훈련코스가 되어 나를 보다 정금같게 하시리라는 믿음을 갖자.
불편하지만 유익한 것이 있다.
책을 읽기 싫더라도 애써 읽어라 !
글을 쓰기 귀찮더라도 자주 써라 !
말씀을 묵상하기 어렵더라도 주야로 묵상하라 !
시대는 빠르게 급변하고 문화문명은 초 읽기식으로 발달하지만 도리어 불편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원시적인 방법 가운데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뉴욕정원교회(www.nygc.us) 주효식 목사
한국은 주입식과 암기식 그리고 성적과 등수(等數)에 따른 결과에 치중하는 반면 미국의 교육은 자율적 접근방식으로 책을 많이 읽게 하는데 가령 대통령이 한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 앞에서 책을 읽어 주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세이를 자주 쓰게 하므로 사고(思考)의 폭을 넓혀 준다든지 또는 프로젝트를 과제로 주거나 봉사활동 등을 통해 스스로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유도하여 사회에 참여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사람들의 눈과 귀 그리고 모든 신경을 자극하고 유혹하여 좀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마치 마약성분과도 같이 과도하리만큼 집중되어있다.
대표적으로 컴퓨터, Cell Phone 그리고 MP3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신(分身)과도 같은 존재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도구와 잠시라도 함께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반응도 있다고 하니 거의 절대적인 우상수준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멀티미디어의 발달이 혜택(惠澤)을 넘어 도리어 해악(害惡)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자연 편리주의 사고가 만연하여 삶의 모든 영역과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불편하다고 느껴지면 즉각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편리지상주위는 불편한 것은 잘못된 것이고 편리한 것은 좋다는 공식으로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어 불편을 감수할 줄 모르는 바보로 사람들을 전락(轉落)시키고 있다.
군 시절 고참으로부터 혼 날때 "너 아무생각 없지?"라든지 "머리에 순대만 꽉 차 가지고..." 라고 조롱을 받는다. 지금도 왜 순대가 머리에 찼다고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의미 상 생각이 없거나 모자란 상태를 표현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이렇듯 생각없는 마네킹이나 로보트와 같은 수준의 삶은 아무래도 인간상실을 가져올 뿐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핵 실험으로 국가는 물론 전 세계를 어지럽히는 "생각없는 북한정권"의 태도. 여러가지로 민망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문명의 발달과 혜택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당히 적절히 그리고 선하게 활용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만 하더라도 거의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완전무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데 필요 적절하게 활용하여 선한가치와 효과를 생산적으로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어째든 이러한 지나친 편리주위식사고가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불편하다고 예배생활, 기도생활, 전도생활, 봉사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안할 수 있는가? 어차피 경건하고 거룩한 영적생활은 범죄하고 타락한 쓴 뿌리를 바탕으로 한 육적생활과 마찰을 가져오게 되므로 불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성전은 많이 세우시고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셨으나 은퇴 이후에 막상 가실 곳도 불러주는 곳도 없는 원로목사님으로 남은 생을 쓸쓸히 보내셔야만 했던 아버님께서 마지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하시는 날까지 성경책을 의지해 설교원고를 작성하셨음을 기억한다. 평소에도 설교 작성을 위해 항상 원고를 책상위에 펼쳐 놓으시고 생각나시면 기록하시곤 하셨다.
“설교자로 아무도 어디서도 불러주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목사의 본분이요 또한 자신을 위해서도 복된 일”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특히 노년에 가만히 그저 편안히 있는 것은 독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로서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상고하며 설교를 한다는 자세 하에 한 주도 거름이 없이 원고를 기록하시며 준비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아버님 목사님을 평안히 주무시는 가운데 불러 주셨던 같다. 평소 입버릇처럼 "죽는 모습 자녀들에게 조차 보이기 싫고 부담되기 싫다"고 하셨던 것 처럼....
정말 아버님의 평소 목회(牧會)지론(至論)데로 목회자의 세 가지 준비 즉 죽을 준비, 보따리 쌀 준비, 설교준비를 그대로 몸소 모범적으로 실천하시고 가신 분이셨다.
반면에 같은 목회자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얼마나 편리하고 다양한 문화혜택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 지나치게 의지하고 영향을 받아 불편을 힘들어하거나 거부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빨리 멀리 크게 그것도 쉽게 나가려는 욕심은 없는가?
때론 내가 의도하고 목적한 바대로 빨리 쉽게 안 된다고 하나님께 무리하고 무례한 떼는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그리고 목적하신 바를 구체적으로 깨닫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서 깊이 묵상을 해야겠다. 조금 늦어지더라도 조금 아니 혹시 많이 불편함이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편이라는 과정이 훈련코스가 되어 나를 보다 정금같게 하시리라는 믿음을 갖자.
불편하지만 유익한 것이 있다.
책을 읽기 싫더라도 애써 읽어라 !
글을 쓰기 귀찮더라도 자주 써라 !
말씀을 묵상하기 어렵더라도 주야로 묵상하라 !
시대는 빠르게 급변하고 문화문명은 초 읽기식으로 발달하지만 도리어 불편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원시적인 방법 가운데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뉴욕정원교회(www.nygc.us) 주효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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