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마땅히 ‘예’할 때 ‘예’하고 ‘아니오’할 때 ‘아니오’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적 정황이나 시대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이다. 일제치하에서 다수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주장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독재치하에서 소수가 인권탄압을 죄라 주장해도 맞는 것은 맞는 것이다. 교회는 눈치 보거나 상황, 배경 운운하며 비진리를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세례하고 변화시키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최근 교회에 닥쳐온 위기들은 교회가 ‘예’할 때 ‘예’, ‘아니오’할 때 ‘아니오’하지 못한 죄로 인한 것이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 아니오’의 문제가 아니라 침묵 때문이다.

1970년대 커뮤니케이션 학자 노엘레 노이만은 ‘침묵의 나선이론(the spiral of silence theory)’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지배적 여론과 합치한다고 믿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킨다는 이론이다. 인터넷으로 대화의 창구가 넓어진 오늘날도 이 이론은 어느 정도 수용될 만하다.

하나님이 증오하는 동성애를 교회가 용납하는 것은 물론 이제 동성애 성직자들도 안수하자는 얼토당토 않은 안건이 지난 6월 PCUSA 총회에서 무려 57%의 찬성으로 결의됐다. 그러나 현지의 PCUSA 한인목회자들의 평가를 빌자면, 57% 찬성에 43% 반대라기 보다는 57% 중 소수만이 찬성자였고 다수는 ‘침묵’, ‘동조’, ‘간과’했다. 노엘레 노이만의 지적처럼 마치 동성애 안수가 대세라고 조작된 여론에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안수를 부정하는 헌법조항은 그대로 두고 “해당 노회가 원할 경우 안수할 수 있다”는 눈가리고 아웅에 침묵하는 지도자들이 더 큰 문제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그저 여론에 따라 붙는 무지몽매한 대중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오’할 때 ‘예’하는 죄도 무겁지만 침묵하는 죄도 결단코 가볍다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