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상담학의 거장, 제임스 폴링 교수(게렛신학교)는 한국인 유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한국에 관해 연구한 바를 말하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는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고 연세대에서 강의하며 느끼고 알게 된 사실, 개인적으로 진행한 연구를 기초로 발제할 것이며 여러분의 의견을 겸허히 듣고자 한다”며 발제를 시작했다. 한국신학을 미국신학계에 소개하는 역할을 자처해 왔던 한국기독교연구소(The Center for the Study of Korean Christianity)가 이번 10월 21일 제16차 월례포럼에서는 반대로 미국신학자가 보는 한국을 이야기 한 셈이다. 주제는 “Is There a Korean Contribution to U.S. Pastoral Theology”. 굳이 설명하면 “미국 목회학에 한국이 기여할만한 그 무엇인가 있는가”다. 그리고 무엇인가는 바로 “한(恨)”, “정(情)”, “살림”이다.

폴링 교수는 먼저 “한국인들은 극단의 모순 속에서도 공존한다는 점이 경이롭다”고 말했다. 신학자이기에 앞서 서구인으로서 그가 본 한국 내의 모순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미국 쇠고기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시위 모습이었다. “어디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을까”란 질문과 함께 폴링 교수를 놀라게 한 것은 “저들이 저렇게 반대하는 그 대통령은 바로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뽑은 존재”라는 점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대통령에 찬성, 반대하는 양 극단의 존재들이 한국사회 안에서 공존한다”는 점이었다. 많은 기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를 비인격적, 비인간적으로 대우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법을 제정하고 사회활동을 벌이는 모습도 폴링 교수가 발견한 양극단의 공존이며 북한과 대화 자체를 안 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북한에 지원과 교류를 계속해야 한다는 사람의 공존도 그의 눈에는 한국인이 가진 특성이었다.

이어 그는 한국인의 정서와 잠재력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로 한, 정, 살림을 꼽았다. 한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지만 “오랜 세대를 거치며 개인과 사회에 생성된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미국적 개념으로 보면 분노, 고통, 불만족 상태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정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영어로는 사랑이라고만 표현되지만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자면 감정을 통한 결속이라 할 수 있다. 살림은 ‘집안 살림’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은 청소나 요리 등의 가사노동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삶을 삶이 되게 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세가지 개념 가운데 한은 이미 세계신학계에 자주 소개된 개념이며 정은 최근 주목받고 있다.

폴링 교수가 주목한 것은 한국인의 정서와 잠재력을 압축해 놓은 이 세 개념 역시 자신이 한국 방문 중 만났던 한국인들의 모습처럼 양극단적 모순을 갖고 있단 것이다. 한은 환경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슬픔이자 분노, 고통이지만 또한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기도 하다. 정은 긍정적 측면의 사랑이지만 부정적 측면의 사랑이기도 하다. 가정폭력을 겪는 많은 한국인 여성들이 “저는 정 때문에 못 헤어져요”라는 말을 할 때의 정은 긍정적 측면만을 갖고 있진 않다. 살림은 보통 집안일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요즘은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생명을 주는 행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즉, 집 안의 일이면서 집 밖의 일이기도 하다. 최근 살림이 ‘살리다’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임이 알려지면서 한국 신학계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행위’라는 신학적 정의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폴링 교수는 “현대의 미국인들이 겪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적 세 개념이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고 결론지었다. 한, 정, 살림은 모두 스스로 모순적이지만 스스로가 스스로를 극복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미국적 상황에서는 갈등과 마찰이 표출되지 않을 뿐이지 인간이 겪는 정신적 위기는 결코 적지 않다. 한, 정, 살림은 이 내면적 갈등을 밖으로 드러내고 그것이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데에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개인이 처한 정신적 분노나 불만족에 목회상담자가 도움을 주려 한다면 그것을 무작정 덮어 두도록 돕거나 일시적 만족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한이 한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지금까지 폴링 교수의 목회상담학자로서의 연구와 일맥상통한다 볼 수 있다. 그는 자칫 미시적 차원에 머물 수 있는 목회상담의 영역을 권력과 구조, 사회 시스템이라는 거시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목회상담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정, 살림은 모두 단순히 한 개인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와 전통, 세대 속에서 누적되어 온,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 차원의 것이란 점에서 폴링 교수의 이번 발제는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폴링 교수의 발제 후에는 포럼에 참석한 시카고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루터란신학교, 게렛신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이 폴링 교수에게 다양한 질문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