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의 꿈을 품고 일생을 헌신해 왔던 김준곤 목사가 9월 29일 오전 11시 11분경(한국시간) 소천했다. 향년 85세.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해 청년 복음화의 초석을 놓았던 김준곤 목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 없는 규모의 ‘74 엑스플로 대회’와 ‘80 민족복음화대성회’를 개최하며 민족 복음화의 염원을 불태웠다.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해 위정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지속적으로 성시화운동을 펼쳐 나갔다.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로 그를 표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어 있다.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김준곤 목사의 인생 역정, 비전 그리고 헌신
김준곤 목사는 1925년 3월 28일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봉리에서 부친 김면주 씨와 모친 김통안 씨의 사이에서 8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곱살 때 모친의 친척 되는 낙도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로부터 처음 복음을 들었다. 고인은 무안농업실수학교(현 무안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있는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면서 교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만주 봉천신학교에 입학을 했다가 일제 징용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만주의 김인석 목사 댁에서 피신해 있었다. 고인은 당시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김인석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신학, 문학, 철학서 등 2,0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성경 암송을 시작해서 수백 구절을 암송했다.
고인은 1946년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조선신학교에 김재준 교수와 송창근 교수의 자유주의신학 논란이 일자 정규오, 박창환, 조동진, 한완석, 김성진, 엄두섭 등 51인 신앙동지회 학생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로 내려가 한 학기를 공부한 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복구되자 다시 올라와 학업을 계속해 1948년 9월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고인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인정진 사모와 결혼해 1녀(은희)를 두었으나 1950년 10월 3일 공산당에 의해 인정진 사모가 순교를 당하였고, 부친도 학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본인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고인은 1951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 교장으로 봉직했다. 이후 여수 애양원 나환자 신학교인 한성신학교 교수로 잠시 사역한 후 1957년 미국 풀러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 한국에서 CCC 사역을 시작할 권유를 받고 귀국해서 1958년 11월 2일 한국CCC를 창설하였다. 고인은 대학생선교회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직접 전도를 해서 제자를 양육하겠다고 다짐하고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개인전도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고인을 통해 전도돼 양육받은 제자들은 정정섭 장로(기아대책 회장), 두상달 장로(기아대책 이사장), 김영숙 권사(가정문화원 원장), 최호자 권사(성시화운동 중보기도팀장), 박세환 장로(예비역 육군대장), 권영필 권사(변정일 전 의원 부인, 약사), 주수일 장로(칠성섬유 회장), 김경수 장로(재미 치과의사), 김인중 목사(안산동산교회),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민산웅 장로(전 극동방송 부사장), 윤수길 선교사(태국) 등 수없이 많다.
민족복음화의 비전과 기도 그리고 헌신
고인은 민족의 수난과 개인과 가족의 고난을 겪으면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특히 1962년 2월 서울 삼각산에서 친구인 박요한 목사(장로회신학교 1회 동창으로 예장합동 증경 총회장을 지냈고, 섬선교 사역 중)의 누님이 운영하는 민족기도원에서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지구상에서 단 한 민족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뿌리째 송두리째 복음화되도록 기도하면서 성령의 뜨거운 감동으로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비전을 체험했다. 그 내용은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제목의 노래로도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같이 아픈 내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젖줄, 말씀의 핏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사장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의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도 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시장에서 한국제 물건들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민족의식과 예수의식이 하나된 지상 최초의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해 위정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지속적으로 성시화운동을 펼쳐 나갔다.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로 그를 표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어 있다.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김준곤 목사의 인생 역정, 비전 그리고 헌신
김준곤 목사는 1925년 3월 28일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봉리에서 부친 김면주 씨와 모친 김통안 씨의 사이에서 8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곱살 때 모친의 친척 되는 낙도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로부터 처음 복음을 들었다. 고인은 무안농업실수학교(현 무안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있는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면서 교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만주 봉천신학교에 입학을 했다가 일제 징용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만주의 김인석 목사 댁에서 피신해 있었다. 고인은 당시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김인석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신학, 문학, 철학서 등 2,0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성경 암송을 시작해서 수백 구절을 암송했다.
고인은 1946년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조선신학교에 김재준 교수와 송창근 교수의 자유주의신학 논란이 일자 정규오, 박창환, 조동진, 한완석, 김성진, 엄두섭 등 51인 신앙동지회 학생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로 내려가 한 학기를 공부한 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복구되자 다시 올라와 학업을 계속해 1948년 9월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고인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인정진 사모와 결혼해 1녀(은희)를 두었으나 1950년 10월 3일 공산당에 의해 인정진 사모가 순교를 당하였고, 부친도 학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본인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고인은 1951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 교장으로 봉직했다. 이후 여수 애양원 나환자 신학교인 한성신학교 교수로 잠시 사역한 후 1957년 미국 풀러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 한국에서 CCC 사역을 시작할 권유를 받고 귀국해서 1958년 11월 2일 한국CCC를 창설하였다. 고인은 대학생선교회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직접 전도를 해서 제자를 양육하겠다고 다짐하고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개인전도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고인을 통해 전도돼 양육받은 제자들은 정정섭 장로(기아대책 회장), 두상달 장로(기아대책 이사장), 김영숙 권사(가정문화원 원장), 최호자 권사(성시화운동 중보기도팀장), 박세환 장로(예비역 육군대장), 권영필 권사(변정일 전 의원 부인, 약사), 주수일 장로(칠성섬유 회장), 김경수 장로(재미 치과의사), 김인중 목사(안산동산교회),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민산웅 장로(전 극동방송 부사장), 윤수길 선교사(태국) 등 수없이 많다.
민족복음화의 비전과 기도 그리고 헌신
고인은 민족의 수난과 개인과 가족의 고난을 겪으면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특히 1962년 2월 서울 삼각산에서 친구인 박요한 목사(장로회신학교 1회 동창으로 예장합동 증경 총회장을 지냈고, 섬선교 사역 중)의 누님이 운영하는 민족기도원에서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지구상에서 단 한 민족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뿌리째 송두리째 복음화되도록 기도하면서 성령의 뜨거운 감동으로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비전을 체험했다. 그 내용은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제목의 노래로도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같이 아픈 내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젖줄, 말씀의 핏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사장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의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도 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시장에서 한국제 물건들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민족의식과 예수의식이 하나된 지상 최초의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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