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십자군 전쟁 당시 주인공 대장장이 발리안에게 숨겨졌던 아버지 고프리가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지키는 근처 이벨린의 영주였습니다. 아버지와 한 여인의 부정한 관계로 인해 세상에 나온 발리안은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했지만, 아버지의 제안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지옥으로 가게 되는 자살을 했고, 죽은 아내의 시신에서 금십자가 목걸이를 탈취한 사제를 그가 죽이면서 그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리안은 아버지를 이어서 예루살렘을 지키는 기사가 됩니다. 리더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태생적 한계나 비참한 현재 모습을 볼 때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는 리더가 될 수 없는 신분이었고,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른 리더십
오히려 예루살렘의 왕이 죽고 난 후 즉위한 새로운 왕 ‘기 드루지앵’이 갖고 있는 독선과 과시, 그리고 힘으로 표현된 그의 리더십이 예루살렘에 더 필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독선적 리더십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게 했고, 이슬람의 살라딘에게 패배하는 수모를 당하게 합니다. 근사한 리더십처럼 보였지만 잘못된 리더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여기서 주님의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란 말에는 ‘나를 따라오는 자들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기 희생은 어떤 종류든지 소위 리더라고 하는 자들이 갖고 있습니다. 과거 독재자들도 늘 하는 말이 “나는 못먹고 못 입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기 드루지앵이나 장수 레이놀드도 결국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자기 희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예수의 삶을 좇는 정신과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견상 분명히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고, 그것을 위해 전쟁터로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부인의 모범을 정확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성육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치를 버리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 모든 표현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리더십의 완성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그 다음 반응을 이렇게 적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자기 부인의 리더십
예수를 좇는 자들로서 우리의 리더십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무릎을 꿇으신 것처럼, 절대 순복한 것처럼 우리는 절대 주님께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리더십이 생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예수님처럼 그렇게 우리가 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십은 의존이고 굴종(屈從)입니다. 영화는 이것을 잘 표현합니다. 발리안이 아버지가 아닌 이벨린의 영주로서 고프리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그는 비로소 리더십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리더십은 언제나 더 큰 리더인 주님께 순복할 때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왜 어부, 세리 같은 제자들을 리더로 부르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포위되었을 때입니다. 싸울 기사들은 이미 다 죽어서 노예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노예는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전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한심한 리더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고 합니다. 그때 발리안이 보잘 것 없는 노예, 평민들에게 기사작위를 내립니다. 사제들이 반대하며 “혁명을 하려 하느냐”고 따졌지만 발리안은 외칩니다. “무릎을 꿇라. 무기가 있거나 싸울 수 있는 자는 다 무릎을 꿇라”
발리안의 요청에 노예와 평민들은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습니다. 그들은 이미 섬기고 낮아지는데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릎 꿇기가 쉬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발리안이 무릎을 꿇기가 쉬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왜 주님이 볼품 없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들은 본래적으로 ‘자기 부인’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십은 똑같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말씀하시는“무릎을 꿇라”“기사들이여 일어나라”는 부르심 앞에, 자기 부인이 일상화되어서 따르기 쉬운 자들이 주님이 쓰시는 진정한 리더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럼니스트 하정완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영화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읽고 묵상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는 하정완은 꿈이있는교회(www.dreamchurch.com)의 목사이다.
바른 리더십
오히려 예루살렘의 왕이 죽고 난 후 즉위한 새로운 왕 ‘기 드루지앵’이 갖고 있는 독선과 과시, 그리고 힘으로 표현된 그의 리더십이 예루살렘에 더 필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독선적 리더십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게 했고, 이슬람의 살라딘에게 패배하는 수모를 당하게 합니다. 근사한 리더십처럼 보였지만 잘못된 리더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여기서 주님의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란 말에는 ‘나를 따라오는 자들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기 희생은 어떤 종류든지 소위 리더라고 하는 자들이 갖고 있습니다. 과거 독재자들도 늘 하는 말이 “나는 못먹고 못 입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기 드루지앵이나 장수 레이놀드도 결국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자기 희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예수의 삶을 좇는 정신과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견상 분명히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고, 그것을 위해 전쟁터로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부인의 모범을 정확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성육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치를 버리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 모든 표현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리더십의 완성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그 다음 반응을 이렇게 적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자기 부인의 리더십
예수를 좇는 자들로서 우리의 리더십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무릎을 꿇으신 것처럼, 절대 순복한 것처럼 우리는 절대 주님께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리더십이 생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예수님처럼 그렇게 우리가 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십은 의존이고 굴종(屈從)입니다. 영화는 이것을 잘 표현합니다. 발리안이 아버지가 아닌 이벨린의 영주로서 고프리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그는 비로소 리더십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리더십은 언제나 더 큰 리더인 주님께 순복할 때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왜 어부, 세리 같은 제자들을 리더로 부르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포위되었을 때입니다. 싸울 기사들은 이미 다 죽어서 노예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노예는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전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한심한 리더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고 합니다. 그때 발리안이 보잘 것 없는 노예, 평민들에게 기사작위를 내립니다. 사제들이 반대하며 “혁명을 하려 하느냐”고 따졌지만 발리안은 외칩니다. “무릎을 꿇라. 무기가 있거나 싸울 수 있는 자는 다 무릎을 꿇라”
발리안의 요청에 노예와 평민들은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습니다. 그들은 이미 섬기고 낮아지는데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릎 꿇기가 쉬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발리안이 무릎을 꿇기가 쉬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왜 주님이 볼품 없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들은 본래적으로 ‘자기 부인’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십은 똑같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말씀하시는“무릎을 꿇라”“기사들이여 일어나라”는 부르심 앞에, 자기 부인이 일상화되어서 따르기 쉬운 자들이 주님이 쓰시는 진정한 리더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럼니스트 하정완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영화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읽고 묵상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는 하정완은 꿈이있는교회(www.dreamchurch.com)의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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