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친구가 있었다.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어서 한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주 어렸을 때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어느 날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와 교실로 가려고 왼쪽으로 돌았고, 그 친구는 계단을 내려가려고 걸어 내려오다 나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그 친구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는 순간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랐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그 친구는 진학하지 않는다는 얘길 얼핏 들었는데, 가정형편도 어려웠고 그 얼굴로 고등학교에 가면 뭐하나 하는 부모님의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 한번도 그 친구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들려오는 소문도 없었다.
얼마 전부터 TV에도 나오고 책도 쓴 모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고 신앙으로 새 삶을 개척해가는 그 모습.. 작은 일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가끔 낮아지는 자존감으로 인해 괴로울 때 그 자매의 삶을 참 많은 도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자매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중학교 때 그 친구를 생각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살아있긴 한 걸까? 그 친구는 너무 어릴 때 화상을 입어서 자기 얼굴이 어떤지도 모른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수술이란 건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그리 앞서가는 부모님이 아니라 사람 구실 못한다고 고등학교 진학도 시키지 않았다. 그 친구도 좋은 가정에서, 좋은 부모 밑에서 격려 받으며 잘 컸다면 숨어버리지 않고 지금쯤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살아가고 있겠지.
내가 겪어보지 않아하는 모진 말 같지만 TV에 나오던 그 자매는 그 자매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좋은 환경, 좋은 부모 가운데서 자신의 몫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복지관에 와서 로비의 TV를 보고 노는 아이들이 있다. 첨에는 한 명이었는데, 어느 순간 대여섯 명으로 그 무리가 커졌다. 아이들 대부분은 요즘에도 저런 애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꼬질꼬질, 손톱 밑에 새까만 때가 끼어있고, 까만 얼굴에 얼룩덜룩 마른버짐이 피고, 때가 여기저기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무엇인가 먹을 때면 쏜살같이 달려와서 ‘나도 주세요’라고 한다. 놀다가도 배가 고프면 사무실에 와서 ‘배고파요 과자주세요 떡볶이 사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두 손 내밀고 달라는 소리를 한 점 부끄럼 없이 너무나 당당하게 하는 모습이 정말 거지가 따로 없다 싶다. ‘너 나한테 과자 맡겨놨어?’ 란 말이 입 끝까지 도는데, 참으며 ‘선생님 과자 없어. 그리고 얘야,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랬지?’ 대답한다.
무리 아이들의 대부분은 한 부모 가정 아이거나 가정형편이 매우 어렵다. 그 아이들 중에 삼남매가 있는데, 몇 해 전 집고치기 사업을 해 준적이 있다. 집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참한지 직원도, 자원봉사자도, 취재를 나갔던 케이블방송 기자도 모두 울었다고 했다. 집을 고쳐주고 나서 복지관에서 아이들 보육이나 다른 면에서도 도와주겠다고 하자 그 아이들의 엄마는 내 인생이고 내 자식들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딱 잘라서 말했다. '클라이언트의 자기결정권' 본인이 원치 않을 때는 도울 수 없다. 딜레마를 느끼면서 우리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아이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이는 글을 잘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숫자도 100개 이상 세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골치 덩어리 문제아로 분류되고, 친구들은 놀아주지 않고, 가정에서도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손 벌려 얻어먹고 해가 지도록 떠돌아다니며 마음껏 놀다가 잠 잘 때가 되면 집으로 가는 아이들. 저런 부모만 만나지 않았어도 아이들이 저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일을 하면서 빈곤의 세습과 빈곤문화론에 대해 깊이 동의를 한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저 부모, 그 아래에서 저 아이가 저렇게 빈곤해지겠구나.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부자는 저렇게 부자일 수밖에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저렇게 또 가난할 수 밖에 없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개인이 부지런하지 못하고 노동의욕이 없고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내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돈이 교육을 만들어내고 돈이 권력을 만들어내고 돈이 지위를 만들어내고 돈이 돈을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가난은 가난을 낳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사람이 태반이다. 그걸 아는 내가 그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환경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커라’ 말하기 차마 부끄럽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까. 절망스러웠다. 내가 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가.
누구에게나 평등한 은총의 소식
그러다가, 복음에 대해 생각했다. 가난한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똑같이 열려있는 복음. 아니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으니 결론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더 유리한 복음. 복음은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 구원은 부의 순도 아니요, 세습도 아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듣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부모로부터 오는 배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얼마나 감사한가! 내가 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성공과 부가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는 복음에 관한 것이다. 이들이 이 땅에서 부를 누릴 수 없을지 모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니 그것이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하지 않는가.
절망에 있던 그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생각했다. 떡을 달라고 하는 그들에게 떡과 함께 복음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내가 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다. 저들이 처한 현재의 가난이 저들을 영원한 생명길로 인도한 바로 그 길이 될 수 있도록 서는 일,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죄로 죽은 우리가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 당신이 친히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다가온다. 오늘 복지관에서는 성탄행사를 했다. 산만하기 짝이 없는 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겠다 약속하고 앉혀놓고 행사를 진행했다. 이제 오늘 받아간 선물과 비교할 수 없는 약속이 들어있는 그 복음을 이들에게 전해야겠다.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 그것이 전해지는 성탄절이었음 좋겠다. 복된 성탄!
/ 제자들교회 한소정 양 제공
어느 날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와 교실로 가려고 왼쪽으로 돌았고, 그 친구는 계단을 내려가려고 걸어 내려오다 나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그 친구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는 순간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랐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그 친구는 진학하지 않는다는 얘길 얼핏 들었는데, 가정형편도 어려웠고 그 얼굴로 고등학교에 가면 뭐하나 하는 부모님의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 한번도 그 친구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들려오는 소문도 없었다.
얼마 전부터 TV에도 나오고 책도 쓴 모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고 신앙으로 새 삶을 개척해가는 그 모습.. 작은 일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가끔 낮아지는 자존감으로 인해 괴로울 때 그 자매의 삶을 참 많은 도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자매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중학교 때 그 친구를 생각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살아있긴 한 걸까? 그 친구는 너무 어릴 때 화상을 입어서 자기 얼굴이 어떤지도 모른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수술이란 건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그리 앞서가는 부모님이 아니라 사람 구실 못한다고 고등학교 진학도 시키지 않았다. 그 친구도 좋은 가정에서, 좋은 부모 밑에서 격려 받으며 잘 컸다면 숨어버리지 않고 지금쯤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살아가고 있겠지.
내가 겪어보지 않아하는 모진 말 같지만 TV에 나오던 그 자매는 그 자매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좋은 환경, 좋은 부모 가운데서 자신의 몫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복지관에 와서 로비의 TV를 보고 노는 아이들이 있다. 첨에는 한 명이었는데, 어느 순간 대여섯 명으로 그 무리가 커졌다. 아이들 대부분은 요즘에도 저런 애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꼬질꼬질, 손톱 밑에 새까만 때가 끼어있고, 까만 얼굴에 얼룩덜룩 마른버짐이 피고, 때가 여기저기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무엇인가 먹을 때면 쏜살같이 달려와서 ‘나도 주세요’라고 한다. 놀다가도 배가 고프면 사무실에 와서 ‘배고파요 과자주세요 떡볶이 사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두 손 내밀고 달라는 소리를 한 점 부끄럼 없이 너무나 당당하게 하는 모습이 정말 거지가 따로 없다 싶다. ‘너 나한테 과자 맡겨놨어?’ 란 말이 입 끝까지 도는데, 참으며 ‘선생님 과자 없어. 그리고 얘야,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랬지?’ 대답한다.
무리 아이들의 대부분은 한 부모 가정 아이거나 가정형편이 매우 어렵다. 그 아이들 중에 삼남매가 있는데, 몇 해 전 집고치기 사업을 해 준적이 있다. 집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참한지 직원도, 자원봉사자도, 취재를 나갔던 케이블방송 기자도 모두 울었다고 했다. 집을 고쳐주고 나서 복지관에서 아이들 보육이나 다른 면에서도 도와주겠다고 하자 그 아이들의 엄마는 내 인생이고 내 자식들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딱 잘라서 말했다. '클라이언트의 자기결정권' 본인이 원치 않을 때는 도울 수 없다. 딜레마를 느끼면서 우리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아이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이는 글을 잘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숫자도 100개 이상 세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골치 덩어리 문제아로 분류되고, 친구들은 놀아주지 않고, 가정에서도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손 벌려 얻어먹고 해가 지도록 떠돌아다니며 마음껏 놀다가 잠 잘 때가 되면 집으로 가는 아이들. 저런 부모만 만나지 않았어도 아이들이 저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일을 하면서 빈곤의 세습과 빈곤문화론에 대해 깊이 동의를 한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저 부모, 그 아래에서 저 아이가 저렇게 빈곤해지겠구나.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부자는 저렇게 부자일 수밖에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저렇게 또 가난할 수 밖에 없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개인이 부지런하지 못하고 노동의욕이 없고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내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돈이 교육을 만들어내고 돈이 권력을 만들어내고 돈이 지위를 만들어내고 돈이 돈을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가난은 가난을 낳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사람이 태반이다. 그걸 아는 내가 그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환경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커라’ 말하기 차마 부끄럽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까. 절망스러웠다. 내가 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가.
누구에게나 평등한 은총의 소식
그러다가, 복음에 대해 생각했다. 가난한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똑같이 열려있는 복음. 아니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으니 결론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더 유리한 복음. 복음은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 구원은 부의 순도 아니요, 세습도 아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듣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부모로부터 오는 배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얼마나 감사한가! 내가 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성공과 부가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는 복음에 관한 것이다. 이들이 이 땅에서 부를 누릴 수 없을지 모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니 그것이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하지 않는가.
절망에 있던 그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생각했다. 떡을 달라고 하는 그들에게 떡과 함께 복음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내가 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다. 저들이 처한 현재의 가난이 저들을 영원한 생명길로 인도한 바로 그 길이 될 수 있도록 서는 일,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죄로 죽은 우리가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 당신이 친히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다가온다. 오늘 복지관에서는 성탄행사를 했다. 산만하기 짝이 없는 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겠다 약속하고 앉혀놓고 행사를 진행했다. 이제 오늘 받아간 선물과 비교할 수 없는 약속이 들어있는 그 복음을 이들에게 전해야겠다.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 그것이 전해지는 성탄절이었음 좋겠다. 복된 성탄!
/ 제자들교회 한소정 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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