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세대교체, 교회연합, 2세 사역, 부흥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들고 시카고 지역 목회자 40인을 만난다. 이 인터뷰를 통해 시카고 한인교회의 여론을 수렴하고 한인교회의 미래와 나아갈 바를 조명하고자 함이다. 40인 인터뷰는 시카고 교계의 발전을 위한, 가능한 모든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세, 목회자의 교단적 배경, 목회 연수 등에 관계없는 순으로 게재된다.
스물여덟번째 인터뷰는 굳뉴스장로교회 최문선 목사다. 그는 현재 시카고 지역 한인 목회자들의 연합 모임인 시카고한인교역자회의 회장을 맡아 섬기고 있다. 중학생 때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그는 안동에 위치한 경안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19세부터 목사가 없는 교회에 담임 전도사가 되어 농촌 목회를 시작했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예장통합 총회에서는 “목사로 안수받기 위해서 2년간 단독목회를 해야 한다”는 헌법조항이 신설돼 그는 강원도로 내려가 단독목회를 시작했다. 1981년 목사로 안수 받고 서울상도교회 부목사, 평택지제교회 담임목사, 그리고 서울 서초동 천성교회를 담임하며 분당에 종교부지를 매입하고 건축까지 앞둔 상태에서 다시 송파구 가락동에서 개척을 시작했다. 옥탑방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빈궁한 개척 목회 시절에도 목회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 않고 목회한 후 2000년 48세 되던 해에 이민목회에 뜻을 두고 도미했다. 북일리노이한인교회, 참길장로교회, 캔사스영락교회 등에서 목회했으며 맥코믹신학교에서 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굳뉴스장로교회를 개척해 담임으로 시무하고 있다.
-교역자회 회장이 되기 전에도 교계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회장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차이점은 무엇이던가요?
회장이 되기 전에는 교계 일이란 것이 막연했습니다. 일단 회장이 있으니 회장이 행사를 다 주관하고 추진하기 때문에 돕는 입장에서는 그 안의 고충까지 모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참 사람 모으기가 힘들구나” 정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회장이 되고 보니 역시 힘든 일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단체든지 행사가 성공하려면 사람이 와야 하는데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행사 자체가 힘듭니다. 어떤 분들은 “원래 시카고가 그렇습니다”라고 하시지만 회장이 된 입장에서 참여도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지요. 시카고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하나되어서 일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러 목회자들을 한 자리에 참여시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 참여가 안된다고 보십니까?
그게 저의 마음에도 늘 고민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행사 준비도 잘 되어야겠고 거기에 따른 재원도 충분히 확보가 되어야겠지요. 무엇보다, 저도 그렇지만, 모든 임원이 일선 목회자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교역자회 일만 할 수도 없고 교역자회 자체적으로 재원 충당도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많이 준비하면 많이 참여하고 적게 준비하면 적게 참여합니다. 지금까지 아쉬움이 남는 일도 있지만 그동안 협력해 준 임원들과 목회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래도 전임 사역자도 없고 회장의 임기도 1년이라 사업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큽니다.
저도 그 생각을 하는데 연중행사 가운데 신년하례회와 체육대회가 가장 대표적인 교역자회의 행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연중 정기행사 외에도 교역자회가 시카고 지역의 목회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교역자회의 일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관상 교역자회는 친목단체입니다. 그러나 “놀자”고 해서 친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육적 힘을 주고 목회자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역자회도 어떤 목표 아래 좋은 사업을 만들어 5-10년 정도 중장기 플랜을 갖고 추진하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회장의 임기가 1년인 것은 행사가 단발성으로 끝나게 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단기적인 행사를 통해서라도 목회자들에게 힘을 주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하나된 친교를 할 수 있다면 이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역자회가 목회자들의 친목을 위한 단체라고 할 때, 사실 교역자회 외에도 수많은 단체들이 정기, 비정기적으로 목회자의 연합과 친목을 돕고 있습니다. 교역자회가 꼭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교역자회든 어떤 단체든 필요에 의해서 조직이 됩니다. 가령, 이 지역에서 잘되는 목회자들의 모임으로 목사부부합창단이나 테니스회, 탁구동호회 등이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취미가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건전한 연합입니다. 그러나 교역자회는 취미를 넘어서 목회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 교단과 교파를 넘어서 친교하고 목회정보도 나누고 어떻게 해야 시카고 지역에서 교회를 잘 섬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이런 점에서 취미를 중심으로 모인 단체들이 할 수 없는 더 큰 연합의 원을 그릴 수 있습니다.
특히 올 회기 교역자회는 지난 신년하례회 때 홀사모 돕기를 위한 작은 행사를 했습니다. 이 지역 목회자들이 모여 1500불 상당의 도움을 홀사모들에게 전했고 목회자들의 호응도 아주 좋았습니다. 이제 교역자회는 시카고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으로서 목회자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 생각하는 모임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취임 당시부터 시카고 지역 목회자 공석 현상에 관한 걱정을 해 오셨습니다. 그 현상에 관해서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목회자의 생각이 다르고 성도의 생각이 다르겠으나 공석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10개에서 20개에 이르는 교회에 공석 현상이 왜 갑자기 생겼느냐, 그 원인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인간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의 관리와 운영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교리적, 교회법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흠과 단점이 있는 법이기 때문에 사실 이런 문제가 교회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문제가 교회가 아닌 곳에서 발생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교회는 그렇게 넘어갈 수만은 없겠습니다. 그 배후, 그 배후의 세력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단체는 경험과 지식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말씀 안에서 통찰력을 갖고 이 문제를 바라 보아야겠습니다. 과연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고 싶습니다. 인간관계든, 도덕이나 윤리 문제든, 교리적 문제든,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없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나 장로가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과연 어떨까요? 두 존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상대를 비난하기보다는 서로 존중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겸허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주도권을 갖고자 하는 것도 내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대하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 여러가지가 아니라 하나일텐데 우리가 그 뜻을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잘 판단했을 때는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답을 도출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교역자회가 이 지역에 새로 오는 목회자들이나, 갈등 속에 있는 목회자들을 잘 케어하는 일을 감당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잘 케어하면 교역자회의 참여도나 위상도 높아질 수 있을텐데요.
우리의 부족했던 점 중 하나입니다. 사실 거기서 출발을 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작년에 우리가 새로 이 지역에 오신 목회자들을 영접하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연합 환영예배를 드려주자는 생각까지 했는데 그것이 환영받는 목회자 입장에서는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 중단했습니다. 대신 교역자회의 행사가 있을 때 개별적으로 초청해서 인사하고 교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는 6월 달에는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교역자회가 추진하는데 그 자리에 새로 온 목사님들을 많이 모셔 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 지역에 새로 목회자가 오더라도 교역자회 입장에서는 일일이 알고 초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올해 교역자회는 각 교단별로 다양하게 임원을 안배했습니다. 타 교단은 몰라도 자기 교단만큼은 어떤 목회자가 이동해 오는지 잘 알 수 있기에 다양한 교단 배경을 가진 임원들이 신임 목회자들을 교역자회로 모시고 있습니다.
-교역자회를 활성화시킬 방법이 있으신지요?
사실 목회자들의 참여가 떨어지는 또 한가지 원인은 교회 행사나 노회 행사, 각종 동호회 행사가 교역자회 행사와 겹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행사를 앞두고 행사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 왔는데 그 비용이나 에너지가 상당히 소모되기에 그것마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 이메일을 수집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한 250여 개를 확보했습니다. 요즘은 비용이 절감되는 이메일로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를 홍보하고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교역자회 웹사이트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다른 일정 때문에 교역자회 행사에 오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그 행사에 관해서 알게 되고 행사에서 나온 좋은 목회 정보를 웹사이트를 통해 얻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프라인 상의 연합을 넘어서 온라인 상에서 목회자들이 교역자회로부터 조금 더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터넷 상으로는 시카고뿐 아니라 위스콘신이나 아이오와, 미네소타 쪽의 목사님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고 오프라인 상의 참여까지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한인교회 내의 2세 사역에 관한 모델 정립이 시급하다는 의견에 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다양한 모델과 대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합이 안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2세는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분들은 “2세가 한국어를 배워서 1세에게 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세가 독립하되 1세가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2세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2세 목회의 성공을 “2세들이 영어 혹은 한국어로 2세 사역을 잘해 가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이것은 언어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하건 영어로 하건, 함께 있건 분리되건 목회의 성공은 구원이란 문제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의 2세 목회는 구원과 관련지어 성공을 말해야지 그것이 “영어로 되느냐, 한국어로 되느냐”만에 주목하면 논점을 이탈한 것입니다. 2세들이 영어를 쓰며 구원받고 복음이 확장된다면 2세 교회가 1세 교회 밖으로 뛰어 나갔다고 그것을 실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시 그들이 1세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걸 또 성공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2세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1세들과 함께 예배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우리는 한국사람이며 우리 민족이 앞으로도 계속 미국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존속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2세들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결국 이민사회가 미국사회 속으로 종속될 것이라 믿는 분들입니다. 이 두가지 중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두 갈래 길 중에 어떤 길이 더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지 고민하고 그것에 성공의 초점을 옮겨야겠습니다.
영어만 사용하는 2세들을 억지로 1세에 묶어 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영어로 구원을 체험하고 복음을 배운다면 과감히 놓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1세와 2세가 함께 해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2세가 어릴 때부터 한국말을 가르치고 교회에서 1세와 2세가 한국어로 함께 예배드리며 신앙을 나누어 가야 합니다. 과거에 한인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인의 티를 벗어야 주류사회로 들어갈 수 있다면서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만 쓰게 했고, 영어를 잘하면 그것이 성공인 것처럼 자녀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에만 오면 “넌 왜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면박을 줍니다. 1세와 2세가 함께 있어야 한다면서도 2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려는 노력은 등한시 한 것입니다.
-시카고 지역이 보수적이라든지 목회 풍토가 타 지역에 비해 척박하다고 보십니까?
시카고든, LA든, 뉴욕이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LA나 뉴욕의 경우는 대형교회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은 그 교회에 소속된 분들이 열심히 교회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LA나 뉴욕 쪽은 아무래도 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고 한국에서 장로나 권사 등 직분을 맡아 교회를 섬기던 분들이 많이 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카고 지역은 인원 자체가 적고 또 많은 분들이 유학생으로서 옵니다. 유학생은 형편상 남을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신앙인의 모델이 될만한 섬김의 지도자상을 배우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모델이 없으니 자신의 생각에 좋다고 느껴지는 모델을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인 깊은 훈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대로 하는 것입니다. 공부나 사업이 영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영성이 공부나 사업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공부하듯 이성적으로 하거나 사업하듯 계산적으로 하니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을 이론적으로 사업적으로 잘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 보기가 어렵겠지요.
게다가 지금은 부유한 시대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간절함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 아닌 세속에 의지하는 인생이기에 말씀을 ‘아멘’으로 받기보다 이성의 힘으로 걸러 내려 합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교회가 부흥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시카고 지역의 부흥에 관한 고민도 교역자회의 임무겠지요?
교회가 이제는 초점을 부흥에 둘 것인지 아니면 말씀에 둘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부흥에 초점을 두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 하셨고 어쨌든 교회는 부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흥하기 위해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옳지 않습니다. 세속적 경영학과 마케팅 기법에 따라 숫자가 많아진다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주장할 수 없지 않습니까?
큰 교회는 성공한 교회, 작은 교회는 실패한 교회, 큰 교회 목사는 성공한 목사, 작은 교회 목사는 실패한 목사라는 이분법은 더 큰 문제이며 우리 스스로 그렇게 교회를 바라보아서는 더더욱 안되겠습니다. 한국은 큰 교회도 많고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의 문제들이 세상으로 터져 나와서 교회가 비난받고 있습니다. 부흥을 추구하는 개신교의 교세가 그렇게 감소해 갈 때, 가톨릭은 부흥을 추구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성장을 위해 경영학이나 마케팅,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적용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길을 갔습니다. 개신교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수나 양적으로 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 목회하시면서 열두 제자를 남기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지만 결국 다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적더라도 참된 성도,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단히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혁은 세상의 진보주의나 개혁의식과 다릅니다. 보수주의자는 구태의연하고 진보주의자는 미래지향적이라는 시각이 교회에도 은연 중 투영돼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늘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이미 성경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입니다. 종교개혁, 요시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 모두,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이었고 교회의 표준을 하나님이 이미 가르쳐 주신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개혁의 기준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표준에 따라 개혁된 교회만이 진정한 부흥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스물여덟번째 인터뷰는 굳뉴스장로교회 최문선 목사다. 그는 현재 시카고 지역 한인 목회자들의 연합 모임인 시카고한인교역자회의 회장을 맡아 섬기고 있다. 중학생 때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그는 안동에 위치한 경안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19세부터 목사가 없는 교회에 담임 전도사가 되어 농촌 목회를 시작했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예장통합 총회에서는 “목사로 안수받기 위해서 2년간 단독목회를 해야 한다”는 헌법조항이 신설돼 그는 강원도로 내려가 단독목회를 시작했다. 1981년 목사로 안수 받고 서울상도교회 부목사, 평택지제교회 담임목사, 그리고 서울 서초동 천성교회를 담임하며 분당에 종교부지를 매입하고 건축까지 앞둔 상태에서 다시 송파구 가락동에서 개척을 시작했다. 옥탑방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빈궁한 개척 목회 시절에도 목회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 않고 목회한 후 2000년 48세 되던 해에 이민목회에 뜻을 두고 도미했다. 북일리노이한인교회, 참길장로교회, 캔사스영락교회 등에서 목회했으며 맥코믹신학교에서 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굳뉴스장로교회를 개척해 담임으로 시무하고 있다.
-교역자회 회장이 되기 전에도 교계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회장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차이점은 무엇이던가요?
회장이 되기 전에는 교계 일이란 것이 막연했습니다. 일단 회장이 있으니 회장이 행사를 다 주관하고 추진하기 때문에 돕는 입장에서는 그 안의 고충까지 모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참 사람 모으기가 힘들구나” 정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회장이 되고 보니 역시 힘든 일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단체든지 행사가 성공하려면 사람이 와야 하는데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행사 자체가 힘듭니다. 어떤 분들은 “원래 시카고가 그렇습니다”라고 하시지만 회장이 된 입장에서 참여도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지요. 시카고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하나되어서 일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러 목회자들을 한 자리에 참여시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 참여가 안된다고 보십니까?
그게 저의 마음에도 늘 고민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행사 준비도 잘 되어야겠고 거기에 따른 재원도 충분히 확보가 되어야겠지요. 무엇보다, 저도 그렇지만, 모든 임원이 일선 목회자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교역자회 일만 할 수도 없고 교역자회 자체적으로 재원 충당도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많이 준비하면 많이 참여하고 적게 준비하면 적게 참여합니다. 지금까지 아쉬움이 남는 일도 있지만 그동안 협력해 준 임원들과 목회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래도 전임 사역자도 없고 회장의 임기도 1년이라 사업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큽니다.
저도 그 생각을 하는데 연중행사 가운데 신년하례회와 체육대회가 가장 대표적인 교역자회의 행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연중 정기행사 외에도 교역자회가 시카고 지역의 목회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교역자회의 일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관상 교역자회는 친목단체입니다. 그러나 “놀자”고 해서 친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육적 힘을 주고 목회자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역자회도 어떤 목표 아래 좋은 사업을 만들어 5-10년 정도 중장기 플랜을 갖고 추진하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회장의 임기가 1년인 것은 행사가 단발성으로 끝나게 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단기적인 행사를 통해서라도 목회자들에게 힘을 주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하나된 친교를 할 수 있다면 이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역자회가 목회자들의 친목을 위한 단체라고 할 때, 사실 교역자회 외에도 수많은 단체들이 정기, 비정기적으로 목회자의 연합과 친목을 돕고 있습니다. 교역자회가 꼭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교역자회든 어떤 단체든 필요에 의해서 조직이 됩니다. 가령, 이 지역에서 잘되는 목회자들의 모임으로 목사부부합창단이나 테니스회, 탁구동호회 등이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취미가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건전한 연합입니다. 그러나 교역자회는 취미를 넘어서 목회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 교단과 교파를 넘어서 친교하고 목회정보도 나누고 어떻게 해야 시카고 지역에서 교회를 잘 섬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이런 점에서 취미를 중심으로 모인 단체들이 할 수 없는 더 큰 연합의 원을 그릴 수 있습니다.
특히 올 회기 교역자회는 지난 신년하례회 때 홀사모 돕기를 위한 작은 행사를 했습니다. 이 지역 목회자들이 모여 1500불 상당의 도움을 홀사모들에게 전했고 목회자들의 호응도 아주 좋았습니다. 이제 교역자회는 시카고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으로서 목회자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 생각하는 모임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취임 당시부터 시카고 지역 목회자 공석 현상에 관한 걱정을 해 오셨습니다. 그 현상에 관해서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목회자의 생각이 다르고 성도의 생각이 다르겠으나 공석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10개에서 20개에 이르는 교회에 공석 현상이 왜 갑자기 생겼느냐, 그 원인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인간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의 관리와 운영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교리적, 교회법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흠과 단점이 있는 법이기 때문에 사실 이런 문제가 교회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문제가 교회가 아닌 곳에서 발생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교회는 그렇게 넘어갈 수만은 없겠습니다. 그 배후, 그 배후의 세력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단체는 경험과 지식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말씀 안에서 통찰력을 갖고 이 문제를 바라 보아야겠습니다. 과연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고 싶습니다. 인간관계든, 도덕이나 윤리 문제든, 교리적 문제든,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없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나 장로가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과연 어떨까요? 두 존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상대를 비난하기보다는 서로 존중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겸허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주도권을 갖고자 하는 것도 내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대하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 여러가지가 아니라 하나일텐데 우리가 그 뜻을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잘 판단했을 때는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답을 도출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최문선 목사는 그동안 고민해 온 교계의 문제를 털어 놓으며 진지한 모습으로 해답과 방법을 제시했다. |
우리의 부족했던 점 중 하나입니다. 사실 거기서 출발을 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작년에 우리가 새로 이 지역에 오신 목회자들을 영접하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연합 환영예배를 드려주자는 생각까지 했는데 그것이 환영받는 목회자 입장에서는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 중단했습니다. 대신 교역자회의 행사가 있을 때 개별적으로 초청해서 인사하고 교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는 6월 달에는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교역자회가 추진하는데 그 자리에 새로 온 목사님들을 많이 모셔 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 지역에 새로 목회자가 오더라도 교역자회 입장에서는 일일이 알고 초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올해 교역자회는 각 교단별로 다양하게 임원을 안배했습니다. 타 교단은 몰라도 자기 교단만큼은 어떤 목회자가 이동해 오는지 잘 알 수 있기에 다양한 교단 배경을 가진 임원들이 신임 목회자들을 교역자회로 모시고 있습니다.
-교역자회를 활성화시킬 방법이 있으신지요?
사실 목회자들의 참여가 떨어지는 또 한가지 원인은 교회 행사나 노회 행사, 각종 동호회 행사가 교역자회 행사와 겹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행사를 앞두고 행사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 왔는데 그 비용이나 에너지가 상당히 소모되기에 그것마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 이메일을 수집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한 250여 개를 확보했습니다. 요즘은 비용이 절감되는 이메일로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를 홍보하고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교역자회 웹사이트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다른 일정 때문에 교역자회 행사에 오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그 행사에 관해서 알게 되고 행사에서 나온 좋은 목회 정보를 웹사이트를 통해 얻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프라인 상의 연합을 넘어서 온라인 상에서 목회자들이 교역자회로부터 조금 더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터넷 상으로는 시카고뿐 아니라 위스콘신이나 아이오와, 미네소타 쪽의 목사님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고 오프라인 상의 참여까지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한인교회 내의 2세 사역에 관한 모델 정립이 시급하다는 의견에 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다양한 모델과 대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합이 안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2세는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분들은 “2세가 한국어를 배워서 1세에게 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세가 독립하되 1세가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2세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2세 목회의 성공을 “2세들이 영어 혹은 한국어로 2세 사역을 잘해 가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이것은 언어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하건 영어로 하건, 함께 있건 분리되건 목회의 성공은 구원이란 문제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의 2세 목회는 구원과 관련지어 성공을 말해야지 그것이 “영어로 되느냐, 한국어로 되느냐”만에 주목하면 논점을 이탈한 것입니다. 2세들이 영어를 쓰며 구원받고 복음이 확장된다면 2세 교회가 1세 교회 밖으로 뛰어 나갔다고 그것을 실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시 그들이 1세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걸 또 성공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2세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1세들과 함께 예배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우리는 한국사람이며 우리 민족이 앞으로도 계속 미국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존속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2세들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결국 이민사회가 미국사회 속으로 종속될 것이라 믿는 분들입니다. 이 두가지 중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두 갈래 길 중에 어떤 길이 더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지 고민하고 그것에 성공의 초점을 옮겨야겠습니다.
영어만 사용하는 2세들을 억지로 1세에 묶어 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영어로 구원을 체험하고 복음을 배운다면 과감히 놓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1세와 2세가 함께 해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2세가 어릴 때부터 한국말을 가르치고 교회에서 1세와 2세가 한국어로 함께 예배드리며 신앙을 나누어 가야 합니다. 과거에 한인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인의 티를 벗어야 주류사회로 들어갈 수 있다면서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만 쓰게 했고, 영어를 잘하면 그것이 성공인 것처럼 자녀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에만 오면 “넌 왜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면박을 줍니다. 1세와 2세가 함께 있어야 한다면서도 2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려는 노력은 등한시 한 것입니다.
-시카고 지역이 보수적이라든지 목회 풍토가 타 지역에 비해 척박하다고 보십니까?
시카고든, LA든, 뉴욕이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LA나 뉴욕의 경우는 대형교회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은 그 교회에 소속된 분들이 열심히 교회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LA나 뉴욕 쪽은 아무래도 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고 한국에서 장로나 권사 등 직분을 맡아 교회를 섬기던 분들이 많이 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카고 지역은 인원 자체가 적고 또 많은 분들이 유학생으로서 옵니다. 유학생은 형편상 남을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신앙인의 모델이 될만한 섬김의 지도자상을 배우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모델이 없으니 자신의 생각에 좋다고 느껴지는 모델을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인 깊은 훈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대로 하는 것입니다. 공부나 사업이 영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영성이 공부나 사업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공부하듯 이성적으로 하거나 사업하듯 계산적으로 하니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을 이론적으로 사업적으로 잘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 보기가 어렵겠지요.
게다가 지금은 부유한 시대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간절함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 아닌 세속에 의지하는 인생이기에 말씀을 ‘아멘’으로 받기보다 이성의 힘으로 걸러 내려 합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교회가 부흥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시카고 지역의 부흥에 관한 고민도 교역자회의 임무겠지요?
교회가 이제는 초점을 부흥에 둘 것인지 아니면 말씀에 둘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부흥에 초점을 두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 하셨고 어쨌든 교회는 부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흥하기 위해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옳지 않습니다. 세속적 경영학과 마케팅 기법에 따라 숫자가 많아진다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주장할 수 없지 않습니까?
큰 교회는 성공한 교회, 작은 교회는 실패한 교회, 큰 교회 목사는 성공한 목사, 작은 교회 목사는 실패한 목사라는 이분법은 더 큰 문제이며 우리 스스로 그렇게 교회를 바라보아서는 더더욱 안되겠습니다. 한국은 큰 교회도 많고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의 문제들이 세상으로 터져 나와서 교회가 비난받고 있습니다. 부흥을 추구하는 개신교의 교세가 그렇게 감소해 갈 때, 가톨릭은 부흥을 추구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성장을 위해 경영학이나 마케팅,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적용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길을 갔습니다. 개신교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수나 양적으로 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 목회하시면서 열두 제자를 남기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지만 결국 다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적더라도 참된 성도,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단히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혁은 세상의 진보주의나 개혁의식과 다릅니다. 보수주의자는 구태의연하고 진보주의자는 미래지향적이라는 시각이 교회에도 은연 중 투영돼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늘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이미 성경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입니다. 종교개혁, 요시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 모두,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이었고 교회의 표준을 하나님이 이미 가르쳐 주신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개혁의 기준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표준에 따라 개혁된 교회만이 진정한 부흥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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