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도회에 다녀왔다. 그러나 기도는 실종되고 변형된 심령 부흥회였다. 참석한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 하니 참으로 답답한 것은 나 혼자 뿐인가? 몇일 고민 하고 또 따져 보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이참에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부흥회는 이제 그만하자고 제안하고자 한다.

언제부터 한국 교회가 부흥회란 제목으로 집회를 열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한국 초대교회시절의 집회는 성경공부중심의 사경회였다. 평양의 대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서 일어났고 수 십리 밖에서 이불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집회 장소를 찾는 성도들로 집회 장소는 미어터졌던 것이다.

당시 사경회 강사는 말씀 외적인 것은 전하지도 않았고, 또 청중들도 순수한 말씀 중심에서 은혜를 사모하며 대 각성을 통한 회개의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은 건전한 사경회는 사라지고 오직 양적 물질적 부흥을 희구하는 부흥회만 남았다. 무엇보다 부흥사들의 문제는 심각하다. 부흥사들 자체도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부흥사협회를 조직하고(부흥사협회가 많기도 하다) 심지어 부흥사 학교를 개설하여 자정노력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왕에 부흥사들에게 하고 싶었던 제안들을 나열해 본다, 우선 대부분의 부흥사들이 본문을 정하면 그 본문에 충실하게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데 본 문은 사라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간데 없이 펼친다. 시간개념이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시간 문제를 거론하는 자라면 그자는 성령 충만하지 않은 자라 일갈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또 제목과 거리가 먼 강론이라면 차라리 無題가 정직할 것이다. 왜 그렇게 간증을 빙자한 영웅적 경험을 강조하는지 알 수 없고 게다가 청중은 아멘 추임새로 신명을 돋우니 한판 잘 짜여진 놀이마당과도 같다.

또 부흥사 중에는 과거에 힘깨나 썼던 분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지나간 때가 족하다 하면서도 은근한 미련의 일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조금 더 용감하게는 지금이라도 완력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위협을 적당이 섞으므로 청중을 위축시킨다. 특히나 성도 중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을 어떻게 제압했는가에 이를 때에는 무협지를 뺨친다. 그리고 빼 놓지 않고 등장하는 레퍼토리는 교회당 건축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셨는가를 말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에 무임승차시킨다. 다음으로는 자신의 집회를 통하여 신유가 일어나 불치병을 고침을 받은 자들이 부지기수라 하면서 은사의 면모를 과시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것뿐인가? 전천후 기도응답 시리즈는 듣는 이로 하여금 환상에 젖게하기에 충분하고, 기도열심에 이르러서는 듣는이로 하여금 한없는 자괴감에 빠지게 하며,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과도한 헌금을 믿음으로 척척 해서 하나님의 이쁨을 어떻게 받았는가 에 이를때면 한숨만 나온다. 이런 정도에 이르면 웬만한 청중은 KO 일보직전이 되고 그러면 별미안수 기도니, 특별 안수기도니, 작정헌금을 위한 특별 안수 기도들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안 넘어갈 이들이 없게 된다.

부흥사중에는 디아스포라 이민교회들을 일년 열두달 찾아 다니는 초 특급 에너제틱한 분들도 있다. 예외없이 본 교회에서 비행기표를 끊어주고 사례비는 사례비대로 받는다 이런 부흥회를 여는 교회들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이쯤 되면 부흥회를 고만하자는 제안은 공허한 메아리는 아닐 성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