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세대교체, 교회연합, 2세 사역, 부흥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들고 시카고 지역 목회자 40인을 만난다. 이 인터뷰를 통해 시카고 한인교회의 여론을 수렴하고 한인교회의 미래와 나아갈 바를 조명하고자 함이다. 40인 인터뷰는 시카고 교계의 발전을 위한, 가능한 모든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세, 목회자의 교단적 배경, 목회 연수 등에 관계없는 순으로 게재된다.
스물세번째, 네번째 인터뷰는 전성진, 전성철 형제 목회자다. 둘다 보수 중의 보수라는 고신측 목회자다. 두 형제를 이해하려면 아버지 전은상 목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신에서 49년간 목회하고 현재 은퇴한 아버지 전은상 목사는 시무하던 용호남교회를 한국 고신총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한상동 목사가 오른팔처럼 아끼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은퇴 목사가 후임자나 교회에 관여하면 교회가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후임자 선정 등 모든 절차를 당회에 맡기고 은퇴 일주일만에 아들들이 목회하는 시카고로 훌쩍 건너 왔다. 5남1녀 중 장남인 전성진, 차남인 전성철이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가 됐다. 장남이 유학 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소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음악대학에 입학허가와 장학금을 약속받은 후, 입학할 수 있게 첫 학기 학비만 도와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그 돈이면 교회를 몇 개 개척하는지 아느냐”하면서 차갑게 거절했던 아버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들이다. 그 학교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전성진 목사는 오히려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장학금으로 받으며 석사를 마치고 아메리칸 컨서바토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대학 교수로 여러 제자들을 키웠으며 MBC 방송국에서 음악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던 중 모든 것을 버리고 돌연 시카고로 돌아와 척박한 교회음악 살리기에 나섰다. 대형교회 지휘자로 활동하다 현재는 갈릴리연합감리교회의 음악목사로 사역하며 찬양콘서바토리, 목사부부합창단을 시작해 시카고 교회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전성철 목사는 용호남교회에서 8년동안 아버지를 도와 부목사로 시무하며 교회 내에서는 차기 담임목사로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맥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전세계 유학생 사역에 비전을 갖게 된 후, 이민목회에 뛰어 들어 여수룬교회를 개척했다. 전성철 목사는 직전 회기 시카고지역한인교회협의회 회장도 역임했다.
- 두 형제 목사님을 한 자리에 모시게 됐습니다. 전성철 목사님은 지난 회기 교협 회장이셨는데 임기를 마치고 나니 어떠신가요?
전성철 목사: 임기 중에는 정신적 중압감이 아무래도 컸습니다. 시카고 지역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전에는 개교회의 일일 뿐이었지만 회장이 되고 나니 그런 일들에 항상 예민하게 신경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특히 교계의 많은 일들에 대한 책임이 회장에게 따르기 때문에, 하는 사업은 적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정신적인 짐은 작지 않았습니다. 전 교협 총회에서 김광태 신임회장에게 “나는 이제 광명을 보게 됐고 당신은 이제 긴 어둠의 터널로 들어 갔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회자들이 언제나 회장에 대한 기도를 잊지 말고 교계 연합 사업에 협조해 주길 당부합니다.
- 시카고 교계는 연합사업이 척박하다고 하는데 경험상 그 원인으로는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전성철 목사: 개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연합사업에 어려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가 돌연히 사임을 해서 교회가 공석이 된다든지 하는 일들입니다. 저는 이 현상이 목회자의 잘못인지 성도들의 잘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계 차원에서 교회연합의 주제를 던졌을 때 목회자 공석 현상이나 교회의 분열 양상은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연합 사업에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지역에 오는 목회자들은 유학파들로 공부도 많이 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꿈도 크고 비전도 높습니다. 그런데 시카고에서 그에 상응하는 소명감과 자존감을 못 찾을 때 교회를 떠나 버리곤 합니다. 목사의 잘못만입니까? 아닙니다. 견디고 버티다 못해 떠나가는 목회자만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선교사를 하면 현지에서 인정이라도 받지만 이민목회는 교인의 수가 적으면서 수백명 목회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니 그 힘듦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일에 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개척멤버 한 명도 없이 혼자서 개척을 해서 지금의 제직들을 세웠기 때문에 목회자 후임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실체를 잘 모릅니다. 단지, 서로 조금 더 인내하며 잘 다듬어지면 모든 일들이 선한 방향으로 해결되어 갈 것 같습니다.
연합이 잘 안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교인들의 수평이동 때문입니다. 자녀 교육 등의 문제로 젊은 성도들이 대형교회로 옮겨가는 현상 때문에 중소형교회 목회자들은 대형교회에 적지 않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중소형교회 목회자들은 수십년을 이 지역에서 목회한 연륜이 있는 분들인 경우가 많고 현재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부임한지 오래되지 않은 젊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중소형교회와 대형교회의 어색함에 더해 세대 교체 과정 중 발생한 현실적 거리감은 교회 연합에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또 현실적으로 대형교회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큰 집회를 열 수 있으니 교회연합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중소형교회는 힘을 모아야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니 교회 연합이 중소형교회 위주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 전성진 목사님께서는 시카고 지역에서 30년 이상 계셨는데 전성철 목사님이 지적하신 교회의 권위 실추 문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성진 목사: 저의 전문 분야는 음악이지만 저도 이민목회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유학 시절 여수룬교회를 개척했습니다. 1년 목회해 불신자 청년들 1백명이 모였습니다. 그때의 청년들이 지금은 시카고 교계의 장로, 안수집사들이 됐습니다. 저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고 얼마 후, 시카고에 유학 중이던 전성철 목사가 여수룬교회를 다시 개척했습니다.
이민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라 오라” 해야지 “가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은 가지 않으면서 성도들 보고 가라고 한다고 가겠습니까? 자신이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 복받는 모습을 보여 주면 성도들은 따라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 갑니다. 이민목회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민사회는 아무래도 힘듭니다. 목회자가 성도에게 말하는 신앙적 지침대로 살면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목회자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 봐야 성도들은 “목사님부터 하세요”라고 생각할 수 밖에요. 목사가 스스로 그렇게 살아서 복을 받는 모습을 보여 주면 성도들은 그대로 따라 합니다.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고생을 해야 하나 됩니다. 그게 사랑 아닙니까? 나는 넥타이를 매고 너는 작업복을 입으라고 해선 안됩니다. 하나되면 사랑하게 됩니다. 전성철 목사가 여수룬교회를 건축할 때, 제가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헌납했습니다. 전 그런 게 없어도 생활이 가능한데 저부터 내어 놓지 않고 성도들에게 헌금하라 말하면 위선입니다. 많은 이민목회자들이 “나는 솔선수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도들이 볼 때는 “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곤 합니다. 그것이 제일 무서운 일입니다.
- 전성진 목사님이 창단했고 현재 지휘자로 있는 목사부부합창단은 시카고에서 가장 잘되는 목회자 연합 모임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매주 40명 정도가 모이지요? 교협과는 아무래도 색깔이 다를 수 밖에 없지만 목사부부합창단의 연합 비결을 듣고 싶습니다.
전성진 목사: 제가 5년 전, 목사부부합창단을 만들었을 때 시련이 생겨서 몇 달 만에 그만 두었습니다. 왜냐면, 아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교만했구나.” 당시 전 공부도 많이 했고 일반인들은 만나기도 어려운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의 그 교만한 모습을 꺾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제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안 모이는 목사들이 문제입니까?’ 물었더니 답은 “제 문제”라고 응답이 났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물었더니 “눈높이”라고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전문지식을 다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자 목회자와 사모들이 모이고 싶어 하고 참여하게 되어 지금의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일주일에 3시간 정도 연습합니다. 그 후에는 2차 모임까지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밤 늦게까지 목회에 관해 토론하고 교제합니다.
대표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려면 사역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성철 목사가 대형교회와 중소형교회의 갈등을 이야기 했는데 교회들이 “저 교회가 우리 성도를 빼앗아 가지는 않는지” 불신하고 사랑하지 않으니 연합이 잘될 리 없습니다. 목사부부합창단 안에도 처음에는 내 편, 네 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연합이 안되어 테이블도 나누어 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원래 음악에서 지휘자는 독재자다. 그러니 무조건 나를 중심으로 모여라. 아니면 다 나가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덧붙였습니다. “나는 대표가 아니다. 조용히 일하는 사람일 뿐이다. 단장이나 임원은 회칙대로 공정하게 선정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좀 나서고 싶습니다. 한국의 국회나 그런 곳에서 공연을 하고 나면 저도 우쭐해집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것을 버려야 연합이 됩니다. 저의 할 일은 음악을 잘 만들어 목사부부합창단의 이름이 알려지고 이것으로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교회 연합도 음악을 만들듯이 교회 간에 연합을 위한 겸손과 섬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성진 목사: 네. 그것이 답입니다. 제가 교회음악협회의 회장을 할 때도 임원회를 하면 회장, 부회장, 총무 3명만 나왔습니다. 기도했더니 “네 고집을 꺾으라”고 하셨습니다. 2년이 지나고 20명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최고이면 사람이 안 붙습니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법입니다. 교협을 하건 교역자회를 하건, 어떤 연합모임을 할 때라도 내가 권위주의를 버리고 낮아지고 그들과 같아지면 연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서재필 박사는 아침에 일어나서 쓰레기를 주우며 다녔다고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존경했습니다. 남을 손가락질 해 보면, 한 손가락은 남을 가리키지만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나머지 엄지손가락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남 탓을 하는 일은 나를 욕하고 하나님을 욕하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섬기고 낮아지면 전성철 목사가 말한 교회의 권위 회복도 자연히 이뤄지리라 저는 믿습니다.
- 부흥과 전도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여수룬교회는 청년들이 많은 교회로 유명합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시카고 지역의 청년 사역 현황은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전성철 목사: 저는 우리 교회의 일만 알기 때문에 전체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의 전체 성도 중 청년들이 30%에 육박하는 비결은 ‘학사관’에 있습니다. 저는 맥코믹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당시 “미국에 전세계의 인재가 집약돼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한국인에게 힌두어를 가르쳐 인도로 보내려면 수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미국에 유학 온 엘리트 인도인을 전도해 인도로 보내면 금방 됩니다. 인생 한번 사는 것인데 한국에서 아버지가 대형교회로 키워 놓은 곳에서 목회하는 것보다 이 일이 저를 미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1세인 저는 영어가 안되니 어떻게 해야 이 비전을 이룰까 고민하다가 한인 청년들을 발견했습니다. 1.5세, 2세, 유학생들은 영어도 유창하니 비전만 심어지면 전세계를 복음화시킬 일꾼을 미국에서 전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사관을 세우고 한국의 유능한 학생들을 1년간 데려다 영어연수도 시키고 신앙훈련도 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학업뿐만 아니라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영성을 다지고 있습니다. 비전트립을 통해 미국을 경험하고 캠퍼스로 가서 제3세계의 청년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2세들도 찬양밴드를 만들어 두달에 한번씩 정기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한인들도 많이 오고 미국인들도 많이 옵니다. 음악은 만국공통언어입니다. 청년들은 음악으로 자기 끼를 발산하니 좋고 전도까지 할 수 있으니 더 좋습니다. 부모들도 자녀가 탈선할 염려를 덜게 됩니다.
저는 한인교회의 미래에 관해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 우리의 2,3세, 4,5세는 미국에 동화되고 한인교회의 역할은 상당히 감소될 것입니다. 남미의 경우, 한인 이민자들의 후예가 현지에 동화되고 신규 이민자들이 줄어들면서 이미 이런 현상이 생기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그래도 신규 이민자들과 유학생이 계속 있으므로 한인교회가 존속은 되겠으나 그 수가 현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타민족과의 연대나 준비, 훈련은 중요합니다
-음악하면 전성진 목사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카고 지역의 한인교회 음악의 현 주소는 어떻습니까?
전성진 목사: 과거에는 교회음악의 상황이 괜찮았습니다. 아메리칸 컨서바토리가 시카고에 있었고 한인인 제가 교수이면서 부총장으로 있다 보니 한인 유학생도 많았습니다. 그 유학생들이 한인교회에 음악적 자원으로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칸 컨서바토리가 인디애나로 캠퍼스를 이전하고 노스웨스턴이나 드폴, 루즈벨트처럼 학비가 비싼 학교만 남자 유학생들은 서부나 동부를 선호하게 됐고 중부의 한인교회 음악은 ‘사람이 없다’는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음악인이 없으면 우리가 자체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찬양콘서바토리가 생겼습니다. 지금 시카고 지역에 음악을 가르치는 학교가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저는 시카고에 음악학교가 많아진다고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찬양콘서바토리는 음악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음악으로 영광돌리고자 하는 동기를 주는 학교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일꾼을 세우는 학교가 생겨날 때, 시카고 지역 교회음악의 갈함이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민목회자들에게 한 말씀씩 해 주신다면요?
전성진 목사: 교회가 사회에 뒤떨어지니 문제가 됩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 있고 성도들은 사회 속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수준은 사회 속에서 계속 높아지는데 교회가 이것을 못 따라 가면 사회의 영향력을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교회음악의 근거는 성경 속에서 신학적으로 다수 찾을 수 있지만 저는 우리 이민자들이 처한 힘든 상황에 위로를 주는 것이 교회음악이라 믿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힘을 준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먼저 내가 찬양으로 위로받고 도전받고 깨어진 후 하나님 앞에 엎드러 지는 것입니다. 음악에 있어서도 교회가 세상보다 앞서가야 합니다. 세상을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전성철 목사: 우리 교회는 밀알선교단을 전적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 모임에 가 보면, 모든 것이 감동입니다. 매일같이 ‘엄마’ 소리를 듣는 어머니는 그 말에 감동이 없지만, ‘엄마’라는 말을 자신의 자녀로부터 평생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들은 ‘엄마’라는 말을 한번 들을 때 정말 감동합니다. 병원에 누워서 물 한 모금을 스스로 마시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목회에서 이런 감동을 찾아 가면 좋겠습니다. 이민목회가 힘들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딜 가든 목회는 힘든 것입니다.
스물세번째, 네번째 인터뷰는 전성진, 전성철 형제 목회자다. 둘다 보수 중의 보수라는 고신측 목회자다. 두 형제를 이해하려면 아버지 전은상 목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신에서 49년간 목회하고 현재 은퇴한 아버지 전은상 목사는 시무하던 용호남교회를 한국 고신총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한상동 목사가 오른팔처럼 아끼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은퇴 목사가 후임자나 교회에 관여하면 교회가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후임자 선정 등 모든 절차를 당회에 맡기고 은퇴 일주일만에 아들들이 목회하는 시카고로 훌쩍 건너 왔다. 5남1녀 중 장남인 전성진, 차남인 전성철이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가 됐다. 장남이 유학 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소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음악대학에 입학허가와 장학금을 약속받은 후, 입학할 수 있게 첫 학기 학비만 도와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그 돈이면 교회를 몇 개 개척하는지 아느냐”하면서 차갑게 거절했던 아버지다.
▲형 전성진 목사(좌)와 동생 전성철 목사(우)가 한 자리에 마주했다. 이들이 만난 여수룬교회는 두 형제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이민목회 개척지이다. |
전성철 목사는 용호남교회에서 8년동안 아버지를 도와 부목사로 시무하며 교회 내에서는 차기 담임목사로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맥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전세계 유학생 사역에 비전을 갖게 된 후, 이민목회에 뛰어 들어 여수룬교회를 개척했다. 전성철 목사는 직전 회기 시카고지역한인교회협의회 회장도 역임했다.
- 두 형제 목사님을 한 자리에 모시게 됐습니다. 전성철 목사님은 지난 회기 교협 회장이셨는데 임기를 마치고 나니 어떠신가요?
전성철 목사: 임기 중에는 정신적 중압감이 아무래도 컸습니다. 시카고 지역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전에는 개교회의 일일 뿐이었지만 회장이 되고 나니 그런 일들에 항상 예민하게 신경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특히 교계의 많은 일들에 대한 책임이 회장에게 따르기 때문에, 하는 사업은 적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정신적인 짐은 작지 않았습니다. 전 교협 총회에서 김광태 신임회장에게 “나는 이제 광명을 보게 됐고 당신은 이제 긴 어둠의 터널로 들어 갔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회자들이 언제나 회장에 대한 기도를 잊지 말고 교계 연합 사업에 협조해 주길 당부합니다.
- 시카고 교계는 연합사업이 척박하다고 하는데 경험상 그 원인으로는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전성철 목사: 개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연합사업에 어려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가 돌연히 사임을 해서 교회가 공석이 된다든지 하는 일들입니다. 저는 이 현상이 목회자의 잘못인지 성도들의 잘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계 차원에서 교회연합의 주제를 던졌을 때 목회자 공석 현상이나 교회의 분열 양상은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연합 사업에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지역에 오는 목회자들은 유학파들로 공부도 많이 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꿈도 크고 비전도 높습니다. 그런데 시카고에서 그에 상응하는 소명감과 자존감을 못 찾을 때 교회를 떠나 버리곤 합니다. 목사의 잘못만입니까? 아닙니다. 견디고 버티다 못해 떠나가는 목회자만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선교사를 하면 현지에서 인정이라도 받지만 이민목회는 교인의 수가 적으면서 수백명 목회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니 그 힘듦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일에 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개척멤버 한 명도 없이 혼자서 개척을 해서 지금의 제직들을 세웠기 때문에 목회자 후임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실체를 잘 모릅니다. 단지, 서로 조금 더 인내하며 잘 다듬어지면 모든 일들이 선한 방향으로 해결되어 갈 것 같습니다.
연합이 잘 안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교인들의 수평이동 때문입니다. 자녀 교육 등의 문제로 젊은 성도들이 대형교회로 옮겨가는 현상 때문에 중소형교회 목회자들은 대형교회에 적지 않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중소형교회 목회자들은 수십년을 이 지역에서 목회한 연륜이 있는 분들인 경우가 많고 현재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부임한지 오래되지 않은 젊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중소형교회와 대형교회의 어색함에 더해 세대 교체 과정 중 발생한 현실적 거리감은 교회 연합에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또 현실적으로 대형교회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큰 집회를 열 수 있으니 교회연합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중소형교회는 힘을 모아야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니 교회 연합이 중소형교회 위주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전성진 목사는 교회 음악과 관련된 연합활동에서 얻은 연합의 노하우를 말했다. 노하우의 핵심은 대표의 겸손이다. |
전성진 목사: 저의 전문 분야는 음악이지만 저도 이민목회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유학 시절 여수룬교회를 개척했습니다. 1년 목회해 불신자 청년들 1백명이 모였습니다. 그때의 청년들이 지금은 시카고 교계의 장로, 안수집사들이 됐습니다. 저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고 얼마 후, 시카고에 유학 중이던 전성철 목사가 여수룬교회를 다시 개척했습니다.
이민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라 오라” 해야지 “가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은 가지 않으면서 성도들 보고 가라고 한다고 가겠습니까? 자신이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 복받는 모습을 보여 주면 성도들은 따라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 갑니다. 이민목회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민사회는 아무래도 힘듭니다. 목회자가 성도에게 말하는 신앙적 지침대로 살면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목회자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 봐야 성도들은 “목사님부터 하세요”라고 생각할 수 밖에요. 목사가 스스로 그렇게 살아서 복을 받는 모습을 보여 주면 성도들은 그대로 따라 합니다.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고생을 해야 하나 됩니다. 그게 사랑 아닙니까? 나는 넥타이를 매고 너는 작업복을 입으라고 해선 안됩니다. 하나되면 사랑하게 됩니다. 전성철 목사가 여수룬교회를 건축할 때, 제가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헌납했습니다. 전 그런 게 없어도 생활이 가능한데 저부터 내어 놓지 않고 성도들에게 헌금하라 말하면 위선입니다. 많은 이민목회자들이 “나는 솔선수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도들이 볼 때는 “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곤 합니다. 그것이 제일 무서운 일입니다.
- 전성진 목사님이 창단했고 현재 지휘자로 있는 목사부부합창단은 시카고에서 가장 잘되는 목회자 연합 모임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매주 40명 정도가 모이지요? 교협과는 아무래도 색깔이 다를 수 밖에 없지만 목사부부합창단의 연합 비결을 듣고 싶습니다.
전성진 목사: 제가 5년 전, 목사부부합창단을 만들었을 때 시련이 생겨서 몇 달 만에 그만 두었습니다. 왜냐면, 아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교만했구나.” 당시 전 공부도 많이 했고 일반인들은 만나기도 어려운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의 그 교만한 모습을 꺾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제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안 모이는 목사들이 문제입니까?’ 물었더니 답은 “제 문제”라고 응답이 났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물었더니 “눈높이”라고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전문지식을 다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자 목회자와 사모들이 모이고 싶어 하고 참여하게 되어 지금의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일주일에 3시간 정도 연습합니다. 그 후에는 2차 모임까지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밤 늦게까지 목회에 관해 토론하고 교제합니다.
대표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려면 사역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성철 목사가 대형교회와 중소형교회의 갈등을 이야기 했는데 교회들이 “저 교회가 우리 성도를 빼앗아 가지는 않는지” 불신하고 사랑하지 않으니 연합이 잘될 리 없습니다. 목사부부합창단 안에도 처음에는 내 편, 네 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연합이 안되어 테이블도 나누어 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원래 음악에서 지휘자는 독재자다. 그러니 무조건 나를 중심으로 모여라. 아니면 다 나가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덧붙였습니다. “나는 대표가 아니다. 조용히 일하는 사람일 뿐이다. 단장이나 임원은 회칙대로 공정하게 선정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좀 나서고 싶습니다. 한국의 국회나 그런 곳에서 공연을 하고 나면 저도 우쭐해집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것을 버려야 연합이 됩니다. 저의 할 일은 음악을 잘 만들어 목사부부합창단의 이름이 알려지고 이것으로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교회 연합도 음악을 만들듯이 교회 간에 연합을 위한 겸손과 섬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성진 목사: 네. 그것이 답입니다. 제가 교회음악협회의 회장을 할 때도 임원회를 하면 회장, 부회장, 총무 3명만 나왔습니다. 기도했더니 “네 고집을 꺾으라”고 하셨습니다. 2년이 지나고 20명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최고이면 사람이 안 붙습니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법입니다. 교협을 하건 교역자회를 하건, 어떤 연합모임을 할 때라도 내가 권위주의를 버리고 낮아지고 그들과 같아지면 연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서재필 박사는 아침에 일어나서 쓰레기를 주우며 다녔다고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존경했습니다. 남을 손가락질 해 보면, 한 손가락은 남을 가리키지만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나머지 엄지손가락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남 탓을 하는 일은 나를 욕하고 하나님을 욕하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섬기고 낮아지면 전성철 목사가 말한 교회의 권위 회복도 자연히 이뤄지리라 저는 믿습니다.
▲전성철 목사는 여수룬교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청년사역과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설명했다. |
전성철 목사: 저는 우리 교회의 일만 알기 때문에 전체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의 전체 성도 중 청년들이 30%에 육박하는 비결은 ‘학사관’에 있습니다. 저는 맥코믹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당시 “미국에 전세계의 인재가 집약돼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한국인에게 힌두어를 가르쳐 인도로 보내려면 수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미국에 유학 온 엘리트 인도인을 전도해 인도로 보내면 금방 됩니다. 인생 한번 사는 것인데 한국에서 아버지가 대형교회로 키워 놓은 곳에서 목회하는 것보다 이 일이 저를 미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1세인 저는 영어가 안되니 어떻게 해야 이 비전을 이룰까 고민하다가 한인 청년들을 발견했습니다. 1.5세, 2세, 유학생들은 영어도 유창하니 비전만 심어지면 전세계를 복음화시킬 일꾼을 미국에서 전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사관을 세우고 한국의 유능한 학생들을 1년간 데려다 영어연수도 시키고 신앙훈련도 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학업뿐만 아니라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영성을 다지고 있습니다. 비전트립을 통해 미국을 경험하고 캠퍼스로 가서 제3세계의 청년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2세들도 찬양밴드를 만들어 두달에 한번씩 정기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한인들도 많이 오고 미국인들도 많이 옵니다. 음악은 만국공통언어입니다. 청년들은 음악으로 자기 끼를 발산하니 좋고 전도까지 할 수 있으니 더 좋습니다. 부모들도 자녀가 탈선할 염려를 덜게 됩니다.
저는 한인교회의 미래에 관해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 우리의 2,3세, 4,5세는 미국에 동화되고 한인교회의 역할은 상당히 감소될 것입니다. 남미의 경우, 한인 이민자들의 후예가 현지에 동화되고 신규 이민자들이 줄어들면서 이미 이런 현상이 생기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그래도 신규 이민자들과 유학생이 계속 있으므로 한인교회가 존속은 되겠으나 그 수가 현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타민족과의 연대나 준비, 훈련은 중요합니다
-음악하면 전성진 목사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카고 지역의 한인교회 음악의 현 주소는 어떻습니까?
전성진 목사: 과거에는 교회음악의 상황이 괜찮았습니다. 아메리칸 컨서바토리가 시카고에 있었고 한인인 제가 교수이면서 부총장으로 있다 보니 한인 유학생도 많았습니다. 그 유학생들이 한인교회에 음악적 자원으로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칸 컨서바토리가 인디애나로 캠퍼스를 이전하고 노스웨스턴이나 드폴, 루즈벨트처럼 학비가 비싼 학교만 남자 유학생들은 서부나 동부를 선호하게 됐고 중부의 한인교회 음악은 ‘사람이 없다’는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음악인이 없으면 우리가 자체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찬양콘서바토리가 생겼습니다. 지금 시카고 지역에 음악을 가르치는 학교가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저는 시카고에 음악학교가 많아진다고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찬양콘서바토리는 음악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음악으로 영광돌리고자 하는 동기를 주는 학교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일꾼을 세우는 학교가 생겨날 때, 시카고 지역 교회음악의 갈함이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민목회자들에게 한 말씀씩 해 주신다면요?
전성진 목사: 교회가 사회에 뒤떨어지니 문제가 됩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 있고 성도들은 사회 속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수준은 사회 속에서 계속 높아지는데 교회가 이것을 못 따라 가면 사회의 영향력을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교회음악의 근거는 성경 속에서 신학적으로 다수 찾을 수 있지만 저는 우리 이민자들이 처한 힘든 상황에 위로를 주는 것이 교회음악이라 믿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힘을 준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먼저 내가 찬양으로 위로받고 도전받고 깨어진 후 하나님 앞에 엎드러 지는 것입니다. 음악에 있어서도 교회가 세상보다 앞서가야 합니다. 세상을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전성철 목사: 우리 교회는 밀알선교단을 전적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 모임에 가 보면, 모든 것이 감동입니다. 매일같이 ‘엄마’ 소리를 듣는 어머니는 그 말에 감동이 없지만, ‘엄마’라는 말을 자신의 자녀로부터 평생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들은 ‘엄마’라는 말을 한번 들을 때 정말 감동합니다. 병원에 누워서 물 한 모금을 스스로 마시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목회에서 이런 감동을 찾아 가면 좋겠습니다. 이민목회가 힘들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딜 가든 목회는 힘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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