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어머님을 방문했을 때, 아버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저와 제 아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 니 에미가 안하던 짓을 한다. 내 지갑에서 돈을 훔쳐간단 말이다.” 그 말씀을 들으시더니 어머니께서 어린 아이처럼 한참을 웃으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니, 내가 어디다 쓸라구 그랬나? 그냥 가지고 있으면 든든하고 좋아서 그랬지? 저 양반이 멀쩡한 사람을 도둑으로 모네!”

혈관성 치매가 시작되고 난 다음부터는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아버님께서 맡아 관리 하십니다. 어머니는 혼자서 장에 가시지도 못하십니다. 그러니 100원 한 장도 어머님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만 원짜리 몇 장이 들어있는 흰 봉투를 당신만 아는 비밀 장소에 넣어두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든든하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지갑을 내놓고 밖에 나가 일하고 있으면 가끔씩 표시 안나게 한 두 장씩 빼내어 봉투 안에 넣어 두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버님께서 급히 돈이 필요해질 때면 그 봉투를 내놓곤 하셨습니다. 어머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누라가 남편 지갑에 손을 대는 거야 큰 잘못이지만, 내가 쓰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니 괜찮지 않겄어? 나중에 다 돌려주는데 뭘. 나두 내 맘을 잘 모르겄어. 그냥 그 봉투를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혀. 그래서 그러는 거여.”

저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저희 아들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님을 방문할 때마다 어머님 용돈으로 돈 봉투를 찔러 드리곤 했습니다. 집안의 돈 관리를 아버님께서 하시니, 저희 아들들은 언제나 어머님에게만 용돈을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니들두 힘들텐데, 안 그래도 되야.”라고 말씀하셨지만, 손의 움직임은 재빨랐습니다. 그만큼 어머님에게도 돈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셔야 했던 어머님께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이번에 알 것 같았습니다.

혈관성 치매가 시작되고 나서는 어머님께 돈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들들은 생활비와 용돈을 아버님에게만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님은 더 이상 아들들로부터 돈 봉투를 받지 못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 허전함이 얼마나 컸던지 이제는 당신 스스로 돈 봉투를 만들어 가지고 계십니다. 제 생각에, 아버님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당신 스스로 만든 돈 봉투를 어루만지시면서 네 아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니들두 힘들텐데, 안 그래도 되야. 고맙기도 허구, 미안하기두 허다.”

돈 쓸 일이 하나도 없는데, 돈 봉투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저희들이 당신 곁에 있다고 느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