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바지에는 ‘중미합작(中美合作)’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밀가루 부대를 잘라 만든 바지였기 때문입니다. 걸레로 기운 듯한 윗도리에 광목천을 꿰매 만든 가방을 들고 맨발로 걸어온 수십리 산길이었지만 소년은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제 돈을 벌 수 있다. 밥보다 고구마 죽을 먹을 때가 더 많았던 나날, 그것도 없을 땐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고통, 그래도 참을 수 없었을 땐 훔쳐서 먹어야 했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동생을 낳던 날, 산파도 없이 혼자 탯줄을 자르고는 곧바로 빨래를 하러 나가야 했던 어머니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머니, 제가 돈 많이 벌어 편안히 모실게요.” 쌀집 점원으로 취직한 15세 소년은 굳게 다짐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왕융칭. 30개 계열사에 9만 명 임직원을 두고 연매출 617억 달러(62조)를 올리는 대만 최대기업[포모사 그룹]의 창업자입니다.

맨발로 출발해 세계적 기업을 일으켜 ‘경영의 신’으로 추앙 받아 온 왕회장은 지난 10월15일(2008년) 세상을 떠난 후 세상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습니다. 대만 언론에 의해 공개된 그의 유언장으로 인해 깊은 감동을 준 것입니다. 유언장과 함께 왕회장이 세상에 환원한 재산은 무려 90억 달러(9조원)에 달했습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재물의 부유를 바라지만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모으는 재산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작별할 때는 모두 사회에 돌려줘야 하는 데엔 예외가 없다. 돈은 하늘로부터 잠시 빌린 것일 뿐이다.”

왕융칭은 1917년 1월18일 대만의 즈탄이라는 작은 산골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마을은 자갈밭으로 소문난 황무지였습니다. 왕융칭 가족은 이곳에서 차(茶)를 재배했습니다. 부모님은 매일 새벽4시부터 찻잎을 따서 포장한 뒤 배에 싣고 가서 타이베이의 도매상에게 팔았습니다. 차 수확은 봄에서 여름까지만 이뤄졌습니다. 가을이 되면 차 농가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부모님은 가을이 되면 나무를 베어 목탄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왕융칭의 아버지는 몸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찻잎을 따는 일, 밀가루 부대를 염색해 차부대로 만드는 일, 부대에 차를 담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일과는 저녁식사가 끝나고 모두 쓰러져 잠든 뒤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구마 줄기를 가늘게 썰어 물을 붓고 끓여 돼지 사료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돼지가 사료를 먹는 것을 본 뒤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융칭은 어머니의 불평을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왕융칭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스스로 탯줄을 자르고 기진맥진해진 어머니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집 옆의 개울, 그날 중으로 빨래를 해야 했던 어머니는 찬물에 빨래를 한 뒤, 그날 밤까지 차를 손질했고 돼지에게 사료를 먹인 뒤에야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습니다.

왕융칭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어머니는 강인한 의지력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데에 인생의 참뜻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삶은 헛되지 않았고, 나는 영원히 내 가슴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살아가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왕융칭은 15세 때 고향을 떠나 쌀집 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왕융칭은 1년간 점원으로 일하면서 쌀을 들이는 법, 쌀을 고르는 법, 쌀값을 계산하는 법 등을 눈여겨봤습니다. 스스로 독립하기로 결심한 그는 아버지가 빚을 내준 200원으로 작은 쌀가게를 열었습니다. 첫 창업이었습니다. 이때가 1931년 그의 나이 16세였습니다. 당시대만의 쌀가게는 쌀에 섞여있는 돌을 골라내지 않고 그냥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왕융칭은 이점에 착안하여 “돌 없는 쌀 팝니다”라고 써 붙인 뒤 쌀에서 돌을 골라내고 돌 없는 쌀 판매의 첫 선두주자가 되었고, 구입한 쌀은 당연히 고객 스스로 집으로 가져가는 풍토에서 대만 최초로 쌀 배달제를 실시하면서 고객의 쌀 소비기한을 파악하여 쌀이 떨어지기 2-3일 전에 미리 배달해주는 첨단적인 판매 기법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사업은 오늘날 플라스틱, 화학섬유, 방직공장, 석유화학, 자동차, 전선, 전자, 중공업, 종합물류 등 30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방대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어머니의 삶의 모습은 세계적 기업을 맨손으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경영의 비결이 되었고, 인생 성공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왕융칭의 어머니는 가난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생을 끝냈지만, 왕융칭을 통하여 세계적 기업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고난과 시련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고, 강인하게 극복해 냈던 산골의 한 여인의 삶이 훗날에 국가와 세계 경제에 큰 몫을 감당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