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목회의 현 실속에서 괴로워하는 한 분과 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삶을 주관하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더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금주 주일저녁(28일) 후배목사님 한 분과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민목회가 처음이라서 그런지 꽤 힘들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금식 중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목회를 계속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힘듭니다.
9월 30일까지 이것을 놓고 결정하려고 금식 중입니다."
"목사님, 정말 이민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목회를 계속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인가? 를 묻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꼭 목회만을 하지 않고서도 선교사님도 돕고 어려운 교회들도 도울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제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저 역시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목회만이 아니라 이제는 목사를 그만두고 싶어하는 후배에게 왜 하나님이 통화하게 하셨는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면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후배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 가족의 모든 고통들이 몰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민목회자들의 현실일 것 같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전화를 붙들고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이 어렵냐?"

재정적인 압박부터 시작해서 교회 성도들과의 어려움을 호소하였습니다.
사모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아이들까지 그리고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까지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회철학을 논리있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전도사, 목사의 경험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똑똑한 후배목사이고 아주 리더쉽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잠시 내가 보았던 그리고 내가 경험했던 이민목회자의 모습을 이야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너 혹시 아틀란타 최낙신목사님이 이민목회를 하면서 귀 한쪽 멀었다는 것을 아니?
워낙 성품이 좋으시고 그분이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나는 전도사시절부터 목사가 된 후까지 그분의 삶을 보았다.
아틀란타에서 한 교회를 세워보려고 노력하면서 노력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또 세우면서 나중에는 쓰러지셨다.
네가 그 교회에 전도사로 갔을 때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가운데 목회를 하는가?
목사님에게도 가정이 있지 않는가?
목사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나중에 나는 보았다.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목회를 하시는 최목사님을 통해서 그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 교회를 이제 와서 보니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이 일구시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장로님이 나오고, 가장 축복받는 성도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가장 든든히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제는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찌보면 이민목회는 죽는 목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인 것 같다.
과거에는 잘 몰랐고 그리고 설교에서도 인용하고 그랬지만 사실 난 깊이 이해를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조금 느낀다. 죽는 것만이 살 길임을 나는 배운다.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쳤던 그 말씀이 너무나 힘든 말이었지만 그것은 나를 향한 말이었고, 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한마디를 결론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너를 지금 낮아지게 하고, 더욱 낮추시는 그런 과정이 아닐까?
너는 잘 될꺼야. 용기를 잊지 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잊지 마라“

후배목사가 강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20년을 목회하면 무엇이 다릅니까?
이민목회의 현실이 뻔한데 나도 그렇게 될텐데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어떤 결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한번 말을 해야 되겠습니다"

아마도 교회 어떤 성도와 큰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 역시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하지 마라. 하지 마라. 그렇게 하지 마라
치리하지 마라.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직하면 십자가에 지셨겠니?
목사는 성도에게 언제든지 지게 되어있다.
성도를 이기는 목사는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성도를 이기려고 하는 목사일수록 어려움이 더해 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나도 경험했다.
특히 교회가 쓰러지고 황폐해 지는 것을 보았다.
양떼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 네가 성도를 이겨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니?
차라리 너 자신이 죽는 것이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무릎꿇어!”

이민목회의 고통을 잘 알면서도 어찌보면 무정하게 후배목사에게 무릎꿇으라고 권면했습니다.
한숨이 전화기에서 들려왔습니다.
오랫동안 알아온 선배목사님인 동양선교교회 강준민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1996년 그분이 호텔에서 나에게 해 준 말을 똑같이 들려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유명하지는 않았던 그분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허약한 체질에다 나중에는 병가지 얻어서 ‘이제는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말하셨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훌륭하게 사역하는 목회자 일수록 죽음까지 다녀오는 일을 경험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말 나도 말은 했지만 말이 안될 수 밖에 없는 말을 되뇌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나도 어느 순간에 너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나님께 한 적이 있다.
하나님, 이제 나는 못갑니다.
이제 도저히 못가겠습니다.
이제는 섬김이라는 말만 들어도 싫습니다.
난 이제 안 할랍니다.
나도 할 만큼 했잖아요?“

후배가 전화기를 잠시 떨어트리는 것 같았습니다.
목이 메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선배님도 어쩌면 이렇게 똑같습니까?
어떻게 통과하셨습니까?
어떻게 그런 과정을 지내셨습니까?”

나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습니다.
“통과는 무슨 통과...
나도 여전히 하나님께 무릎꿇고 있다.
이것을 통과한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 것 같니?
위대한 영성을 가진 분의 책을 읽어도 섬김을 통과한 사람은 못 본다.
내가 볼 때 그냥 죽는 거다.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자신의 문제인 것 만 같이 생각하는 후배에게 말했습니다.
“(?) 목사,
목사이기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40이 되면 남자라면 어떤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아니?
세상의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꼭 이 직장을 다녀야 하는가 고민한다는 사실을 아니?
왠만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다 온다.

네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그런 목회를 그만두거나 다른 것을 하거나 하는 것도 있지만 세상의 사람들도 꼭 자신이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꼭 이 길을 가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어찌보면 40으로 다가가는 너의 인생가운데에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귀한 축복의 일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네가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금식하면서 질문한다니 너는 참 축복이다.
내 개인적으로 이번이 너에게 귀한 축복의 시간과 간증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구별해라. 그리고 섣불리 잘못 결정하지 않기 바란다.
그래도 지금은 인내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주제넘게 영성을 말했습니다.
영성은 어떤 고통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번 전도서 4장 4절을 읽어보라.
헛되고 헛된 것들이 나타나는 것 중에 경쟁심이 사람을 이그러트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헛된 경쟁심, 시기심을 버려라.
나는 인간의 영성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배웠다.
너도 이제부터 진정한 영성의 세계를 배우게 될 것 같다.
경쟁하면 경쟁할수록 너의 영혼은 황폐하게 된다.
경쟁에서 벗어나라.
높아진 마음에서 벗어나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입에서는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전화기 빠떼리가 다 달아 충전기에 꽂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전화를 하였습니다.
후배목사가 말합니다.

“목사님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금식하며 나아가는 저에게 하나님이 벌써 해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후배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저의 마음도 조금이나 기쁨이 생깁니다.
후배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자야 된다.
잘 자라...“

그리고 한 마디를 더 해 주었습니다.

너 그거 아니?
“난 이대로 계속 간다. 가다가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지더라도... ".

"내 뜻, 내 생각, 내 야망 등 무엇을 이루려고 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에 최선을 다하여 이루어지면 그만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 속 편하다."

그 밤에 나는 잠을 뒤척이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의 얼굴과 아들, 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후배와의 대화가 어떤 권면이 아니라 어찌보면 나의 탄식과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잠시 기도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날 밤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난 이대로 계속 갑니다.
하나님,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역사가 끝날지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조금이나마 감당하는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