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 목사

지난 21일(월) 오전 11시 필그림교회에서 워싱턴지역 교역자 세미나가 진행됐다. 이 날 이동원 목사는 "성숙과 변화의 설교"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이동원 목사는 사도행전 17장에 근거해 바울 설교의 특징을 크게 강해적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전도적 설교라 보고 각각의 설교에 대해 알기쉽게 강의했다.

특히 이 목사는 "한국교회 모든 목사님들이 전도가 안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전도설교는 안한다."고 지적하며 "오늘의 시대가 다른 어떤 때보다 전도설교가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다지만 설교가 살아날 때 우리 시대가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라며 새로운 부흥을 기대했다.

아래는 교역자 세미나 전문이다.

<성숙과 변화의 설교-이동원 목사>

포스트모던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해체 파괴 이런 것이다. 시대를 살아가면서 문화적으로는 발달하지만 가정이 많은 어려움들을 겪고 있다. 그래서 강단 설교도 치유와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성경적 설교 안에서 치유와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설교했을까

오래 전부터 설교를 시작했지만 목회 10년 동안 내 자신에게 계속 물어왔던 질문 하나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은 어떻게 설교하셨을까. 그 해답을 찾기 쉽지 않았다. 복음서에 조각처럼 흩어져서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 설교의 전체적인 그림을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아마 이야기식 설교를 했을 것이다. 왜냐면 설교 가운데 많은 부분이이 비유로 돼있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고.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렇게 많은 비유를 말씀하신 것 같다.

바울은 어떻게 설교했을까

그 다음에 계속 물어왔던 것이 뭐냐면 바울은 어떻게 설교했을까. 바울의 설교는 그림이 그려져요. 상당히 큰 것이 성경에 남아있다. 바울이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둘 다 격동하는 시기다. 가장 변화가 빠른 시기라고 신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닮은꼴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1세기 동안 천 년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는데 2000년의 변화를 1세기 동안 다 경험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바울의 시대가 그레꼬로망으로 통일되면서 세계화가 되는 시대였다면 오늘날도 보면 급격하게 세계화가 되는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바울의 설교의 틀은 사도행전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 1절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17장을 보면 바울 사역의 패턴 방식을 볼 수 있다.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은 항상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아간 것 같다. 랍비와 같은 자격으로 회당에서 설교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 성경이란 텍스트로 강론했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2,3,4절에서 이런 형태의 설교를 했을 것이다라고 알 수 있다.

첫째, 바울은 강해설교 비슷한 설교를 했을 것이다. 강해적 설교를 시도했을 것이다. 왜냐면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고 성경의 뜻을 풀었다. 서기를 했다. 지나가는 설교가 아니라 진지하게 성경의 텍스트를 뜻을 풀어서 강론했다. 그래서 아마 강해 설교일 것이다.

또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3절에 나온 것처럼 철저하게 바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했다. 자기의 철학이나 사상이 중심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설교를 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하나 더 행 17장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울 설교의 특성은 전도적 설교였다. 4절에 보면 바울의 설교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는데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바울의 설교로 인해 많은 무리가 권함을 받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소속하게 되었다. 이 말은교인이 되었다. 회심이 일어났다. 전도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전도설교를 했다.

한국교회 모든 목사님들이 전도가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런데 전도설교는 안 한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전도가 안되면 전도설교를 해서 전도를 해야 할 터인데 강단에서 전도설교가 사라지고 있다.

다른 어떤 때보다 전도설교가 필요한 때다

전도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어떤 때보다 전도설교가 필요한 때다. 사실 한국 교회 초기 목사님들은 굉장히 전도설교를 많이 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도 설교를 하니 전도가 많이 일어났다. 안 믿는 사람들이 믿었다. 목사님 설교 듣고 예수님 믿게 됐습니다. 이런 간증들이 많았다. 전도설교의 회복이 필요하다. 바울의 설교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바울의 설교 특징을 보다 자세하게 알아보자.

바울 설교의 특징 1. 강해적 설교

강해적 설교에 대해서 목사님들의 생각이 다 똑같을 필요도 없고 똑같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강해 설교에 대한 정의가 각기 다르다. 제가 생각하는 강해 설교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그에 앞서서 강해 설교가 아닌 것이 뭐냐. 강해 설교 비슷한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러닝 커멘터리 프리칭. 그냥 본문을 1-10절까지 잡았을 때 1절은 이런 뜻이고 2절은 이런 뜻이고…. 구절구절을 코멘트만 하는 것이다. 이런 설교를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의 문제는 기승전결이 없다. 설교도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서론본론결론이 확실하게 드러나야 하는데 이렇게 구절구절 멘트만 하다 보면 설교가 통일성이 없다.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또 하나는 서기적 설교다. 굉장히 학문적 소양이 깊은 설교자들 학자형 설교자들이 본문을 깊게 서기하는 경우다. 이런 설교의 문제점은 적용이 없다는 것이다. 본문은 충실하게 설명하고, 배경도 잘 설명하고 낱말풀이도 잘했지만 적용이 없다. 오늘의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적용이 있어야 한다. 강해 설교의 핵심은 적용에 있다.

그럼 강해 설교가 뭐냐. 중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자연스러운 단락이 있어야 한다. 자연스런 문단이 있어야 한다. 본문을 밑도 끝도 없이 한 구절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문단에서 뽑아내야 한다. 물론 단락을 가질 수 없는 잠언서 같은 경우는 한 구절을 뽑아낼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본문에 대한 성실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일단 본문을 읽었으면 성실하게 해석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주제를 발견하고 전개해야 한다. 어떤 본문에도 중심되는 테마가 있다. 주제를 설정했으면 전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

그럼 강해설교의 축복은 뭐냐. 저도 평생 강해설교를 시도한 사람인데. 첫째는, 본래 말씀의 의미를, 원래 성경의 기자의 의도를 잘 드러낼 수 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낸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낸다. 세번째는,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한다. 성경에 충실한 설교를 하려고 몸부림치다보면 성경이 원하는 사람으로 어느 정도 만들어 갈 수 잇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나, 하나님이 기대하는 바램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번째는, 성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한다. 하나님의 기대치를 강조하다 보면 성도들이 성경적 청중이 되지 않겠나. 이게 강해설교의 큰 그림이다.

저도 담임목사로 설교를 시작한지 30년이 넘었는데 설교가 달라진다. 요즘은 귀납법적 강해설교, 다른 말로 제목별 강해설교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강해 설교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곳이 달라스 신학교이다. 지금은 탈봇에서 가르치는 도널드 스누키안이 한국에 와서 한 주간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주일에는 저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다. 전통적 강해 설교는 책별 강해 설교.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연속 강해 설교에 교인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럴까. 사실 부흥이 일어나고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사람들의 식욕이 왕성해요. 그래서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강해요. 그런데 우리 시대는 그런 부흥의 시대가 아니란 말이죠. 부흥이 한 물 간 것 같아요.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거대한 부흥의 물결이 밀려오던 끝머리 시대. 성경에 대한 강력한 갈망이 있었다. 그래서 성경배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을 정도로.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극히 세속화되고 아무 관심이 없다. 그만큼 설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그런데 의외로 뚜렷한 주제를 설정하면 그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요. 그래서 우리가 주제를 무시할 수 없다.

강해설교가 한창 부흥할 때는 주제설교를 낮추어 볼 때가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주제설교가 필요하게 됐다. 스누키안은 요즘 자기가 장르로 만들었다고 한다. 제목별 강해설교라고. 예전에는 강해설교자와 주제설교자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서로 무시하는 것처럼. 이제 만나는 것이다. 우리 시대 설교자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구나라고 느꼈다.

이야기식 설교가 더 좋겠지만 한국교회에서 이야기식 설교를 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고 생각된다.

귀납법적 강해설교, 제목별 강해설교의 특징이 뭐냐.
뚜렷한 주제가 있다. 그 다음에 중심 생각이 분명해야 한다. 설교가 제대로 됐나 안됐나를 점검하려면 설교 후 성도에게 물어보면 된다. 오늘 목사님 설교가 뭐에요?

이런 설교 세미나 할 때 마다 이야기 하는 게 있다.

어느 주일날 아침에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설교를 했어요. 설교자가 자신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설교를 한 날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자기 자신도 알고. 찜찜했어요. 죽 쑨 것 같다. 근데 가끔 나는 설교를 잘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교인은 은혜받았다고 느낄 때도 있거든요. 혹시나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집에 오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오늘 설교 어땠어? 보통 많이 격려해줘요. 그 날 설교를 못했기에 격려를 받고 싶어서 물어본 거에요. 그런데 뜻밖에 그 날 아내가 하는 말이 오늘 당신 설교 핵심이 뭐에요? 가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겠더라.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청중들이 알겠나. 핵심이 뭘까. 핵심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속에 각인될 수 있다.

제 설교가 처음과 지금과 달라진 것 중의 세번째는 지금은 서론을 중시합니다. 사실 부흥의 시절에는 서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이미 다 마음을 만져 놓으셨기 때문이다. 지금 같이 세속화된 시대에서는 서론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서론을 통해서 설교를 들을 준비를 시켜줘야 한다. 오늘 설교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말이죠.

오래 전에 이런 말이 있었다. 청중들은 설교가 시작된 후 5분 안에 끝까지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 성도들 경우 5분까지도 못 기다린다. 1분 안에 결정한다.

그만큼 설교의 처음이 매우 중요하다. 설교하려는 내용을 부각시키고 정말 필요한 설교겠다. 이런 공감대가 서론부분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이게 안되면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한다.

네 번째는 논리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논리보다 감성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나 논리가 필요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논리가 정연한 설교와 그렇지 않은 설교의 차이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때 논리가 정연한 경우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자연스럽다. 무리가 없어요. 논리가 서 있지 않으면 우리 목사님 왜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시지? 그런 생각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실제적 적용이 가능해야 한다. 일상에 대한 적용이 분명해야 한다. 오늘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가급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맞아. 아멘. 아멘입니까? 이렇게 꼭 강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되는 설교가 감동있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 못하는 목사와 혼자 사는 할머니의 공통점이 뭐냐. 영감이 없다는 것이에요. 영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결론이 또 중요하다. 결론이 도전적이고 복음적이어야 한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그러면 자다가 그 때 다 깨어나. 다른 것 하나도 안들어. 그냥 설교를 요약하고 끝난다 말이죠. 결론을 다양하게 해 보고 결론 부분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결단을 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 인생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이런 클래식한 강해설교에서 제목별 강해설교로 우리 시대에 전개되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설교의 특징 2.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개혁장로교회 배경에서는 구속사적인 설교라고 말합니다. 이게 뭐냐. 앞서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의미하지 않는 것이 뭐냐. 그래야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좀 더 드러날 수 있다. 첫째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주제가 그리스도도 아닌데 억지로 끌어내다보면 무리가 생긴다. 심지어 성경에서 빨간색만 나오면 예수님의 보혈이라고 강조한다. 흔히 설교학에서 지나치게 우화적인 설교라고 한다. 그것은 무리다. 첫날 설교하면서 마라의 물에 나무를 넣었더니 쓴 물이 단 물이 되었다고 했다. 우화적인 설교에서는 이 나무가 바로 십자가라고 한다. 무리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강조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한데 이 나무가 십자가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왜 그 나무가 십자가야? 그것만 생각하다 하루가 끝날 수 있다. 억지로 무리로 끌어내는 설교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스도 중심설교가 의미하지 않는 것은 너무 서둘러서 그리스도를 해답으로 내 놓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해답이십니다. 소망이십니다. 해 버리면 맞아 그럼 맥이 빠진다. 기대감이 상실된다.

어느 틴에이져 학생이 예수 믿고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그래서 하루는 학교에 일찍 갔어요.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서 칠판에 이렇게 썼다. Jesus is answer. 그리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 것을 보고 친구들이 감동을 받기를 바라고. 하나둘씩 도착하는데 한 한생이 한마디 썼어요. Answer에 동그라미를 치고 What is question? 예수님이 대답이다라고 하니 도대체 질문이 뭐냐. 질문이 먼저 나오고 그 해답으로 예수님이 풀려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잔소리 말고 믿으세요! 이렇게 해 버리면 안 된다. 너무 우격다짐의 설교가 유행하다보니 좀 머리가 있는 사람은 논리적인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여자들은 순수해서 따라오는데 남자들은 안 된다 말이에요. 저희 교회는 남자 숫자와 여자 숫자가 거의 비등하다. 남자들이 끌고 온다. 설교가 상식적이다. 그 교회 가면 말이 돼. 너무 무리수가 없다. 그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너무 서둘러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지 말고 나중에 결론부분에 가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소망이시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해답이고 구원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흥미가 되고 탐구가 되고 모험이 되고 계속 찾아나가다가 아 맞아 그래서 예수님이 정말 해답이구나. 이렇게 감동에 도달하는 경험. 그게 마지막 결론으로 들어와야 한다. 처음부터 소리질러 놓으면 나중에는 소리지를 힘도 없어. 거대한 결단과 도전이 마지막에 가서 일어나야 한다. 처음에는 막 소리지르다가 나중에는 오리무중으로 설교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뭔가. 두 가지가 터치되어야 한다. 첫번째는 죄와 인간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문제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니. 문제를 터치할 때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문제나 고통을 다루다 보면 죄나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가 나온다. 두번째는 그 대답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은 은혜죠. 죄의 문제가 충분히 다루어지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나와야 한다.

왜 그리스도의 중심이 설교가 중요한가. 첫째는 신약적 메시지가 회복되기 위해서. 구약이 필요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언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신약을 통해서 하니님의 계시가 완성되고 선포되는 것이다. 새로운 언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강조될 때 신약적 메시지가 회복된다.

두번째는 진정한 설교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한다.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고 설교를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예수님을 선포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나.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고 그 분 앞에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 분을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설교자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신약적 공동체가 회복된다.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 교회죠. 교회의 머리가 예수그리스도. 정말 예수님이 강조되어야 하고 그 분이 높임을 받으시고 그 분의 주권이 드러나고 그 분 앞에서 사람들이 엎드리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바울 설교의 특징 3. 전도적 설교

설교의 결과로 안 믿는 사람이 믿게 되었다. 구원을 받았다. 회심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데 목사님이 그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같이 가야죠. 개인 전도가 강조되는 것만큼 교회와서도 전도 설교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강해 설교. 책별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도 마지막 결론 부분을 지혜롭게 구성하면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거기서 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 항상 안 믿는 자를 고려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설교하면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불신자를 데리고 주일날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데요. 언제든 우리 목사님 설교를 듣고 예수 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은 한데요. 그런데 맨날 헌금설교만 하면 데리고 왔다가 시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안 올 거 아니에요? 하지만 건축설교도 해야 하니까 건축은 필요악이고. 건축설교하는 날 어떤 사람이 예수 믿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 그만큼 결론 부분이 중요해요. 건축의 필요성 이런 것들을 설명한 후에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축을 우리 모두가 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을 건축하고 있다. 인생을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계도, 하나님은 바로 우리 인생을 위한 설계도를 갖고 계신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냥 던져진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설계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건축자입니다.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내 인생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드린다면 하나님의 설계가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인생의 구주로 삼으시고 그 분 앞에 인생을 드린다면 인생을 건축하는 놀라운 세계가 열려질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오늘 하나님 앞에 드려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날 예수 믿기로 결심했어요. 결론 부분에 작은 지혜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설교를 전도적으로 구성할 수가 있다.

실제로 두란노에서 설교 워크샵을 하면서 과제를 내드린 적이 있다. 1년에 40-45번 설교한다고 할 때 몇 %나 전도설교를 하나. 조사결과 4%가 나왔다. 96%는 목회적 필요에 관한 설교만 한다는 것이다. 목회적 필요에 대한 설교를 그렇게 많이 하지만 진정으로 한 사람이 예수님이 필요한 때에 그 필요에 우리의 설교가 초점을 맞추고 있지 못하다. 결론은 그거다.

그러면 전도 설교가 이렇게 희귀한 이유는 뭔가. 전도설교는 성도들의 신앙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목회자들이 갖고 있다. 정말 그럴까요? 신앙성장이 뭡니까? 신앙 성장의 가장 중요한 사인의 하나가 전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마음이 없으면 신앙 성장한 건가요? 신앙 성장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이웃들을 전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인데 목사님이 전도설교를 안하면…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사님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에요. 또 차원이 낮은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요? 그럼 차원 높은 설교는 뭔가? 그 고상한 설교는 뭔가? 하나님의 나라 확장? 전도해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죠. 예수님의 설교. 캐리그마라고 하는데 그 핵심이 뭔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이 그 설교 하셨다. 그보다 더 차원 높은 설교가 어디 있나. 마치 어떤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를 해야만 그것이 높은 수준의 설교인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 또 하나 이유는 전도 설교를 행사적 설교로만 격하시킬 때가 있다. 일년에 한 번 총동원 주일이나 전도집회 때만 전도 설교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럴 때도 해야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전도설교가 강조되어야 한다. 전도가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주로 안 믿는 이웃들이 교회에 나올 경우는 주일 낮 한번 뿐이다. 전도설교를 주일 낮에 해야 한다. 그 때 믿지 않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 그 때 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예수 믿어야지.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네번째 이유는 시대착오적인 설교다라고 생각한다. 예수천당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것을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한다. 찬방양론이 있지만 방법론에 동의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천당과 지옥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필요한 것 아니에요? 옛날에는 있던 천당과 지옥이 오늘날에는 없어졌단 말입니까?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과 그 심판에서의 구원은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이런 설교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더 듣고 싶어한다. 우리 영혼의 장래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에게 무엇을 던져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솔직한 정답은 목회자들이 전도설교를 할 줄 모른다. 정말 전도 설교를 연습해야 한다. 요즘에 디자인 하는 설교세미나는 전도설교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도가 되지 않겠나.

전도적 설교의 중요요소들

일반 설교와 다른 요소
1. 설교대상자를 고려해야 한다. 교회 배경이 없는 사람들. 너무 종교언어 우리만 아는 언어를 많이 쓰면 안되겠다. 쉬운 말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박사님들과 성경공부를 하는데 한 분이 목사님 성령님이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질문이 이상해서 물어보니 성령의 역사 그러는데 역사는 시작이 있지 않습니까? 역사를 history로 오해한 것. 교회 배경이 없는 분이었다. 박사라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는 것. 성경도 개역개정이나 표준번역으로 해야 안 믿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어느 날 설교 끝나고 한 성도가 오늘 목사님 설교 끝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본문이 회당장 야이로에 대한 것이었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느뇨. 이 ‘훤화’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생각하다 시간 다 보냈다는 것임. 어찌하여 시끄럽게 구느냐. 이렇게 한 마디 했으면 되는데. 그 단어 때문에 설교를 못 들었다고. 쉬워야 한다. 어떤 분은 교인들이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 하는 분도 있는 것 같다.

2. 인간의 보편적 문제인 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꼭 죄라는 단어를 안 쓰더라도 하나님의 기대를 못미치고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을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3번째인 하나님의 은혜와 해답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다.

4. 초청과 결단이 필요하다. 신학적으로 찬반양론이 있다. 실제로 강단 앞에 나오고 하는 것을 반대했던 로이드 존스도 모든 설교는 초청의 메시지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 초청의 행위를 매 설교때마다 하지 않지만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을 때는 합니다. 할까말까 망설이는 성도들에게 결정적으로 결단하게 하는 결신의 자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의 후계자로 알티 켄달이란 분이 목사가 됐다. 그 분이 로이드 존스의 후계자로서 갖는 목회의 어려움도 듣고 그랬는데 그 분에게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다르게 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위대한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듣고도 교인들 중에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그렇게 많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인 상담을 하고 소그룹을 만들면서 교인들이 진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을 봤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설교만 듣고 다 구원의 확신을 가질 것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렇게 초청과 결단 소그룹을 통해서 개인의 신앙이 확신을 갖게 하는 이런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열매있는 성도들로 정착시킬 수 있다.

전도적 설교가 왜 중요하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아가서 전도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목사님부터 전도설교를 하고 목사님이 전도하면 교인들도 전도한다. 목사님이 안하면 교인들이 해야 할 이유가 없죠. 세번째는 기독교의 게토화를 막기 위해서. 오늘날 사회와 교회가 너무 게토화 돼있다. 너무 떨어져 있다. 우리끼리만 놀고 있다.

윌로우 크릭에 대해서도 찬반 양론이 있지만 여전히 그 마음은 귀하다고 생각한다. 시커들 불신자들 정말 찾아가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그 마음은 기뻐하실 거라 생각한다. 빌하이벨즈와 같이 돌아다녔는데 두 가지를 느꼈다. 이 사람 되게 차다. 가족이야기 한마디도 없고. 교회가 어떠냐라는 말도 안하고 자기 이야기만 해요. 전도한 이야기만 해요. 그건 감동이 되요. 개인전도한 이야기. 동네에 세탁소를 하는 한국인들 계속 찾아갔더니 3년 만에 자기 교회 나왔다고 거품을 물면서 너무 기뻐하면서 말해요. 베이징 호텔 비즈니스룸에 중국여자 전도한 이야기. 아 하나님이 이래서 이 분을 쓰시는 구나.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이 있구나.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전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시잖아요.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나? 지금하지 않는다면 언제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겠나?

설교를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 있다. 에스라 7장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연구했다. 준행했다. 가르쳤다.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먼저는 연구했다. 설교준비 적당히 할 수 있다. 요즘은 인터넷 들어가서 몇 개 짜집기 하면 쉽게 설교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지하게 설교 준비하면 내가 성숙할 수 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준행한다. 적용한다. 설교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 붙들고 내가 살지. 이것이 축복이고 소망이고 영광이다. 그리고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선포한다. 에스라는 그 비전을 앞두고 설교한 것이다. 교육의 비전을 안고 갔던 이 에스라 한 사람을 통해 일어났던 거대한 부흥. 우리 시대는 이런 또다른 부흥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의 암흑기는 역사의 암흑기였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다지만 설교가 살아나면 우리 시대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부흥을 설교자인 목사님들과 더불어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