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들을 심방 할 때가 있습니다. 찾아 보면 증세가 심각해 링거를 맞고 있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오래 있는 분들일수록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병원의 규모가 어떻든 음식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병원을 나가면 원하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겠노라’는 말들을 하십니다. 상태가 중하여 의식이 없는 분들은 이런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 이분은 아직 건강하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배부른 자, 욕구가 없는 자가 되어 있지 말고 배고파하고 갈망하는 자가 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 자가 건강한 자요 배부름을 누릴 수 있는 자라고 말입니다. 참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르치신 갈망의 욕구가 세상적이거나 현실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 마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세상의 도덕적인 ‘정의’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미워하는 마음이며 타협하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죄악 된 것들로부터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내 삶에 죄 된 것들을 알고 나니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갖는 간절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혹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마음, ‘칭의(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것) ’를 말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의 주님이 가르치신 의는 예수님을 믿겠노라 고백한 자들 가운데 천국백성으로서 행해야 하는 행동강령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칭의’보다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성화’(변화되고 성숙되어 가는 과정)의 삶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간절한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신앙 안에서 이런 배고픔의 간절함이 없다면 그 증상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상태가 되면 그때 ‘배부름’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단회적인 포만감이나 만족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채워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행복과 평강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에, 취미활동에, 건강에, 행복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배부름의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 덤으로 이 땅에 필요를 채우시고 배부름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는 누가복음15장에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재산을 갈취하다 시피 해서는 먼 길을 갑니다. 그리고 배고파하지 않고 가진 것을 다 써버리고 맙니다. 그가 가정을 생각하고 아버지를 떠올린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부족했을 때였습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는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 밥을 먹으며 ‘내가 배고파 죽게 되었구나’라고 느낄 때 진정한 만족이 있는 행복이 있는 아버지에게 가야겠구나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 탕자는 배고픔을 경험한 후에야 진정한 배부름의 자리로 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로 살아가십니까 ?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그렇다면 내가 심각하게 건강하지 못하구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의’를 향해 배고파하고 갈망하시길 소원합니다. 이때 진정한 인생의 만족을 누리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