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인공지능 관련 서적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우리는 AI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냥 작동할 뿐이다.” 저자는 이를 기술적 한계로 서술했지만,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 말 속에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는 낯익은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딥러닝 기반 인공지능은 이른바 ‘블랙박스’(black box) 문제를 안고 있다. 수십억 개의 매개변수(parameters)가 복잡하게 얽혀 결론을 도출하지만, 내부 작동 방식은 설계자조차 해명하지 못한다. 의료 영상 AI가 암 가능성을 경고해도 왜 그 결론에 도달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생성형 AI는 그럴듯한 답 속에 근거 없는 정보를 섞곤 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기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오래된 신앙의 질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천오백 년 전 한 익명의 신학자의 글을 떠올린다. 그는 이름조차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그를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라 부르는데,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아레오바고 사람 디오니시오(행 17:34)의 이름을 빌려 쓴, 5세기경 시리아 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신학자였다. 그의 짧은 글 『신비 신학』(Mystical Theology)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언어는 줄어들고 마침내 침묵에 이른다는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이를 ‘신적 어둠’(divine darkness)이라 불렀다. 빛이 없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빛이 너무 강렬하여 눈이 감당하지 못하는 어둠이다.
이것이 바로 ‘부정 신학’(apophatic theology), 혹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 불리는 전통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하다.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이러하다”고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방식(긍정 신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신 하나님이 무엇이 아닌지를 하나씩 제거해 가며 가까이 서 보려는 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하나님의 본질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컵으로 바다를 담으려 하면 바다가 아니라 컵이 넘치듯, 유한한 언어로 무한한 하나님을 설명하려 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언어가 먼저 넘친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물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출 3:13). 하나님은 정의 대신 임재로 응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히브리어 ‘야웨’(YHWH)는 어떤 범주로도 고정되지 않는 자유로운 현존의 선언이다. 12세기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이 이름을 두고, 요지상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인 속성을 직접 붙이는 모든 진술은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이 아닌지를 하나씩 제거해 가는 것뿐이라고. 야웨의 이름 자체가 이미 설명을 거부하는 계시였던 셈이다.
욥이 고난의 이유를 요구했을 때도 해명 대신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는 질문이 돌아왔다. 설명이 아니라 광대함이었다. 바울은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한다. 칼 바르트가 말한 하나님의 신비는 믿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믿음의 토대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중세 독일의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을 ‘비어 있음’이 아니라 ‘충만함의 넘침’으로 이해했다. 신약성경은 이런 상태를 헬라어 ‘플레로마’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는 단순한 ‘충만’이나 ‘가득 참’을 넘어,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게 하시고”(골 1:19), “그의 몸 된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엡 1:23)고 말하며, 하나님의 풍요로움이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차고 넘친다고 증언한다. 그릇이 비어야 채울 수 있듯,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와 설명이 물러설 때 비로소 당신의 자리를 여신다고 그는 보았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예수도, 응답의 방식을 알지 못한 채 새벽 땅을 짚었다. 그 침묵은 부재가 아니었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말이 담을 수 없는 충만함이 스스로 침묵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다. 설명을 달라고 다그치듯 기도하며 몇 시간을 버텼던 밤, 응답은 오지 않았고 침묵만 길어졌다. 그러나 새벽이 밝아올 무렵, 이상하게도 그분의 방식은 헤아릴 수 없었으나, 그분의 임재는 부인할 수 없었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종합과 르네상스 근대 사유의 문을 연 15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holas of Cusa, 1401~1464)는 이 전통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학식 있는 무지’(docta ignorantia).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앎이라는 역설이다. 우리는 흔히 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쿠자누스는 말한다. 설명이 끝나는 자리에서 진짜 앎이 시작된다고.
다시 인공지능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ChatGPT의 작동 원리를 알지 못하면서도 번역을 맡기고 일상의 판단에 참고한다. 완전한 설명이 신뢰의 전제조건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AI에게는 설명 없이 의존하면서, 왜 하나님께는 먼저 설명을 요구하는가.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를 짚어야 한다. AI의 블랙박스는 복잡성의 한계에서 오는 불투명함이다. 그러나 위-디오니시우스가 말한 ‘신적 어둠’은 다르다. 그것은 결핍이나 실패의 어둠이 아니라, 존재의 풍요로움이 인간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데서 비롯되는 어둠이다.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AI의 불투명함은 빛이 부족해서이고, 하나님의 불투명함은 빛이 너무 넘쳐서다.
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AI는 인격이 없고 사랑도 없다. 블랙박스는 우리를 알지 못하며 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과의 유비는 비교가 아니라 ‘대조’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닮았으나, 하나님은 그 불투명함 속에서도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성육신의 의미다. 설명을 거부하시던 분이 인간의 언어와 살로 역사 속에 자신을 열어 보이신 사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부정 신학의 전통이 결국 성육신을 향해 흘러들어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신앙은 설명에 대한 집착 대신 다른 종류의 앎을 제안한다.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접어두고 그럼에도 다시 무릎 꿇는 신자의 태도, 납득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오늘 하루의 자리를 지키는 신앙인의 태도, 이것이 설명을 넘어서는 신뢰의 구체적인 얼굴이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할 수 있고, 과정이 불투명해도 방향을 믿을 수 있다. 그 신뢰는 삶 속에서 오래 축적된 기억과 거듭된 무릎 꿇음 위에 세워진다.
천오백 년 전 그 익명의 신학자는 말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말이 줄어들고, 마침내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고. 그러나 그 침묵은 끝이 아니라 문이었다. 설명이 멈추는 자리에서, 나는 오늘도 다시 무릎을 꿇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