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가 오프라인 발행 1천호를 넘어 새 이정표를 세웠다. 이민교회와 함께 걸어온 23년, 미주 기독일보는 이민교회를 함께 만들어 나간 우리 주변의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억척스럽게 일궈낸 이민역사 가운데 그들의 간증은 저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 첫 순서로 바울세계선교회 대표 한영숙 목사의 삶과 목회를 나눠서 싣는다. 한인 목회자로는 처음으로 맨하탄에 성전을 세운 한 목사의 파란만장한 목회와 사역의 뿌리는, 그보다 앞서 더 거친 시대를 건너며 믿음을 살아낸 부모 세대와 한국교회의 오래된 신앙 풍경 속에 놓여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다양한 학술활동을 이어 가며, 평생의 동반자이자 목회의 조력자였던 고 김종환 목사의 생애와 신학적 자산을 발굴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 한 목사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한영숙 목사 하면 10달러에 맨하탄 성전을 인수한 목회자가 먼저 떠오른다. 실제로 이 사건은 당시 외부 언론에서도 ‘10달러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그 성전의 뒤편에는 남들이 다 알지 못하는 오랜 헌신과 수고가 있었다. 다섯 명으로 시작한 개척교회가 예배처소를 찾아 떠돌고, 미국교회와의 갈등 속에서도 교회의 본질을 지키려 버티며, 끝내 맨하탄 한복판의 성전을 맡기까지는 수십 년의 눈물과 인내가 있었다. 더구나 성전을 얻었다고 해서 목회가 쉬워진 것도 아니었다. 성전을 맡은 뒤에도 그것을 주의 전으로 지켜내야 했던 또 다른 매순간의 힘겨운 씨름들이 있었다. 한영숙 목사의 맨하탄 목회는 아무 기반 없이 시작한 개척교회가 맨하탄의 상징적인 감리교 성전을 맡게 된 여정이자, 그 성전을 끝까지 지켜 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했던 목회였다.

다섯 명으로 시작한 맨하탄 개척

한영숙 목사의 맨하탄 목회는 애초부터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유니온 신학교 과정을 마친 뒤에도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남편 김종환 목사의 교통사고와 생활의 현실 앞에서 더는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당시 메트로폴리탄 지방 감리사였던 리처드 라이스 목사는 그에게 한인교회를 개척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그는 힘겹게 살아가는 한인들과 한인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맨하탄에서 세우기로 결심했다. 자동차도 없었고, 맨하탄 밖은 거의 가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 어떤 교회가 있는지,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조차 막막한 형편이었지만, 그는 지하철을 타고 직접 예배처소를 찾아 나섰다.

그 길에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도 붙여 주었다. 남편이 입원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려면 96가 전철역에서 갈아타야 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 김윤배에게 한 목사는 주일마다 교회를 찾아다녀야 하는데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교회라고는 다녀본 적도 없던 그 청년은 흔쾌히 따라나섰고, 훗날 한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했다. 한 목사는 이 일을 두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와 보라”는 부르심 앞에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따라나서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1982년 8월 15일, 한 목사의 자택에 다섯 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같은 달 22일에는 맨하탄 웨스트 13가의 메트로폴리탄 듀엔 연합감리교회 본당에서 공식 첫 예배를 드렸고, 축하객을 포함해 17명이 모였다. 그가 처음부터 품은 교회의 상은 분명했다. 큰 교회가 아니라 작지만 강한 교회, 따뜻하고 깨끗한 교회, 살아 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였다.

끊이지 않은 예배처소 위기와 갈등… 맨하탄 이민개척교회의 눈물겨운 시간들

듀엔교회와의 첫 시간은 은혜로웠다. 듀엔교회는 고려교회에 재정적인 요구를 하지 않기로 했고, 두 교회는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교회는 예산 규모 안에서 건물 관리비를 헌금했고 교단 분담금도 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6년 7월 새 담임이 부임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간판을 작게 바꾸라는 요구, 소예배실로 옮기라는 압박, 예배 시작 30분 전에는 건물에 들어오지 말라는 통보, 유치부실을 한마디 상의도 없이 없애 버린 일까지 이어졌다. 막 자리를 잡아가던 개척교회에는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압박이었다.

갈등은 곧 예배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신학적 충돌로 번졌다. 듀엔교회 측은 마침내 고려교회를 세입자로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영숙 목사에게 교회는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로 나뉘는 조직이 아니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이며, 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임시건물위원회를 꾸려 2년 동안 이 문제를 붙들고 싸웠고, ‘듀엔교회 교우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까지 썼다. 결국 굽히지 않았고, 고려교회는 새 예배처소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렇게 옮겨 간 곳이 렉싱턴 연합감리교회였다. 듀엔교회에서 세입자 취급과 갈등을 겪었던 고려교회에게 렉싱턴은 훨씬 안정된 예배처소였다. 이곳에서는 일방적인 임대 관계가 아니라 건물을 함께 사용하며 책임도 나누는 공동시설 사용 협약 방식이 적용됐고, 무엇보다 듀엔에서처럼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압박 없이 예배의 자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렉싱턴에서의 안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곳에서 맞닥뜨린 문제는 이전처럼 직접적인 갈등이라기보다, 맨하탄 교회들이 오래된 건물을 더는 유지하지 못하고 개발과 매각을 고민하던 시대적 현실의 문제였다. 렉싱턴교회는 건물을 지키기 어려워지자 기존 교회를 허물고 지하에 교회 공간을 넣은 뒤 지상에는 7층짜리 아파트를 올려 수익을 내는 이른바 ‘빌딩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계획에 따라 함께 쓰던 교회와 단체들에게 2008년 6월까지 모두 나가야 한다고 통보했고, 실제로 다른 교회와 단체들은 먼저 떠났다. 1층을 쓰던 비영리단체도 2008년 봄 침수 사건을 겪은 뒤 결국 9월에 다른 장소로 옮겨 갔다. 그 결과 고려교회가 내던 월 1,400달러 외에는 건물에 들어오는 수입이 끊겼고, 렉싱턴교회는 2008년 12월 28일 마지막 예배를 드린 뒤 문을 닫았다. 맨하탄의 큰 교회 건물 안에 고려교회만 남게 된 것이다. 고려교회는 그 마지막 시간을 지켜보며 피아노와 난방용 기름 비용을 위해 특별히 7,500달러를 헌금하기도 했다. 렉싱턴교회가 문을 닫은 뒤, 2009년 1월 1일부터는 사실상 고려교회가 그 큰 건물의 관리와 예배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기름 유출 사고와 10달러 성전 인수

한영숙 목사가 맨하탄 목회 초기부터 전심을 다했던 부활절성서강좌. 그의 학술연구 활동은 은퇴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Photo : 한영숙 목사 제공) 한영숙 목사가 맨하탄 목회 초기부터 전심을 다했던 부활절성서강좌. 그의 학술연구 활동은 은퇴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바로 그때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새해예배 직후 한영숙 목사는 개인 신용카드로 보일러 기름을 주문했는데, 기름차 운전자가 교회로 들어가는 파이프에서 기름이 새 길거리로 흘러나오고 있다고 알렸다. 이 문제를 모른 척 덮고 갈 수도 있었지만, 한 목사는 곧바로 교회 전화로 뉴욕시에 신고하도록 했다. 이후 이 사고가 많게는 10만~20만 달러까지 들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기름 유출 사고가 터지자 당시 건물의 법적 소유권을 갖고 있던 뉴욕연회는 보험료를 비롯한 각종 비용과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적지 않은 돈이 드는 문제라는 판단이 나오면서 연회 재단이사회도 더 이상 건물 문제를 미뤄 둘 수 없게 됐다. 연회 재단이사장이 교회를 찾아와 고려교회 임원들에게 이 건물을 어떻게 처리해 주기를 원하는지 물었고, 고려교회 측은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계속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자신들이 건물을 수리할 수밖에 없지만, 그 수리비는 연회가 교회 측에 되돌려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연회 재단이사회는 논의 끝에 건물을 고려교회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결정이 곧바로 소유권 이전 완료를 뜻한 것은 아니었다.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부터 고려교회는 사실상 그 큰 건물을 자기 교회처럼 붙들고 예배를 이어 갔다. 당시 교회가 가진 재정은 8만 달러뿐이었고, 그것은 낡은 건물의 상태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더구나 한영숙 목사에게는 큰 건물을 소유하거나 대규모 수리를 맡아본 경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빚을 내거나 외부의 힘을 끌어오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본을 보이며 교인들에게 헌신을 요청했고, 부담을 느껴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목회를 꿋꿋하게 이어 갔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건물 수리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고, 업체를 수소문해 공사를 맡겼고, 일꾼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겨 주면서 수리를 이어 갔다.

당시 뉴욕연회 감독이었던 박정찬 감독은 고려교회가 3년 동안 교회 건물을 실제로 수리하고 관리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마침내 단 10달러에 맨하탄 성전 소유권을 고려교회로 옮겨 줬다. 고려교회는 2011년 9월 21일 뉴욕연회로부터 10달러에 건물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법적 절차를 마쳤고, 2012년 6월 연회에서 맨하탄 이스트 62가 성전이 교회 소유라는 사실이 최종 확정됐다. 당시 시가 1,800만 달러에 이르는 건물이었다.

이것은 고려교회가 단지 운이 좋아 맞게 된 ‘10달러의 기적’이 아니었다. 맨하탄이라는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한 작은 한인이민교회가 성전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교회처럼 붙들고 지켜 온 시간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한영숙 목사에게도 이 일은 값비싼 맨하탄 성전을 얻게 됐다는 차원의 사건이 아니었다. 다섯 명이 자택에 모여 첫 예배를 드리던 개척교회가 수십 년의 싸움과 눈물 끝에 끝내 성전을 맡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작은 이민교회의 수고를 기억하셨다는 표시처럼 다가왔다.

기적적 맨하탄 성전 인수 뒤에도 끝나지 않은 목회라는 씨름

하지만 10달러에 성전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고려교회가 건물을 넘겨받은 뒤 한영숙 목사는 오래된 맨하탄 성전을 실제로 지키고 돌보는 일까지 감당해야 했다. 해마다 이어지는 보수와 점검은 단순한 시설 관리가 아니었다. 성전을 가진 기쁨 뒤에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처소로 붙들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늘 함께 따라왔다. 건물을 받는 일은 큰 은혜였지만, 그 건물을 주의 전으로 지켜 내는 일 역시 또 다른 목회였다.

맨하탄 목회 또한 저절로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은 여전히 거칠었다. 사람은 모였다가도 흩어졌고, 전담 인력 없이 건물과 보안, 사역과 예배를 함께 감당하는 일은 결국 목회자의 몫이 됐다. 프로그램을 하나 열어도 사람과 재정이 필요했지만, 한영숙 목사는 교회를 사업체처럼 운영하며 사람을 붙들어 두는 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교회는 끝내 헌신과 말씀으로 서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한 원칙을 붙들고 가는 동안 고려교회는 2014년과 2015년에 주일 출석이 30명 정도까지 줄어드는 시간도 지나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실패로만 보지 않았다. 맨하탄에서는 3~4년마다 다시 개척을 해야 하는 것 같았고, 사람을 붙드는 일도, 말씀을 준비하는 일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일도 모두가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 가는 하나의 목회라고 받아들였다.

목회 36년차를 맞은 2018년까지 한영숙 목사는 줄곧 자신이 붙들어 온 신앙의 원칙을 지키며 맨하탄 목회를 이어왔다. 그는 고려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정말 행복하게 살았다고 돌아봤고, 하나님께서 자체 건물을 가진 교회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떠나게 하신 것을 놀랍고 감사한 은혜로 받아들였다. 또 훗날 36년 동안 섬긴 고려교회의 역사와 예배처소의 문제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이민교회와 예배처소 문제』를 펴냈다. 그에게 맨하탄 목회는 단지 지나간 사역이 아니라 기록되어야 할 한 시대의 신앙사였다.

그의 맨하탄 목회가 특별했던 것은, 바쁜 이민목회 현실 속에서도 끝내 목회의 중심을 성서 연구와 설교에 두었다는 점이었다. 한영숙 목사는 1983년 제1회 부활절 공개성서강좌를 시작으로 25년 동안 학술 발표 형식의 성서강좌를 이어 갔다. 그는 해마다 성탄절이 지나면 약 3개월 동안 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뒤 부활절 강좌를 열었고, 단순한 성경공부를 넘어 특정 주제를 정해 본문을 깊이 파고드는 작업에 힘을 쏟았다. 학술 연구 모임이 넉넉하지 않은 이민교회 현실 속에서도, 그는 목회가 결국 말씀 연구와 설교에서 무너지면 오래 설 수 없다고 여겼다. 맨하탄에서 한영숙 목사가 붙든 것은 건물만이 아니라, 끝까지 성경을 중심에 두는 목회 자체였다.

한 목사는 “제가 만약 플러싱에서 목회를 했다면 다른 여러 일에 신경 쓸 것이 많아 목회에만 이렇게 깊이 집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맨하탄에서 말씀과 교회만 붙들고 살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성전까지 맡겨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특별한 위로이자 은혜였다”라고 했다.

은퇴 이후, 김종환 목사의 유산을 붙들다

고 김종환 목사가 고려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던 당시 사진
(Photo : 한영숙 목사 제공) 고 김종환 목사가 고려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던 당시 사진

한영숙 목사를 두고 많은 이들은 여장부라고 불렀다. 한번 뜻을 품으면 쉽게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한영숙 목사의 강단과 뚝심은 은퇴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지금 힘을 쏟고 있는 일은 남편 고 김종환 목사가 남긴 신학적 유산과 영적 자취를 발굴하고 정리해 다시 전하는 일이다. 은퇴 후 편히 일상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한 목사는 오히려 더 힘든 길을 택했다. 남편이 남긴 말씀과 글, 기도의 흔적을 다시 세상 앞으로 꺼내 놓는 일을 자신의 남은 소명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다.

한 목사에 따르면 김종환 목사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였다. 김 목사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6·25를 겪으면서 사실상 고아처럼 살아야 했다. 잠잘 곳도, 먹을 것도, 학비를 대줄 사람도 없는 형편에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 목사는 “그는 스스로 잠자리를 해결해야 했고 먹고 사는 일과 학비까지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김 목사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배우려고 했고, 진리에 대한 추구를 놓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한 목사가 특별히 붙든 것은 김종환 목사가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 봉사하기 위해 숭실대에 진학해 기독교교육과 철학을 공부했고, 대학 시절에도 방학이면 농촌교회를 찾아 건물을 지어 주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젊은 시절 교회학교 책임자가 되어 가정을 방문하고 교사들을 지도하며 전도사나 부목사처럼 일하면서도, 직장에서 받는 월급의 3분의 1을 헌금했다는 것이 한 목사의 기억이다. 한 목사는 “그에게 교회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나 명예와 출세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었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 같은 곳이었고,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해야 할 섬김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미국에 온 뒤에도 그런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림을 그릴 줄 알았기 때문에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야채가게에서 밤새 노동하며 학교를 다녔다. 한 목사는 “돈이나 명예를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 힘들게 살면서도 봉사와 헌신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라며 “미국에 와서도 더 쉽고 돈이 되는 길이 있었지만 자기 재능을 그런 일에 쉽게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런 삶의 태도는 맨하탄 개척 초기에도 한 목사에게 큰 힘이 됐다. 아무 교인도, 돈도, 건물도 없던 시절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버텨야 했다. 한 목사는 “6개월쯤 지나니까 저희가 모아 놓은 돈이 다 떨어지고 은행에 200달러만 남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돈이 없다고 했더니 김목사는 ‘선지자의 집에 양식이 떨어진 것은 영광이다’라고 했다”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어려운 목회 현장에서도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다”라고 돌아봤다.

한 목사에게는 자신이 생전에 그를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기에 한 목사는 지금도 하루하루 남편의 신앙적 유산을 발굴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고 있다. 그는 김 목사가 가장 행복해했던 일이 도서출판 ‘신앙과 교회’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 이유 속에서 그 일을 너무 빨리 중단하게 했다. 한 목사는 이를 두고 “그 사실이 지금도 저를 괴롭힌다”고 했다.

고 김종환 목사가 1997년 주보표지용으로 직접 그린 삼일절 그림. 이 그림은 오는 6월 출판기념회에서 공개되는 책 '영혼의 소리' 에 수록돼 있다.
(Photo : 한영숙 목사 제공) 고 김종환 목사가 1997년 주보표지용으로 직접 그린 삼일절 그림. 이 그림은 이번에 출간된 '영혼의 소리' 에 수록돼 있다. 김 목사는 생전 자신의 예술적 달란트로 많은 신앙적 작품들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한 목사에게 은퇴 이후 남편의 글과 설교, 기도와 신학적 흔적을 다시 정리하는 일은 단순한 추억 보존이 아니었다. 뒤늦게라도 그가 남긴 것을 바로 세우고, 그가 평생 사랑했던 교회 앞에 다시 돌려놓는 일에 가까웠다. 그는 남편 김종환 목사의 죽음을 단절로만 받아들이지 않게 된 데에는 바울신학자로 오래 교류해 온 황현수 교수의 말이 큰 계기가 됐다고 했다. 황 교수는 그에게 “잊어버리려고 하지 말라”며 김종환 목사의 죽음을 ‘존재의 변이’로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육체의 생명은 끝났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부활의 생명으로, 다른 형식의 존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 목사는 그 말을 통해 남편의 죽음을 상실의 끝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이런 인식은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한 목사는 김종환 목사가 시작한 바울세계선교회를 정식 기구로 세워 운영하고 있고, 도서출판 ‘신앙과 교회’도 등록해 남편이 남긴 글과 사상을 세상에 다시 내놓는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안에서, 저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해야 할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왜 그렇게 힘든 일을 계속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죽은 이를 그냥 잊고 편히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한 목사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김 목사를 통해 제가 목사가 되겠다는 결단을 했고,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습니다. 이제는 김 목사가 남기고 간 일을 제가 끝까지 감당하며 살다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가는 날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목사로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충실히 감당하겠다는 각오로 늘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