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 시절에 사역자의 길을 결정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은 대학 생활을 통해 사역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했다. 그의 대학 시절은 그가 평생의 사역 방향을 결정하고, 동반자인 아내 루스 벨(Ruth Bell)을 만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빌리 그레이엄은 대학 생활을 통해서 사역을 실습하고, 특히 설교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빌리 그레이엄은 는 총 세 곳의 학교를 거치며 학업을 이어갔다.
첫째, 밥 존스 대학교 (Bob Jones College)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엄격한 성경 교육으로 유명한 밥 존스 대학교에 진학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밥 존스 대학교의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근본주의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중도 하차했다. 1936년 9월에 입학하여,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 짧은 재학 기간이었지만 빌리 그레이엄은 이곳에서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을 품기 시작했다.
둘째, 플로리다 성경학원 (Florida Bible Institute)이다. 이 학교가 현재는 트리니티 대학으로 개명했다. 이 학교 4년 과정을 마치며 사역자가 되기 위한 많은 훈련을 했다. 플로리다주 템플 테라스 골프 코스의 18번 홀에서 밤새 기도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했다. 설교 연습: 인적이 드문 습지에서 악어와 새들을 청중 삼아 설교 연습을 하며 실력을 쌓았다. 이 학교 재학 중인 1939년, 남침례회 소속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셋째, 휘튼 대학교 (Wheaton College)이다. 이 학교를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다녔다. 빌리 그레이엄은 휘튼 대학교에서 인생에 중요한 일들을 경험했다. 인류학(Bachelor of Arts in Anthropology)을 전공했고, 평생의 동역자인 루스 벨(Ruth McCue Bell)을 캠퍼스에서 만나 교제했고, 졸업 직후인 1943년 8월에 결혼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대학 시절 이미 뛰어난 설교자로 인정받아 지역교회의 학생 목사로 활동했으며, 당시 대학 총장이었던 V. 레이먼드 에드먼(V. Raymond Edman)으로부터 평생 지속될 조언과 멘토링을 받았다. 휘튼 재학 시절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받아들이며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의 기틀을 확고히 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휘튼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플로리다 성경 학교 재학하며 1939년 남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빌리 그레이엄은 휘튼 대학교 졸업 후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일리노이주 웨스턴 스프링스 침례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사역했다. 이것이 빌리 그레이엄이 지역교회를 담임 목사로 섬긴 유일한 경험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목회하면서 시카고의 라디오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밤의 노래(Songs in the Night)'를 진행했다. 이 경험은 빌리 그레이엄을 대중 소통 능력을 키웠고, 이때 평생의 동역자인 음악가 조지 베벌리 쉐를 만났다. 1944년 시카고 오케스트라 홀에서 열린 YFC 첫 집회에서 설교를 맡았던 그는, 설립자 토리 존슨(Torrey Johnson)으로부터 YFC사역을 제안받고, YFC 사역을 위해 스프링스 침례교회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고 1945년 1월 YFC 1호 전임 순회 전도자가 되어 전도자의 삶을 시작했다.
YFC 사역이 빌리 그레이엄이 부흥사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YFC사역을 통해 대중 집회 인도의 경험을 쌓았고,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BGEA)의 핵심 멤버 클리프 배로우즈(Cliff Barrows), 조지 베버리 쉐어(George Beverly Shea) 등을 만났다. 아울러 그는 사역을 위협할 수 있는 재정, 성, 권력의 유혹을 막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사역 윤리 강령, 즉 '모데스토 선언(Modesto Manifesto)'을 발표했는데,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을 지키는 힘이 되었다.
[인물로 보는 현대 신학 2] 미국 신복음주의 대부 빌리 그레이엄의 어린 시절
[인물로 읽는 현대 신학 1] 복음주의 지성 존 스토트에게 배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