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리스타트 교회 담임 박형용 목사
(Photo : ) 달라스 리스타트 교회 담임 박형용 목사

<만나보기> 성경의 인물들을 만나보며 내 인생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는 이야기….

다섯 번째 이야기: 나의 계획이 다 헝클어 진 것 같을 때에도...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야기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마태복음 1장 18-20절

오늘 우리가 만나 볼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요셉에게는 작은 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마리아”라는 여인과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배운 목수기술을 열심히 연마했고, 이제는 한 가정을 책임 질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은 마리아와의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고, 이제 얼마 뒤면 같은 집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마리아의 배가 점점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는 어떤 성적인 접촉도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마리아의 배가 불러오더니 급기야는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이죠.

그 소식을 들은 요셉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침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대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차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다스리고, 큰 숨을 들이마시며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죠(마 1:18-19 참고).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이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이야기 해주기를 마리아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요셉과 마리아가 사용 되도록 선택 받았다는 것이고, 그 일 때문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이니 두려워 하지 말고 마리아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요셉은 비록 당황스럽고, 자신이 계획하던 인생의 방향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비록 자신의 아기는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자신의 가정을 통해서 보내시겠다고 하시니,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부르시고 선택하셨다는 사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시는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 조사에 응하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요셉은 만삭의 아내인 마리아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 동네에서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가게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하는 그 순간에 마리아가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출신의 임박했던 거죠. 아기를 처음 낳아보는 부부였기 때문에 마리아도 당황하고, 요셉도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서 깨끗한 장소를 찾아서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장소를 찾아다녔는데, 결국에는 아기를 낳을 장소를 찾지 못해서 동물들이 먹고 자는 곳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급하게 아기를 낳아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장소를 찾는데 시간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곳에서 아이를 낳아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아기를 안아주었습니다.

그 때 요셉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나귀들이 있는 그 우리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출산하는 것을 봐야 하는 요셉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더럽고 비위생적인 그곳에서 아들을 출산하게 해야 했던 남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사실 요셉이 계획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은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일평생 정직하게 살면서 욕심없이 살려고 노력했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자녀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요셉의 꿈이었고 계획이었죠. 그런데 어느날 성령께서 아이를 잉태하게 하셨다더니,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출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자신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이웃들이 모여서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들릴 때, 같이 기뻐하고 환호해 주며 그 아이의 출생을 축복하는 그런 소박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어딘가요? 나귀 같은 동물들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더러운 구유에서, 누구도 축하해주지 않고 누구도 배려해 주지 않는 공간에서,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아내의 첫 출산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내의 출산을 도와 줄 산파도 구하지 못했고, 아내가 편히 쉴 침대도 없고, 짐승들이 베고 눞는 지푸라기 같은 것에 몸을 기댄채로 냄새가 진동하는 그 비위생적인 곳에서 아이를 출산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아들이 태어날 거라고 이야기 하셨을 때, 비록 나의 행복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어도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가정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대단한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이런곳에서 내 아내가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차가운 짐승의 우리에서 출산을 하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목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사이즈를 재고, 설계도를 만들어 내서, 그 사이즈에 딱 들어맞는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요셉은 더더욱 계획적인 사람이었을 것이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짜고 그 일을 실행하는데 익숙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상황을 보십시오. 지금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아기를 잉태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호적하러 가게 만드셨고, 하나님이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초라한 구유에서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요셉이 계획하고 생각했던 인생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살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한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순종하겠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가시고 사용하시는 방법을 보면, 우리가 예상한 내용과 범주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짐승의 구유에서 아기를 출산한 마리아를 보고 있는 요셉처럼, 우리의 마음속에도 의문과 질문들이 차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요셉이 서있는 나귀의 구유는, 우리의 상황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온 가족을 데리고 선교지에 갔는데, 그 선교지에서 사랑하는 자녀를 말라리아로 잃어버린채 울고 있는 선교사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가게를 운영해 왔는데, 어느 날 인종차별 시위를 틈타서 가게에 찾아온 약탈꾼 들 때문에 부서지고 텅빈 가게를 보고 있는 어느 집사님의 모습일 수도 있죠. 또한 오늘 요셉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다른 꿈들을 다 버리고 시골로, 섬으로, 사람들이 가지않는 곳으로 가서 목회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하루 먹을 양식도 모자라서 매일매일 가족이 눈물로 기도하는 어떤 시골과 섬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계획한 것은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것은 이게 아닌데...물론 내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많은 성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도 혼란 스러웠을 것입니다. 처음 천사가 나타났을 때부터, 마리아가 잉태하고, 아이를 낳는 오늘까지도 요셉의 머릿속은 혼란한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짐을 꾸려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고, 비록 그 곳이 짐승의 구유라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요셉도 속상했을 것입니다. 이해가 다 되지 않았겠죠. 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까지 하시는지, 왜 하필이면 자기인지, 질문하고 또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고, 그러한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가다보면, 때때로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까지 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의문들은 우리가 주님을 다시 뵙는 그 날까지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 이해되지 않을 지라도” 순종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헌신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이해되지 않는 순간과 현실속에서 자신의 계획을 묵묵히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부터 23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지금 성경이 요셉의 순종으로 인해 이 땅에 오신 그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예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요셉이 꾸었던 소박한 꿈은, 사랑하는 아내의 출산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축하하고 축복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짐승의 구유에서 출산하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서운함을 주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날,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때때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데 있어서 내가 세운 계획보다, 더 큰 희생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까지 희생하고, 헌신해야 되는 슬픔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한 현실속에 버려 두십니까?”라고 소리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초라한 구유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못했습니다. 원망하기에 마땅한 그 현실도 끝까지 요셉의 인생을 어둠속에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나님이기 때문이었고, 구유에서 그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내가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이 정도로 힘들지는 몰랐다고 해서, 혹시 주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때면 오늘 요셉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결코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시편 94편 14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있는 곳이 어디던, 어떤 상황속에 계시던 간에, 임마누엘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이 시편기자의 고백과 찬양이,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임마누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