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서론): “선교서신은 선교현장의 선교사만이 쓰는 독특한 문학장르”
“글쓰기는 영성훈련이다/내면을 치유한다/관계를 소통한다”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다” (김기현)

“그리스도인에게 작가(author)가 된다는 것은 창조주(Author)께서 행하신 일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다. 그렇다면 모든 예수쟁이는 창조주께서 행하신 일을 글쓰기를 통해서 이어가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다. 그것이 예수를 살아내는 방법이다. 교회는 예수를 살고 말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기록한다.”(책 뒤 표지, 창조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선교현장에서 이어가는 자가 선교사이다)

선교사는 선교현장에서 ‘글을 쓰는 자들’이다. 저자는 “예수공동체로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로 규정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삶의 현장에서 기록되었다. 신약성경 27권의 절반은 선교현장에서 쓴 서신들이다.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는 이미 글쓰기의 DNA를 갖고 태어난 자들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자도 선교서신은 감히 쓸 수 없다. 그러기에 선교사의 선교서신은 “독특한 문학 장르”임 이 틀림없다.

이 책의 저자는 C.S. 루이스의 안목과 필립 얀시의 가슴을 지닌 기독교작가이다. 김기현 목사(부산 수정로침례교회)는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의 제자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침례교신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였다(Ph.D). 공격적 책읽기와 공감적 책읽기(SFC), 가룟 유다 딜레마(IVP), 예배, 인생최고의 가치(JOY) 등의 저자다.

2부 10장의 제목을 먼저 읽어보자. 제1부 왜 글을 쓰는가?: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자서전과 기도문)/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일기)/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서평)/글쓰기는 관계를 소통한다(편지)/글쓰기는 세상을 변혁한다(컬럼)

제2부 어떻게 글을 쓰는가?; 독서:읽고 또 읽으라/메모:머리가 아니라 손을 믿으라/개요:물 흐르듯이 구상하고 촘촘히 구성하라/문장:그냥 당장 쓰라/퇴고:사랑하니까.
서평자는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서평쓰기’의 핵심을 요약하며 서평 할 것이다.

“교회(신자의 공동체)는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유진 피터슨)

“유진 피터슨은 신자의 공동체를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라 지칭했다. 이 공동체의 독서법은 아예 성서를 통째로 집어 삼킨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먹으라”. 왜 그런가?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성서를 먹는다는 말은 성서를 암송하고, 그렇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공동체를 창조하고, 성서를 먹는 공동체는 성서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실한 제자를 양육한다.” (p.13, ‘교회는 성경을 먹는 공동체다’. 아멘 아멘이다. 서평자는 ‘성서’보다 ‘성경’ 더 선호한다)

“성서와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서를 먹는 거룩한 교회와 제자 되기 위함이라면, 글을 쓰고 책을 짓는 목적은 무엇인가? 왜 글을 쓰는가? (중략)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의 생명을 얻고 누리게 하는 것이듯, 무릇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도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증언하고 표현하며, 그 글을 읽는 이들도 생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p.14)

그리스도인의 글쓰기의 목적: ‘생명을 증언하고/생명의 대열에 동참을 초대하기’

“글은 결국 그 사람이다. 무릇 모든 책은 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책과 글은 쓰는 이의 인격이요 얼굴이다. 과장하여 쓸 것도, 부끄럽다고 감출 것도 없다 (중략) 글쓰기는 내 속의 나, 이런 저런 가면 속에 감추어진 맨 얼굴 그대로의 나를 찾는 도구다.” (p. 15)

“왜, 무엇을 쓸 것인가? 이 말은 곧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글로 쓰면 된다. 사도요한은 우리 더러 목격자라 했다. 내가 만난 하나님과 내가 겪었던 사건을 본 대로 진솔하게 진술하면 그만이다. 목격자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순교의 각오와 결단으로 증언하는 증인이다.” (p.16, 예수쟁이의 글쓰기도 때로는 순교도 각오 해야 할 것이다)

1.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참 영성은 '영을 몸으로 살아 내는 것”

“영과 몸이 온전히 통합된 삶이 영성이다. 영성 깊은 삶은 육체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며, 육체를 탐닉하는 것도 아니다. 육체 없는 영혼의 신비를 추구하지도, 영혼 없는 육체의 방탕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혼과 몸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양자 없이는 누구도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영이 있는 몸, 몸이 있는 영이 참 인간이듯, 영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을 육체로 풀어내는 것이 참 영성이다.” (p. 25)

“리처드 포스터는 우리 시대의 영적인 질병이 바로 피상성이라고 진단했다.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피상성은 시끄러움과 조금함과 혼잡함을 통하여 크게 역사한다.” (p. 28)

오늘날 개신교는 너무나 가볍고 피상적이다. 리처드 포스트의 지적대로 시끄럽고 조급하고 혼란스럽다. 서평자는 첫 안식년을 맞아 조국의 여러 교회서 예배를 경험하였다. 생소한 복음 송들이 많아 놀랐다. 깊은 영성에서 길어 올린 생명력 넘치는, 잠든 영혼을 화들짝 깨우는 설교가 아쉬웠다. 새로 출판된 신앙서적을 찾아서 기독교 서점을 여러 번 찾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사셨고, 그것이 육화의 본질이듯, 영이 몸이 되어 사는 것이 영성의 본령이라면 글쓰기는 영성의 문자적 표현이요, 영성 훈련의 방편이 된다는 뜻이다. 글이 된 삶, 즉 내 삶이 글이 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자서전과 기도문이다. 무릇 모든 글쓰기가 나름 영성적 차원을 지니고 있지만 유독 자서전과 기도문은 영성의 요체가 된다.” (p. 29, 글쓰기가 영성의 문자적 표현/영성훈련의 방편임을 확인한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변화를 발견하게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나누어 주게 된다. 기도문과 자서전 쓰기로 얕음에서 깊이로, 속도에서 느림으로, 조급함에서 인내로 성숙하는 영성에 다다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글쓰기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p. 38-39, 이런 글을 읽으면서도 글쓰기를 주저하거나 미룰 수 없지 않을까?)

2.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영성)일기로 내면 정돈!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글쓰기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통로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성찰하는 도구이자 치유하는 수단이다. 단 한 문장이라도, 서툰 글 솜씨로도, 아무렇게나 끄적인 낙서로도 치유의 효과가 나타난다. 글쓰기를 통해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면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온갖 상처들로 갈가리 찢겨진 내면과 마주치게 된다.” (p. 46, 그래서 ‘영성일기’는 하나님과 경험하는 최고의 수단이 된다)

글쓰기는 먼저 결심하고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평자는 2016년 L.A 한인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며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의 ‘영성일기’의 실제를 배웠다. 그때부터 영성일기쓰기를 작정하였다. 제대로 된 영성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3.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한다'.

“다른 어떤 신앙과 견주어도 기독교는 통전적이다. 동양적 명상은 생각을 비우라 하지만, 성서적 묵상은 바른 생각으로 채우라 한다. 지성을 버림으로서가 아니라 지성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중략) 그러므로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잘 계발되지 않는 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는 헌신하는 삶, 외적으로는 섬기는 삶, 지적으로는 합리적인 삶이다.” (pp. 57-58, 헌신과 섬기는 삶, 합리적인 삶에서 글이 나온다)

본서의 저자 김기현의 목사의 통찰에 전적으로 아멘 하게 된다.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헌신하며 섬기는 삶과 더불어서, 지적으로 합리적인 삶과의 균형이 필요하다. 합리적인 삶은 지성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삶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면 왜 이다지도 신앙생활에서 지성이 중요한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하기 때문이다. 인간 지성의 전당에는 주인이 있다. (중략)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법을 훈련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생각에 물들게 된다. 세상 풍조에 흡수되고 세상 가치를 좇아 살게 된다.” (p. 59, 서평자는 구원받자마자 기독교 선교단체(죠이)서 강도높은 제자훈련을 받았던 것들이 일평생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함을 경험하고 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곧 가난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큰 죄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난이라고 했다. 가난 중에도 제일 위험한 가난이 생각의 가난이라 했다. 스캇 펙은 더 강력한 단어를 사용한다. 바로 원죄다. 스캇 펙은 인간의 원죄를 '게으름'으로 규정한다.” (p. 61)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무슨 죄인가?' 서평자도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이즘엔 생각 없이 사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듯하다. 삶의 분명한 목적이 없기에 유튜브나 인터넷 서핑을 하며 소일하는 자들이 많다. 선교현장의 대다수의 젊은이들도 그러하다. 생각하지 않은 것이 제일 위험한 가난이요 원죄 그 자체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좋은 예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의 최종 기획자였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는 그의 범죄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음이라고 하였다. (중략)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p. 61, 깊이 생각지 않고 살다가 오늘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유튜브에서 좌·우 편향된 정치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으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편 가르기, )

“글쓰기는 생각하기다”: 지성 계발, 논리적 사고형성(論理的 思考形成)을 돕는다.

“논리적인 글쓰기는 지성 계발과 글쓰기가 만나는 접점이다. 미국의 이공계 대학인 MIT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무척 강조하고, 구내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왜 글쓰기를 중시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이 놀랍다. 그런 걸 질문하는 것이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은 사회의 리더가 될 사람이고, 그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글을 쓰는 것이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p. 62)

서평을 쓰라. 서평쓰기의 유익: 서평쓰기의 실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글쓰기는 단연 서평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독서가 생각의 내용을 채운다면, 서평은 그것을 체계화하고, 정리한다. 지성계발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것인데, 생각이란 것이 그저 지금부터 '생각하기 시작!' 이라고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 진공상태에서 생각할 수 없다.” (p. 64, 필자 강조)

서평자는 5,6년여 전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공부하였던 지식이 체계화되고 정리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때 늦은 깨달음이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각성(覺醒)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할렐루야!

“글을 쓸 때는 항상 뇌를 풀가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고력이 향상된다.” 그렇지만 요즘 휴대전화 문자나 개인 홈피의 대략 산만한 글을 쓰는 것은 그리 큰 도움이 못된다. 주제를 제시하거나 자유로운 글이라도 써보면 간단치 않다. 논리와 내용, 문장을 갖춘 글을 쓰면서 치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력을 키우면 독서 능력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생각하는 힘도 기를 수 있다는 점이다.” (p. 63, 필자 강조)

제대로 된 선교서신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어느 정도의 내용과 문장을 갖춘 글을 기대한다. 서평자는 평신도 집사시절부터 여러 선교사들을 후원하며 수 많은 선교서신들을 읽었다. 여러 선교(보고)서신 중에는 내용과 문법 나아가 철자법도 안 맞는 글들이 많다. 서평자는 이것을 의식하며 선교서신을 쓸 때 바울 선교사의 서신을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쓰고있다.

“무릇 모든 학문의 기초는 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책 한 권 바로 읽지 못하는데 다섯 수레를 읽은 들 무슨 소용 있을까. 오독과 왜곡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곁에 두고 아끼며 읽고, 몇 번이고 겹쳐 읽으면서 우리 정신은 자라게 된다.” (pp. 65-66, 필자 강조)

“그럼 왜 서평이 지성 계발을 원활히 하는데 유용한가? 서평을 쓰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책을 대충 읽어서는 단언컨대 쓸 수 없다. 공격적으로 읽지 않으면 책을 잘 읽을 수 없을 뿐더러 막상 서평을 쓸라치면 앞이 캄캄해진다.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밀하게 읽고, 거저 맞장구치면서 읽지 않고 대화하면서도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자연히 지성이 활발해지게 된다.” (p. 66, 서평쓰기를 한 자만이 깨닫는 진리)

필자는 매주 1편 서평쓰기가 목표다. 솔직히 서평 1편을 쓰기위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먼저, 책을 촘촘히 읽는다. 작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정독, 재독한다. 서평을 전 세계 선교사 단톡방, 페이스 북에 올릴 때마다, 두렵고 떨리기도 한다. 책의 저자가 내 서평을 읽고 빙그레 미소를 지을 정도의 서평을 쓰는 것이 1차 목표이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쓴 나의 서평을 읽은 10여 명의 저자들로부터 큰 격려를 받았다. 어떤 저자는 “선교사님의 서평이 원석을 보석으로 만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고 고백하였다.

“서평을 많이 읽으라. 이는 로이드 존스도 말한 바 있다. 조금 짧은 신문의 서평이나 좀 더 긴 잡지의 서평을 읽으면서 독서 지존들과 서평고수들이 어떻게 쓰는지 관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책의 여백이나 본문 사이에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인상과 단상을 놓치지 말고 책에다 메모하라. 그것이 짧든 길든 개의치 말고 적어두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서평이 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단평이다. 책 뒤표지에 추천하는 짧은 글 말이다. 어찌되었건 그것이 훌륭한 서평 쓰기의 시작으로 최상이다. (pp. 66-67, 서평자는 저자의 이 충고를 실천하고 있다).

나가는 말(결론): “크리스찬 작가(author)는 창조주(Author)의 일을 대행하는 자”
“선교서신은 오로지 선교현장에서 선교사가 쓰는 ‘독특한 문학 장르’이다”(배안호 선교사)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50:4).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작가(author)가 된다는 것은 창조주(Author)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말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이 되시고, 기록된 언어와 그 집을 자기 존재로 삼으셨다. 그것이 성서이다. 하나님은 성서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말과 글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말과 글인 성서가 되셨고, 성서다. 하나님은 말이고, 글이다. 작가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다. (pp. 20, 21,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자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생학습자’로서 끊임없이 배우는 제자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ambassador)이다. 하나님의 작가로서 글을 쓰는 자이다. 신약성경의 절반은 선교서신이다. 선배 바울 선교사의 ‘나를 본 받으라’(고전11:1)에는 분명코 선교서신을 쓰는 것도 포함된다. 선교서신은 단순한 선교보고/기도(혹은 선교비)요청서가 아니다.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만이 쓰는 독특한 문학 장르이다. 선교서신 쓰기는 선교사의 특권이다.

“왜 글을 쓰는가? 아니 왜 글을 써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리 하고 계시니까. 그리하라 하시니까. 내 안에 주체하지 못할 생명과 기쁨이 있으니까. 그리고 글 쓰는 것이 내게 생명이고 기쁨이니까. 내 글을 읽는 소수의 독자들이 내가 누렸던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니까.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p. 21)

서평후기

서평자(필자)는 10여년 전에 김기현 목사의 <글쓰는 그리스도인>을 거듭 읽으며 서평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후 어느 날 파라과이에서 새벽기도시간에 주님은 ‘선교사들을 위한 글쓰기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즉각순종(卽刻順從)’! 저의 삶의 모토대로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서평을 쓸 때 마다 저자의 깊은 속마음과 뜻을 알아차리며 대화하는 느낌이다. 서평쓰기를 탈고할 때마다 ‘소확행’의 기쁨을 누린다. 이 지면을 빌어서 김기현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배안호 선교사.
배안호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