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리스타트 교회 담임 박형용 목사
(Photo : ) 달라스 리스타트 교회 담임 박형용 목사

<만나보기> 성경의 인물들을 만나보며 내 인생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는 이야기….

두번째 이야기: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마주하고 있을 때.. 요셉 이야기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창세기 50장 15-21절

오늘 우리가 만나 볼 “요셉”이라는 사람은 꽤나 억울하고 힘든 젊은 시절을 산 사람입니다. 요셉의 아버지였던 “야곱”에게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녀들을 차별하는 버릇이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에게만 특별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화가 났고,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화가 폭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 던지고, 잠시 뒤에는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짐승들에게 잡아 먹혔다며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죠.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의 나이는 고작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부터 외로움 속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해 졌습니다. 요셉이 알지 못하는 나라에 혼자 떨어져서, 그것도 노예로 팔려와서 홀로 차디찬 돌 바닥에서 잠을 자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도 요셉은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성실하게 살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되이 담당하며 살았죠. 그래서 결국에는 애굽의 시위 대장이었던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가정 총무”라는 직책까지 맡게 됩니다.

물론 그 뒤에도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몇년간을 감옥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요셉을 건져내셨고,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는 일을 통해서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 대신으로, “이집트의 바로” 다음 가는 권력자로 높게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꿈을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애굽에 7년간의 풍년과 7년간의 대 흉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총리였던 요셉이 잘 준비해 온 덕분에 흉년에 대비를 잘 해왔고, 온 나라에서 이집트에 양식을 빌리러 오게되는 경제 호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아주 익숙한 얼굴들이 요셉을 찾아오게 됩니다.

창세기 42장 5절부터 8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도대체 이게 누구입니까? 약 20년 전에 자기를 구덩이에 던지고,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긴 형들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 때 요셉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요셉이 형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쳐다 보았을 때,
구덩이에서 형들을 올려다 보았을 때, 형들은 자기에게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형들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형들은 그 목소리를 외면하며 비웃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눈 앞에 그 형들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상황이 완전히 바뀐 상태로 말이죠. 요셉의 말 한마디면 그 형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고, 평생동안 애굽의 감옥에 가둘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상태로 요셉은 형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얼마든지 복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는 권세라면, 충분히 그들에게 해를 가할 수 있었죠. 그런데 성경은 요셉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용서하지 못한 분들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그때는 분명히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얼굴을 마주하거나 소식을 들을 때면 또 다시 그 때의 상처와 분노가 찾아와서 도무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용서”에 관련된 말씀을 들을 때면, 벌써부터 거부감이 생기고 마음에 어려움이 생기는 분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많은 성도분들은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을 어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용기를 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취사 선택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0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용서에 대한 성경의 원리 중의 하나는, 성경은 우리에게 “무조건 참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악을 행한 원수들의 악함은 반드시 갚아 질 것인데, 문제는 그 원수는 우리가 갚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이죠.

시편의 기록들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곳에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르짖는 시편기자들의 고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원통하게 기도하고 있죠.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억울함과 부당하게 받은 상처를 말 없이 삭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기도의 내용들을 오롯이 성경속에 기록해 놓았다는 거죠. 그러면 왜 성경은 그러한 탄원시와, 원통함에 관련된 시를 기록해 놓고 있을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찬양과 예배로 받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속사정들을 들고서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원통한 마음을 가지고도 원수를 갚지 않고,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그 문제를 돌려 드렸다는 것이죠.

그들은 스스로 원수 갚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속에서는 불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하려고 애썼으며, 잘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밤새도록 원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었을지라도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믿고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찬양으로 받아 주셨다는 것, 그것이 수많은 탄원시와 복수시들이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잠언 20장 22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참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심판의 자리에 올라서 우리까지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죠.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스스로 그 죄악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으시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의 손이 죄악으로 물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스스로 원수를 갚아 주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 스스로 심판을 내리고 복수를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분히 담당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스스로 복수를 하려 하는 것은,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내리신 벌은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여기며,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동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하기 보다는, 형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고 살곳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가족은 요셉의 배려 아래에서 17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고, 형들은 두려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제 아버지도 죽고 없으니,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를 할 까봐 두려워 떨게 되죠.

창세기 50장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얼마나 무서우면 이렇게 덜덜 떨면서 이야기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형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요셉이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는지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50장 19절부터 21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지금 요셉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한 말이 바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복수를 허용하신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보복하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 앙갚음하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기 4장부터 31장까지 욥을 괴롭히고 정죄했던 욥의 세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욥기 42장 7절부터 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지금 이 장면은 그 동안 욥을 정죄했던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한 복수를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욥의 세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태도가 무엇입니까? “욥, 너는 틀렸다! 너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잘 못되었다!” 고난 중에 있었던 “욥”의 옆에 딱 붙어서, 떠나지도 않고 끊임없이 욥을 괴롭게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욥의 세친구들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우리가 읽은 구절들을 보면, 아주 재미있고 통쾌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와 그 두 친구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종” 욥의 말과 같이 그들의 말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거죠.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부분에서 욥을 괴롭게 했던 친구들의 이름은 제대로 언급되지도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이름은 내가 알바 아니고~”라고 하시는 것처럼 분노해서 소리치시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은 다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욥은 “내 종”입니다. 혼내도 내가 혼내고, 때려도 내가 때리는 “내 종”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내 종”에게, “내 아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짧은 구절 내에 하나님께서는 “내 종, 욥”이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종, 욥”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고, “ 내 종, 욥” 이 너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너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높여주시는 거죠. 그래서 욥기 42장 9절 끝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눈이 욥에게만 주목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하나님의 눈에는 욥만 보이는 겁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욥기 38장부터 욥에게 나타나셔서 41장까지 욥을 책망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친구들은 42장에서만 조금 나무라시고, 당신이 아끼시는 종인 “욥”은 네 장에 걸쳐서 혼내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욥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저희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런 말을 종종합니다. “다른 애들이 어떻게 하는 것은 아빠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안된다. 왜냐하면 너희는 아빠 자식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니까 혼도 내는 겁니다. 내 자식이니깐 그 사람들과 똑같은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욥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요셉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원수를 갚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해 오셨고, 잔소리 해 오셨고, 그들과 여러분의 인생을 만져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원수갚는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이야기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어려운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용서에는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조건적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니, 너희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용서”는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그냥 넘어가라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옳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용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공정하고 옳은 일을 행하실 거라고 믿는 행위 입니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걱정할 때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라...속 버린다…” 그래서 원수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가 해주실 것이니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이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속 버릴까 걱정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해를 가한 나쁜 사람들을 그냥 넘어 가겠습니까? 결국에는 우리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마음 상해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에 있는 분노를 떠나 보내시고, 평안의 잠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