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할렐루야대회(9.19–21)는 올해 ‘세대를 잇고 교회 울타리를 넘어’라는 주제의식을 강단 전체에 녹여냈다. 강사로 선 1.5세 목회자 3인은 미국 동·서·남동부에서 현장을 뛰고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예배의 본질, 다음 세대의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성경 본문과 삶의 이야기로 정면 돌파했다. 메시지의 공통분모는 분명했다. 시험과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여기의 교회와 가정에서 찾으시는 한 사람과 한 세대는 누구인가였다.
첫날 김한요 목사는 약 1장 1–4절로 시험 후 내게 정말 남는 것을 점검하게 했고, 둘째 날 마크 최 목사는 시편 63편으로 광야에서도 예배가 기쁨을 회복하는 과정을 증언했다. 마지막 날 이해진 목사는 사도행전 13장 22절과 시편 89장 20절로 하나님이 지금도 찾으시는 한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다음은 둘째날 마크 최 목사의 ‘광야에서 눈물이 날 때’(시63:1-11)에 대한 설교 요약이다.
감사하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다. 내가 이민 와서 예수님을 만난 곳이 바로 이 교회다. 1984년에 이민했고 1986년부터 순복음 뉴욕교회를 다녔다. 고등학생 때 김남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회자의 길을 시작했다. 결혼도 여기서 했고 두 자녀도 여기서 낳았다. 이번 집회 강단에 서게 하신 배려가 크다. 오랜만에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2005년 할렐루야대회에는 청소년 강사로 섰고, 그 집회가 끝난 뒤 약 100일 만에 맨해튼에 교회를 개척하는 길로 이어졌다.
오늘 본문은 시편 63편이다. 표제는 유다 광야에 있을 때의 다윗의 시라고 기록한다. 예루살렘의 왕이던 다윗이 왜 광야에 있었을까.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이었다. 왕좌에서 도망자가 된 다윗은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다. 광야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는다. 물이 없어 메마른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고 내 육체가 주를 악모한다. 목이 터질 듯 물이 필요한 자리에서 다윗은 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모했다. 성소를 떠나 있었지만 성소에서 보았던 권능과 영광을 기억하며 광야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았다. 다윗의 도피 여정을 사무엘상 21장과 30장의 지도로 훑어보며, 광야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신자의 일상에 스며드는 시간임을 짚었다.
나는 청년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농구를 특히 좋아했다. 마이클 조던을 직접 보겠다는 소망이 있어 맨해튼 34가 일대에서 사흘을 줄 서 티켓을 구했다. 금요예배가 끝난 성도들이 줄 옆을 지나갈 때 목사님과 마주칠까 봐 박스 안에 숨은 일도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다윗이 보여 준 갈망은 그런 팬심을 가볍게 넘어서는 전인적 갈망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예배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다윗은 가르친다.
갈망을 노래로 고백한 이도 있다. 마틴 나이스트럼은 1981년 금식 19일째 시편 42편을 묵상하다가 목마른 사슴을 단숨에 썼다. 나는 1985년 순복음 뉴욕교회 고등부 수련회에서 이 찬양을 처음 영어로 들었고 그날 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다. 스무 살 전 주되심을 만나고, 서른 전 결혼을 결정하고, 마흔 전 소명을 확증하라는 권면도 그때 들었다. 실제로 스물일곱에 결혼했고 사십을 전후해 소명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졌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만나 주신다는 약속은 진리다. 1.5세로 자라며 한자성어가 낯설기도 했지만, 성도가 품어야 할 마음은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목양일념. 목회자는 양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 성도는 주님을 찾고 예배하는 일에 한마음을 두어야 한다. 손양원 목사가 말한 예수 중독자의 길,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생이 바로 그 마음의 다른 표현이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다윗은 생명을 지키려 광야로 도망쳤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을 발견한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 이 깨달음에 대한 성도의 반응이 예배다. 입술로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평생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손을 든다. 성소에 있지 못해도 예배는 멈추지 않는다. 다윗의 가장 뜨거운 예배는 광야에서 드려졌다. 찬양팀도, 반주도, 합창도 없었지만 거기서 예배가 살아났다. 회중과 함께 하나님이시여 찬양을 부르며, 갈망이 예배로 전환되는 순간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는가. 다윗은 도망자요 비참한 아버지였지만 5절 이후 그의 마음 안에 기쁨이 솟는다. 왕실의 진수성찬을 먹지 못하는데도 진수성찬을 누린 것처럼 만족을 고백한다. 하나님을 갈망하니 기쁨이 주어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니 기쁨이 견고해진다. 이 기쁨은 세 겹으로 온다. 먼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할 때의 기쁨이다.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고 새벽에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지난날 베푸신 은혜를 되새긴다. 다음은 현재의 보호하심을 확신할 때의 기쁨이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다.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시는 현장이다. 마지막은 미래의 인도하심을 믿을 때의 기쁨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 과거의 은혜, 현재의 보호, 미래의 인도가 한데 묶여 기쁨의 패키지가 된다. 그래서 11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다시 왕이라 부른다. 기쁨이 회복되니 정체성이 회복된다. 광야는 추락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이민교회의 현실도 그 틀에서 다시 보게 된다. 한때 동네마다 즐비했던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진 것처럼, 변화를 거부하면 교회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다. 질투, 마지막 승부, 허준, 모래시계, 대장금, 천국의 계단, 겨울연가 같은 드라마 비디오를 가족이 둘러앉아 보던 시절이 있었다. 황제 비디오, 은성 비디오, 스프링 비디오 같은 간판도 있었다. 지금은 다 사라졌다. 이민사회는 변했는데 교회가 변하지 않으면 조용한 탈출이 일어난다. 그래서 결심했다. 부흥하는 교회는 젊은이가 많고, 다음 세대가 마음껏 뛰도록 자리를 내준다. 우리 교회는 주일 프라임 타임인 오전 11시 30분 본당을 영어권 예배에 내어주고 한어권 예배 시간을 조정했다. 좋은 시간과 공간을 과감히 넘기는 결단에서 세대를 잇는 예배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EM과 KM의 문화 차이를 유머로 풀어냈지만 결론은 분명하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교회는 많지만 성도는 적다는 자조에서 벗어나려면, 예배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광야의 눈물도 하나님이 새 길로 이끄신 표지였다. 9/11의 비극을 겪으며 사랑하는 형제를 찾으러 맨해튼 그라운드제로로 들어갔다. 차창 너머로 맡았던 죽음의 냄새를 잊지 못한다. 생활과 예배 중에 쏟아낸 수많은 눈물 속에도 인도하심이 있었다.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고 지켜 주셨다.
목회 진로의 분기점은 2005년 이 집회와 맞닿아 있었다.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비서로 섬기던 때, 미국 재이민과 개척을 여러 차례 구했으나 하용조 목사의 대답은 여덟 달 동안 아직 아니었다. 같은 해 할렐루야대회 기간 새 예배당 성인집회를 하 목사가 인도했고, 나는 뉴욕장로교회에서 청소년집회를 섬겼다. 토요일 오후 타임스스퀘어를 걸으며 목사님이 말했다. 뉴욕 한복판에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당신이 가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음으로 순종을 결단했다. 이름을 바꾸자는 농담 섞인 주문도 받았지만 더 미루지 않았다. 가족을 먼저 보내고 석 달 뒤 뉴욕으로 돌아와 첫 예배를 시작했다. 사람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왜 필요한지 그때 배웠다.
2018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날씨가 최악이던 날, 공무원 마라토너 가와우치 유키가 우승했다. 유력 주자들은 악천후에 무너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레이스를 완주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만의 경주를 했다는 그의 말은 광야를 달리는 성도의 고백이어야 한다. 광야에서도 달려야 한다. 광야가 더 익숙한 이민자의 삶일지라도 그 광야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달릴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