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기독일보) 훼드럴웨이제일장로교회 이민규 목사
(Photo : 기독일보) 훼드럴웨이제일장로교회 이민규 목사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은혜의 무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값진 것, 즉 중한 것인가입니다.

사람이 남의 죽음보다 자신의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손톱 밑의 가시가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는 나의 고통과 비교하면 조금 알 수 있습니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배고파 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압니다. 그걸 '공감'이라고 합니다.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면 조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아파 봤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일 때 비교가 가능한 것이요, 경험할 수 없는 고통일 때는 공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무게를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너무 어렵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는 만큼만 우리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내 죄를 위한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죄가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은혜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이는 1년에 한 번, 어떤 이는 1년에 몇 번, 어떤 이는 매일마다 내 안의 죄와 연약함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가, 아니면 우리의 힘으로 사는가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연약한 존재임을 늘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 깊은 연약함을 덮으시고 우리를 위해 구원의 일들을 행하시니, 그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고백처럼 '오직 은혜'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공감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간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심판의 예비적 성격이요,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체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적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 양과 염소가 나뉘는 심판대 앞에 서면 아마 그때 더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 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수록 성도의 마음은 감격으로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