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저께와 어제, 하나님을 믿는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 한 문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문장이라고 짐작한다. 어제 학부 ‘설교학’ 과목 수업 중이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참담한 현실로 인해 나도 모르게 학생들 앞에서 크게 분노를 표시하고 말았다. 수업을 마친 후 후배 교수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수업 중 경험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2] 한 여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고 있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나와 똑같은 이유로 눈시울이 붉어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보다 더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미술관 관장이 문자를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수님, 하나님을 신뢰한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암담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네요.” 나를 비롯해서 전국의 적지 않은 이들이 심적으로 극심한 고통과 낙심 중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3] 피곤하고 졸립기도 했지만,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 현실화된, 믿기지 않는 이 꿈같은 현실로 인해 견딜 수 없는 나머지, 저녁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해버렸다. 자고 일어나니 12시가 넘어 있었다.
서재로 와서 주문한 책을 읽었다. 책 제목은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이다. 책 주문을 잘하지 않는 내가 며칠 전 주문해서 어제 받은 신간 서적이다.
[4] 책 제목을 보면서 ‘내가 왜 이 제목의 책을 주문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솔직한 내 마음의 불만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좀 풀어보려고 그 책을 신청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필립 얀시(Philip Yancey)라는 분이 있다. 그분이 쓴 저서 가운데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Disappointment with God)가 있다.
[5] 얀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대중들이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글을 잘 쓰는 작가이다. 그는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믿음의 문제를 드러내 놓고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간 하나님에 관한 성도들의 의심과 실망과 분노 등을 그저 성경이 정해 놓은 모범 답으로만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속에서 솟아오르는 의심과 분노를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활화산처럼 폭발하게 몰아갈 뿐이다.
[6] 사람들 속에 있는 회의와 절망과 분노는 부정하려 하거나 틀에 매인 정답으로 억눌러버리려 해선 역효과가 날 뿐이다. 얀시는 믿음의 여정에서 의심과 회의와 분노의 과정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과 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는 성숙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얀시는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글에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이 감동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7] 그의 글은 그저 교회나 성경이 정해 놓은 정답을 제시하며 윽박지르려 하지 않고, 모든 회의주의자들과 함께 그 길을 같이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실망하고 심지어 분노해서 하나님께 대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께 분노와 절망을 쏟아 놓았던 구약의 욥과 선지자들을 비롯해서, 세상의 불공평함을 외치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8] 그들에게 작가 얀시는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은 하나님께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함으로, 마침내 그분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나 또한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악과 불의와 부정의 세력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를 제지하지 않고 방치하시는 하나님께 크게 실망하고 있는 중이다.
[9] 그런 내게 하나님은 시 37:5절의 말씀을 주셨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또 다른 한 구절인 잠 16:3절도 주셨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두 구절의 공통 분모는 “너의 길과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이다.
[10] 이때 등장하는 “여호와께 ‘맡기라’”라는 말에서 ‘맡기라’란 말은 잘못 번역된 말이다. “여호와께 ‘굴려버려라’”로 번역해야 한다. ‘맡기는 건’ ‘찾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염려나 근심이나 걱정은 맡겼다가 찾아가면 안 된다. 우리말 번역대로 우리 한국 성도들은 집회 참석해서 은혜받을 때는 염려, 근심, 걱정을 잘 맡긴다. 언제 찾아갈까? 은혜받을 때 잠시 맡겨놓았던 걱정보따리를 신발 신을 때 다시 싸서 짊어지고 집으로 가져간다.
[11] 때문에 ‘맡기라’가 아니라 원문대로 ‘굴려버려라’로 번역해야 한다. ‘גּוֹל’(시 37:5)과 ‘גּלל’(잠 16:3)은 사촌지간이다. 영어로는 ‘roll on’이고, 우리말로는 ‘굴리다’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그분께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다 던지고 굴려버리고 완전히 자유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연속으로 발생할 때 “하나님,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따지거나 항변할 때가 많다.
[12] 그 모든 건 자기 기준에서 판단할 뿐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 내 생각과 그분의 생각은 다르다. 깊이나 넓이 면에서 우리의 생각은 얕고 좁지만, 그분의 생각은 한도 끝도 없이 깊고 넓다. 내 잣대로 하나님이 악과 불의를 즉각 심판하셔야 했다면, 나 자신이 먼저 ‘즉각’ 심판받았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인 니느웨 백성들도 왕과 모든 백성들이 철저하게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셨는가?
[13]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하나님, 어느 때까지 악인들의 죄를 방관하시렵니까?” 이런 질문과 불만이 쏟아지는 우리의 심정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느냐?”에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낙심의 마음에서 “하나님, 비록 현실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저는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라는 확신의 마음으로 변화됨에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