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한국에서는 한국 교회 전체 성도들 100만명이 광화문 광장에 결집하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국민들과 세상이 이 집회를 보는 관점을 떠나, 교계에서 이 집회에 대한 찬반론이 있었습니다. 찬성하는 쪽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저지하여, 차세대 자녀들을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교육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목소리였다고 평가하였고, 반대하는 쪽은 기독교가 다른 믿지 않는 국민들의 입장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행보였고, 사회의 정의실현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의롭고 선한 일을 찾아 하기에도 부족한 때에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대규모 기독교 연합 집회를 바라볼 때, 1차적으로는 “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포괄적 차별 금지법은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사회의 도덕과 윤리로 규정하여, 인간사회의 성적 역할을 혼돈에 빠트릴 무서운 법안입니다. 한마디로 가정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법안입니다. 이 법안 때문에 유럽은 정상적인 교육 아래 자랐다면, 타고난 성별 대로 행복하게 살았어 야 할 자녀들이 성을 바꾸는 트렌스젠더와, 동성애자와 동성 이성을 모두 파트너로 삼는 양성애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 간의 사랑과 동성 간의 우정은 다르지 않다 그 우정 또한 사랑이다” 가르치며, 동성 간의 성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가르칩니다. 심지어 다윗과 다니엘,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의 친밀했던 관계를 동성애의 한 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기독교가 정치적인 일, 사회적인 일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는 없습니다. 성경의 에스더 말씀을 보면, 페르시아 제국의 압제 하에, 기적적으로 왕후가 된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가 멸절 당할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선처를 베풀어 달라 요청했습니다. 이 일도 엄밀히 말하면, 정치적인 개입입니다. 왕후가 자신의 민족을 구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왕후 자리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신의 민족의 정치적인 입장을 피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입법부에 전한 것은 정당한 일이었으며, 이것은 다른 믿지 않는 국민들 중에 같은 입장을 가진 분들까지도 대변한 것이니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이번 집회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치적 입장을 밝힐 것이라면, 신앙적, 성경적 관점을 설명하기 보다는 믿지 않는 분들이 납득할 만한 사회적 논리로만 접근했어야 한다라는 점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창조론이 웬 말이며, 동성애를 죄로 혹은 회개할 일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어떻게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유럽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직접 경험을 하고 후회했던 정치인들과 의료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입장을 호소하는 집회라면, 집회의 목적에 부합한 모임을 가졌어야 하는데, 이 쪽에서는 예배를, 저쪽에서는 젊은이들이 찬양과 율동을, 또 다른 쪽에서는 목회자들이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와 기도회를 인도하는 등 다소 산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믿지 않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회개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분들에게 회개하라 촉구하고, 보기에 심각한 듯한데, 율동을 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예배를 하니,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집회를 통해,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이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느낄 만큼, 타락의 정도가 심화되었음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같은 기독교계 안에서도 이번 집회에 관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반대 입장에 선 목회자들과 신학교수들 중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 분들이 계셨습니다. “왜 기독교인이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며, 종교적 입장을 고집하느냐? 그럴 시간과 돈이 있으면, 고아와 과부와 같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가치가 아니냐?”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무서운 미혹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사회적 윤리와 도덕 인권과 같은 일들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무섭게도 인권, 자유, 평등이라는 가치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 말씀은 도외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을 포함하는 전 세계적인 풍조입니다. 이제는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진리, 성경 말씀의 기준이 아닌, 현대 세상에서 중요시하는 사회적 가치와 도덕을 더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풍조는 하나님을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는 독재자로 느끼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만들 것이고, 기독교에 무관심하게 만들 것입니다. 즉,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반대되는 가치와 윤리가 만연함으로써, 더 이상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영적 싸움은 “인본주의 즉, 인간이 결정하는 가치와 윤리냐? 신본주의 즉, 하나님께서 뜻하고 명령하신 영적 가치와 기준이냐?”의 싸움입니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당할 것이고, 신자와 교회들은 배교할 것이며, 우리의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그러한 세계관으로 세뇌당하여, 아무런 고민 없이 인본주의적 세계관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의 믿음과 자녀들을 보호할 자는 우리 자신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문제이기 떄문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저항해야 합니다. 전투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