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일 교수
(Photo : ) 안창일 교수

필자는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유학을 와서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영어로 공부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신학 용어들은 더더욱 생소했었다. 그래도 좋은 신학교에서 잘 짜인 3년 커리귤럼의 목회학 석사(M. Div.) 과정을 통해 목회자로, 신학자로 잘 훈련받을 수 있었던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당시 학교는 목회학 석사 과정 졸업 자격요건으로서 학생들에게 성경 시험과 소요리 문답 시험을 반드시 통과하도록 요구하였다. 성경 시험 준비는 단시일 내에 할 수 없기에 평소에 성경 내용을 계속 공부해야 했지만, 소요리 문답은 시험을 보기 며칠 전부터 108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암기해야만 했다. 물론 당시에는 이런 규정이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시험을 치고 난 후 얼마 못 되어 암기했던 것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소요리 문답에서 다룬 내용과 지식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졸업 요건을 갖추기 위해 성경 내용을 정리, 요약해 보고 교리문답을 암기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두고두고 필자가 성경적, 신학적, 신앙적 교리체계의 윤곽을 배우고 정립하도록 하는 데 큰 도움과 밑거름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라는 신조를 내세웠던 것처럼,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개혁주의 교회는 모든 신학과 신앙, 그리고 교리의 근거를 성경에 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개혁주의 교회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을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는다. 그런데 필자가 목회 현장에서 자주 느끼면서 경각심을 갖는 것 중의 하나가 현대의 교인들이 성경과 기독교의 기본 진리마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영적 현실이다. 의외로 많은 교인이 성경을 배우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성경을 배우려 하지 않는 듯하다. 교인들이 성경에 특별한 관심이나 열심을 갖지 않아도 신앙생활에 별로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도 문제이겠지만, 목회자들 역시도 성경을 체계적으로 심도 있게 가르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기보다는 교회의 다른 프로그램이나 훈련 과정을 통해 교인들에게서 신앙생활과 영적 성장의 빠른 효과를 보려는 경향도 그러한 영적 현실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어릴 때 등하교 길을 오가는 중에, 동네의 담벼락 곳곳에 부흥회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자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부흥회 포스터에 쓰여 있던 주요 문구들은 성령 충만, 치유, 은사 등과 같은 단어들이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교회와 목회자들이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가 부흥회 문구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처음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한국 초기 교회들의 부흥회의 일반적 표현은 “부흥 사경회”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고 배우고 연구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인지 모르지만 사경회라는 말보다는 “심령 부흥회”라는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성령의 은사와 방언, 치유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고 또 체험하는 그런 분위기가 많았던 것 같다. 필자의 주관적인 분석이고 생각이지만, 그 뒤로는 제자 훈련 및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요즘에는 경배와 찬양 집회가 교회의 영적 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들이 필요 없다든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요소나 영적 문화에 밀려서 교회와 교인들이 성경 말씀 자체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치중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싶은 것이다. 성경을 깊이 배우고 연구하고 깨닫게 되어, 성경의 진리와 신학적, 교리적 올바름 위에 신앙과 삶이 견고히 서는 성도의 삶을 격려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수년 전 필자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성금요일에 청년부 담당 목사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이 몸의 부활인 것과, 장차 성도들도 몸의 부활을 얻을 것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런데 어느 한 대학생이 자기는 그런 교리를 처음 들어본다며 놀라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자랐고, 한국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도 했지만, 몸의 부활 교리는 너무 생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 성경적으로 맞는 교리인지, 혹시 청년부 목사님이 잘못 가르친 것은 아닌지, 담임목사인 필자에게 확인하러 왔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적잖이 놀란 것은 그 학생이 아니라 오히려 필자였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사도신경의 한 부분을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성령을 믿사오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이 학생은 이전에 수도 없이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암기하여 고백했었겠지만, 그 고백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성경 구절을 통해 부활에 관한 바른 교리를 그 학생에게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었다.

사도신경에 관하여 말이 나왔으니,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오해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 한 가지를 더 설명하면 좋겠다. (필자는 지금 사도신경을 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것이 맞느냐 아니냐를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표현이다. 많은 교인은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빌라도 총독을 비난하는 불합리한 고백이라고 오해한다. 사실 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알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무던히 노력하지 않았는가!

우선, 이런 오해에는 한글 번역의 표현 선택에 그 책임이 있을 수 있겠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보다는 “아래서” 혹은 “통치 아래”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의 원인을

빌라도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빌라도에 의해 대표되는 로마 법정도 예수 그리스도가 무죄함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고백이고, 그러기에 예수님의 고난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닌,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길을 알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을 아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 라는 신조를 내세운 것도 성경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분리된 신앙과 교리, 그리고 성도의 삶의 원리들은 모두 다 벗어버리고자 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고 보여주고 인도하는 대로만 신앙과 삶을 이어 나아가기로 한 결단이었고 헌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서 추구하고 경험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한다.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배우며/가르치며 지켜 행하는 일에

항상 열심을 내야 하겠다. 성경을 ‘덮어 놓고’ 믿지 말고 성경을 ‘펼치고서’ 과연 그러한가, 아닌가, 철저히 따져가면서,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밝히 보기를 힘써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그러한 말씀의 은혜와 능력과 복을 많이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 원고의 내용은 전적으로 저자의 것입니다.

저자 약력

안창일교수는 한국외국어대와 리폼드 신학교(Jackson, Mississippi)를 졸업하 고 트리티니 신학교(Deerfield, Illinois)에서 구약학을 공부(수료)했다. 현재는 시카고 북부 서버브 Mundelein 시에 소재한 임마누엘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 으며, 센트럴신학대학원 구약분과 교수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