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하나님의 성품, 정의의 요청.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는 “사랑과 공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간단한 개념 규정의 문제가 아니다. 일견, 예수께서 명하신 아가페 사랑의 실천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어려운 것은 정의(正義, justice)를 구현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의의 하나님께서 정의의 잣대를 우리에게 대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한 기준에 도저히 미칠 수 없으므로 두려울 뿐이다. 정의 또한 우리에게 초월을 요청하는 명령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완전함(창 17:1)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거룩함(레 11:45)을 요청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에는 자비함(눅 6:36)과 함께 온전함(perfect, 마 5:48)과 그리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뛰어난 의(righteousness, 마 5:20)을 요청하신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righteousness)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신다. 아가페의 사랑은 어떻게 정의와 연결되는지 살피자.
1. 사랑과 정의의 단절 모델.
구약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대한 단어가 충만하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는 종종 쓰이지만, “공의” 혹은 “정의”라는 단어는 살펴보기 힘들다. 종종 복음주의 일각에서는 구약의 ‘정의’가 신약성경의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또한 구약의 정의에 대한 강조는 신약에서 아가페적 사랑으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정의로운 하나님은 신약에 들어와 사랑의 예수로 바뀌고, 엄위하시고 두려우신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은 퇴각하셨는가? 이사야와 아모스와 여러 선지자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대언(代言)한 선포는 이제 불필요하게 되었는가?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종종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가능하지만, 정의의 구현은 신앙인의 사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는 하나님께서 시행하실 과제로 미루어 놓는 경향을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우려한다.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교회의 사명에서 제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학적 보수성이다. 교회나 성도가 하여야 할 일은 교회 내적 사역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메노나이트의 윤리에서 가능한 경우이지만, 그러나 최근에는 메노나이트 진영에서도 기독교적 사회윤리와 정치윤리를 주장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한국의 보수적인 주류 장로교는 정치 참여에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중산층 혁명을 일으킨 청교도 전통과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개혁교회의 전통을 망각하거나 아니면 상실하고 있다.
둘째로 사랑과 정의의 이분법을 가능하게 하고 신약에서 정의를 약화 내지는 포기하게 된 이유는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사회 정의”(social justice)를 위한 급진적 이론제시와 격렬한 참여 때문인데, 그 결과 사회 정의라는 용어가 기독교권에서는 종종 의심스러운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스콧 알렌은 좌파적 지식인들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비판적 인종이론, 성 해방 및 젠더 평등이론을 주도하기 때문에, 사회 정의의 추구가 마치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과격한 좌파적 담론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한다. 더욱이 미국의 경우 성 정체성 혁명의 경우는 일부 미국에서 주류에 속하는 거대교단들인 장로교, 감리교 그리고 성공회의 분리와 갈등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교회의 성도들도 혼란에 빠져있으며,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사회 정의, 공공신학이나 정치신학은 좌경화 혹은 자유주의적 신학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결국 문화 일반에 대한 선교적 관점이나 책임감을 상실함으로, 복음주의자들은 대학, 정치계, 지식산업과 매스컴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적 활동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봄으로써 “사회 정의”라는 용어를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이 전략적 언어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셋째로는 사랑과 정의의 이원론적 분열을 이론적으로 주장한 학자는 안더스 니그렌이다. 그는 자신의 책 『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에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묵상하도록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공헌을 한다. 그는 서양의 중요한 종교를 이루는 중심적 태도를 세 가지로 간략하게 정리하며, 율법(nomos), 에로스(eros)와 아가페(agape)를 든다. 노모스 중심의 태도는 유대교의 핵심이요, 에로스는 헬레니즘의 기본 태도이며, 아가페는 기독교의 중심적 태도라고 했는데, 이는 과도한 단순화의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교, 기독교와 그리스 사상을 중심으로, 이 세 개념의 이합집산을 교회사 속에서 논의하며, 수천 년 정신사의 큰 산맥을 조감하고 있다. 니그렌은 아가페가 기독교의 창작물, 엄밀하게 말하면 계시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니그렌이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교정하라는 명령이 신약에서 철회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혁명적 변화가 아가페 사랑을 근본 동기로 삼는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가페가 “기독교의 고유한 창조물이다” 라는 주장이 ‘아가페가 정의를 대체한다’는 주장이 된다면 문제가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정의의 신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라는 니그렌은 주장한다. 그는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를 포함하거나 보충하지 않고 정의를 대체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기가 있는 정의”는 “동기가 없는 아가페”에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단순 논리에 대하여 월터스토프는 라인홀드 니버를 통하여 비판한다. 월터스토프에 의하면, 니버는 니그렌이 “순진한 오류”를 범했고, 이는 사회적ㆍ정치적 차원에서는 재앙이 된 것이라고 보았다. 2차대전 중 히틀러와 나치당이 범한 범죄적 행위에 대하여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한 독일 개신교의 모습은 사랑과 정의를 분리하여 교회 내적 상황에 몰입하고 사회 정의 및 정치적 관심에 거리를 둔 그리스도-문화의 역설(paradox)이라는 소원한 관계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니그렌은 그 중의 대표적 이론가였다. 그는 하나님의 태도는 분배정의가 아니라 아가페였고, 응보정의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이었다고 주장한다.
2. 사랑과 정의는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신다. 죄란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니그렌의 “아가페주의”(agapism) 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사랑은 자기 사랑의 동기가 없어야 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과 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사랑과 의, 공평, 정의라는 단어를 분리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경에 풍성한 정의와 공평, 공의에 대한 단어를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신구약에서 사랑(love)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어휘들을 축약하지 않은 상태로 모은 존더반 성구사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약 800회 정도 등장한다. 그러나 정의로 사용되는 의(just, right), 공의(justice), 정의(righteousness)라고 번역된 것은 1,000회를 훨씬 상회한다. 더구나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소개하면서 말한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할 것을 선포한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라는 단어 “디카이오쉬네”는 그리스ㆍ로마 문화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공평과 정의, “츠다카”와 “미슈파트”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정의와 관련된 단어는 이웃 사랑의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실례로 이웃 사랑을 명령한 레위기 19장 18절을 예로 들자. 이웃 사랑이라는 명령은 문맥에서 독립된 하나의 명령이 아니다. 이웃 사랑의 실례는 13-18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명령 속에 있으며 마지막 결론의 역할을 한다. 이웃을 억압하지 말라, 착취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 장애인을 배려하라, 재판에서 불의를 행하지 말라, 재판에서 가난한 자를 두둔하지 말고 공의를 세우라, 비방하지 말라, 이웃의 피를 흘리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견책하라,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는 계명 이후에 이웃 사랑하기를 너 자신 같이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총 6절인 13-18절 중에 각 두절의 마지막에는 “나는 여호와니라”는 반복적인 후렴이 들어간다(레 19:14, 16, 18). 이는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노예의 상황에서 막 벗어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이러한 기조는 성경 속에서 지속적이다.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적대적이 아니며, 사랑과 정의의 시행은 결코 구별된 것이 아니다. 이웃 사랑에는 자비(benevolence)가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웃 사랑에는 배려와 관심(care)이 필요하고, 구체적인 자비와 관심의 지속적 추구는 바로 정의로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웃 사랑은 단순한 온정주의나 동정심으로 마쳐지지 않는다. 이웃 사랑은 지속적인 관심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관심과 배려는 상대에 대한 지식을 생겨나게 한다. 더욱이 이웃 사랑은 이웃의 고통을 줄이려는 한 인격을 향한 존중과 행동을 낳는 책임감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의의 실천이며, 정의는 행동하는 사랑이 된다. 사랑과 정의의 밀접한 관련성을 월터스토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랑과 정의는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 이와 정반대다. 이웃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한 예로 인용되고 있다. 정당한 행동은 사랑의 한 예다. 예수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우리에게 명령하는 사랑이 정의가 요구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순전한 무상의 자애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신약의 사랑을 이해해온 방식이라면, 우리는 사랑과 정의의 통합을 위해 우리 이해를 재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가 나타났다고 사도 바울을 말한다(롬 1:17). 루터는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정의가 심판하는 정의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인간을 향해 부여하시는 의의 전가, 즉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 여기시는 칭의”(justification)와 관련된 말씀으로 이해하였고, 그와 같은 칭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오직 믿음”을 주창하게 했던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의로운’(just)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불의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기시는’(justify) 하나님의 행동은 의로우신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경신(輕信), 값싼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기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구속의 행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한 정의로운 행위이다. 하나님은 칭의를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고통을 수용하셨다. 우리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용서는 값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주시는 괴로움의 소산이며, 이는 사랑과 정의의 결정적인 연결고리이다. 사랑은 불의하지 않다. 사랑은 심판을 이기고 찬송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놀라움을 선물하는데, 이는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 자신의 정의로운 기준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이 죄 안에 계속 거할 수 없다. 죄의 병기가 아니라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므로, 의의 노예(롬 6:17-18), 하나님의 노예(롬 6:22)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이 정의로움과 직결된 것이라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논리적으로 불의한 것으로 발견될 수 있다. 이웃 사랑이 심판의 표지가 된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는 그러므로 놀라움과 함께 사랑과 정의의 연대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웃 사랑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계시인 마지막 심판의 비유에서 다시 나타난다. 오른편의 양과 왼편의 염소를 나눌 심판에서 이웃 노릇을 한 사람에게 구원을 베푼다는 것이다. “작은 자,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언급은 역사적 의미가 발견되지 않는 소자, 무지랭이에게 한 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역설이다. 이들에게 한 것이 예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는 소외당하기 쉬운 노동자, 망명자, 이민자, 국외자, 그리고 작은 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변에 계신다는 말씀이다. 이는 동정과 온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배려, 합당한 지식, 존중과 책임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실천과 정의로운 행동을 요청한다.
3. 사랑과 정의의 나라, 희년 공동체.
하나님은 아버지, 농군, 토기장이, 포도원의 주인 그리고 왕으로 불린다. 하나님에 대한 은유와 상징 가운에서 가장 강력한 은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은유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곧 왕의 대리자인 부왕(viceroy, 副王)으로 세우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공동체는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임이 확실하다. 예수님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음을 빌라도 앞에서 직접 밝히셨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그리스도는 그의 나라가 칼과 창으로 지켜지는 강제력에 기반한 나라가 아니라, 진리의 나라, 곧 진리에 속한 사람이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는 나라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는 몽상가의 환상이나 신기루가 아니라, 로마제국과 대조되는 사랑과 정의의 나라 곧 교회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명령은 따라서 필수불가결한 신자의 핵심적 사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은 구약시대에는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민족공동체로 존재해왔던 유대민족의 공동체이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그 나라는 로마의 제국 내에서 소수의 사람으로 시작된 교회이다. 교회의 공동체적 특성을 말할 때, 우리는 주변의 나라 혹은 공동체와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정의는 세상 나라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출애굽 이후 해방된 노예의 공동체가 세운 부족 연맹체의 모습을 가졌다. 그 후에 이어진 유대왕국은 모세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약 1,00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 나라의 독특성은 율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족국가였다. 그 율법은 당시 중근동의 문화와 대조적인 독특한 분배정의를 시행하는 공동체였으나, 그 공동체의 특성을 상실하고 기원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하여, 기원전 586년에는 남조 유대왕국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바벨론의 포로 상태 이후 페르시아에 의한 회복을 통해 민족공동체는 유지되었으나, 그리스, 로마의 순서로 통치하는 제국이 바뀌며 정치ㆍ종교적으로 도전받았다. 제국의 시대에도 민족은 생존하며 신앙적 정체성을 가까스로 유지했으나,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순수성은 여러 면에서 위기에 처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정치적 억압 상태가 극에 달했을 때, 진리 속에서 자유를 부여하는 나라로 선포된다. 사랑과 정의가 왕국을 관통하여 흐르는 나라는 어떻게 역사 속에서 구체화 될 수 있을까?
메노나이트 계통의 윤리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Yoder)는 자신의 저술 『예수의 정치학』(1994) 에서 누가복음을 주석하며,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희년 공동체”의 설립으로 주장한다. 희년 공동체는 로마제국 안에 존재하는 로마제국의 군사적 강제력과 행정적ㆍ법적 차원의 통치와는 지평을 같이하지 않는 나라이다. 그 나라의 백성은 교회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믿는 자로 시작하는 믿음의 나라, 진리 되신 예수를 좇는 진리의 나라이지만, 그 나라의 기반은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과 성령의 임재, 곧 진리의 영이자 사랑의 영이며 정의의 영인 제3위 하나님 안에서 시작된 나라이다. 1994년에 출판된 『예수의 정치학』에서 요더는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희년의 사회혁명으로 시작하였다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앙드레 트로끄메(André Trocmé) 목사의 저술 『예수와 비폭력혁명』 의 논지를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쓴다. 트로끄메와 요더와 이에 동조하는 학자 군에 의하면, 예수의 통치로 세워지는 나라는 그러므로 로마와 유대인 실력자의 현실적 통치 아래 시작되는 희년 공동체인 교회이다.
그 공동체의 특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공동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성령 공동체이며, 사랑과 정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이다. 연약한 자를 치유하는 치유공동체이며, 정사와 권세로부터 해방된 영적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희년 정신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희년의 규정을 따르는 구약성경은 규칙적으로 해방과 안식에 동참하게 되는 나라를 추구한다. 희년 공동체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 하나님의 제시하는 불연속, 곧 안식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실행되는 사회구조를 낳는다. 안식일, 안식달 티시리월,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 7번 안식년이 반복된 후 49년이 지난 다음 해 50년 희년으로 구성되는 시간적 구조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시된 자유와 해방과 회복이 함께하는 사회에 대한 요청이다. 휴경해야 했고, 빚은 탕감되었으며, 종의 해방되고, 희년의 경우에는 의식주의 절대 기초인 조상의 경작지가 무상으로 되돌려지는 ‘토지 무르기’가 시행되었다. 희년 공동체의 성취는 그러므로 개인의 병립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결과를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나, 교회공동체, 성령 공동체, 희년 공동체의 모습으로 사도행전 2, 4장에 등장하는 새로운 코이노니아 공동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