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문 목사 (달라스 생명샘교회)
안광문 목사와 함께 하는 신학산책 photo by 기독일보

2회: 에베소서의 장르

 

   에베소서는 전통적으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전형적 편지 구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갇힌 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엡 3:1; 4:1) 그런 측면에서 많은 학자들은 에베소서를 옥중 서신이라고 부르는데 이견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Gorman이라는 신학자는 에베소서에 대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편지라는 말 대신에 "에베소서라 불리는 문서"라고 하면서 "이것은 편지인가?"라고 묻습니다. 박창건이라는 신학자도 에베소서를 편지라고 하기보다는 설교문이나 의식문 또는 서신 형식으로 된 소책자, 개종자들을 위한 침례 설교문, 서신 형식의 신학적 논문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의 저명한 학자인 Lincoln이라는 분은 에베소서가 편지 형태이지만 수신자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기 위해서 썼다는 점에서 에베소서는 설교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역시 에베소서를 평생 연구한 Hoehner라는 신학자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내용상으로 여러 장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만 구조적으로 다른 바울 서신 및 헬레니즘 서신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에베소서는 편지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Gorman도 에베소서가 편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에베소서를 편지라고 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합니다. 박창건이나 Lincoln의 주장처럼 에베소서 안에는 여러 종류의 장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문, 의식문, 신학 논문과 같은 장르는 형식에 따른 분류라기보다는 내용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서신 구조는 형식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은 서로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이 둘을 비교하며 내용이 맞지만 형식이 틀렸다거나 형식은 맞지만 내용은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에베소서는 내용으로는 보면 설교문, 의식문, 신학 논문이고, 형식으로 보면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편지 형식으로 에베소서를 써야 했을까요? 편지 형식이 아니라 설교문 형식으로 쓸 수는 없었을까요? 아니면 논문 형식은 어땠을까요? 바울이 만약 오늘날 우리 시대에 살았다면, 그래서 Zoom, FaceBook, YouTube 같은 온라인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면 편지 형식이 아니라 직접 설교를 하거나 강연을 했을 것입니다. 설교나 강연 동영상으로 녹화를 해서 수신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기독교 일간지에 기고하거나 학회지에다가 소논문 형식으로 글을 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들을 지금처럼 독자들이 직접 읽기 위해서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교육 수준, 문맹률, 그리고 그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층민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신자들은 바울 편지를 직접 읽었다기보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메시지를 들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도 수신자들이 읽기 위한 서신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읽어주고 수신자들은 듣기 위해서 쓰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서도 수신자들이 잘 알아듣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어와 문장 형식, 즉 가능한 긴 문장보다 간결한 문장 - 물론 1장 후반부와 2장 전반부 등 긴 문장도 있습니다. - 을 지향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편지를 전달했던 두기고와 같은 사람들도 역시 지금의 집배원이나 택배 기사처럼 단순하게 편지만 전달했던 것이 아니라 편지를 읽어주고, 편지 배경과 그 편지에 대한 바울의 의도를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수신자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했을 것입니다.   

- 달라스 생명샘 교회 안광문 목사 -